주간동아 917

2013.12.16

“굿바이 타타(아버지)”…만델라 ‘별’ 되다

12월 10일 폭우 속 추도식 전 세계인 애도…빈부격차·흑흑갈등 사회적 불안정에 직면

  • 요하네스버그 = 전승훈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email@address

    입력2013-12-16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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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아래부터 손에 꽃을 들고 올라오는 사람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노란색 국화를 들고 온 백인 여성, 보라색 수국을 손에 든 흑인 남성, 들꽃을 꺾어온 소녀…. 그들은 간절한 손길로 촛불을 켜고 기도했다. 그리고 깨알 같은 손글씨로 편지를 썼다. 12월 5일 세상을 떠난 ‘타타(아버지) 마디바(존경하는 어른이라는 뜻으로, 넬슨 만델라에 대한 존칭)’에게 쓴 편지였다.

    “마디바는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당신 덕분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늘나라 천사들도 춤을 추고 있을 거예요. 고귀한 분이 막 도착했으니까요.” “타타, 당신은 신께서 인류에게 내려준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12월 7일 오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교외에 있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자택 앞에는 꽃 수천 송이가 산처럼 쌓였다. 이곳만이 아니었다. 요하네스버그 만델라 광장에 있는 만델라 동상, 만델라가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집무를 본 수도 프리토리아의 유니온 빌딩 앞 등 만델라의 흔적이 있는 곳 어디든 그를 추모하는 꽃다발과 촛불이 쌓였고, 추모객의 노래와 춤이 이어졌다.

    춤과 노래로 만델라의 삶 축하

    특히 추모 장소마다 추모객 수백 명이 한데 모여 “넬슨~ 만델라~”를 외치며 엉덩이를 흔들고 발을 구르며 격렬하게 춤추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에게 슬픈 날 왜 춤을 추느냐고 물었다. 헤이잘 마지무코(45·여) 씨는 “아프리카 사람은 행복할 때도 춤추고 노래하고,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때도 노래한다”면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정책) 시절에는 감정도 맘껏 표현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자유롭기 때문에 춤을 춘다”고 말했다.



    이러한 축제 분위기는 폭우가 쏟아지는 12월 10일, 요하네스버그 FNB 경기장에서 열린 국가 공식 추도식에서도 재연됐다. 새벽부터 시작된 비바람을 뚫고 걸어서 FNB 경기장을 찾은 추모객들은 “아프리카에서는 지도자가 돌아가셨을 때 비가 오는 것이 행운의 징조”라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오전 6시부터 입장을 시작한 이후 수천 명의 사람이 인종과 피부색을 넘어 함께 손뼉을 치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마치 월드컵 축제에 참가한 듯 국기를 온몸에 휘감거나 만델라 티셔츠를 입고 발을 구르며 춤추고, 부부젤라를 불어대며 FNB 경기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콜레카 줄루(31) 씨는 “눈물을 흘리지만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이라며 “우리는 추모하러 온 게 아니라 만델라의 승리의 삶을 축하하려고 왔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온 추모객 엘리나 크리스틴(42·여) 씨는 “믿을 수 없도록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말했다.

    12월 10일 하루 종일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FNB 경기장에서 열린 만델라 추도식에는 100여 개국 수반과 정상급 인사가 참석해 역대 최대 규모의 조문 외교를 펼쳤다.

    이날 정오 시작된 추모식에서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와 함께 전 세계 지도자의 얼굴이 전광판에 비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가장 뜨거운 박수를 받은 것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만델라와 오바마는 각각 남아공과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데다, 오바마가 여러 차례 만델라를 자신의 멘토라고 밝혀왔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만델라를 ‘역사의 거인’으로 칭하면서 “만델라의 투쟁은 여러분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여러분의 승리였다”고 말했다. 그는 만델라를 간디, 마틴 루서 킹과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행동과 이상의 힘을 가르쳐줬으며, 법을 넘어 사람의 심장까지 바꾼 사람”이라며 “만델라가 가르쳐준 자아성찰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는 연설 전 미국과 냉전관계에 있는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악수를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적국도 우방국도 뛰어넘은 조문 외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추도사에서 “무지개는 비와 태양이 어우러져 탄생하듯이, 만델라와 남아공 국민의 고통과 영광이 무지개 국가를 탄생하게 했다”며 “만델라는 위대한 정치지도자를 넘어 이 시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추모했다. 이어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국가부주석과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추도사를 했다.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만델라의 꿈은 이제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 해소로 완성돼야 한다.”(남아공 노동조합총연맹)

    1994년 남아공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철폐한 이후에도 남아공의 경제적 불균형은 더욱 커지기만 했다. 만델라와 관계된 유적지도 빈부지역에 따라 명암이 엇갈린다.

    12월 9일 남아공 경제 중심지인 요하네스버그의 명품 쇼핑몰 샌턴시티.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빛나는 쇼핑몰 내부의 만델라 광장에 설치된 6m 높이의 만델라 동상 앞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백인과 흑인이 줄지어 서 있었다. 명품 시계, 보석, 구두 매장 쇼윈도에도 만델라 사진이 놓여 있었다. 현재 남아공에서 만델라 이름은 40개 상표에서 쓰는 명품 브랜드로도 통한다.

    반면 만델라가 지냈던 요하네스버그 남서부 소웨토 지역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12월 8일 ‘국가기도의 날’에 찾아간 소웨토 주변 골목에는 술에 취한 남자들이 어슬렁거리고 쓰레기가 나뒹구는 ‘흑인 게토(집단거주지)’ 모습 그대로였다.

    요하네스버그 북동쪽 알렉산드라에 있는 만델라의 옛집 주변은 더 심각했다. 이곳은 만델라가 23세에 고향에서 상경해 처음 정착한 곳. 그는 당시 화장실도 없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집에 살며 변호사로서 본격적인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 이곳 풍경은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만델라는 1994년 대통령 취임 당시 ‘모두를 위한 정의와 평화’와 함께 ‘모두를 위한 일과 빵, 물과 소금에 대한 희망’을 약속했다. 실제로 최근 10년간 남아공에서는 흑인 중산층이 2배로 늘어났고, 평균 소득도 169% 증가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백인가구 평균 소득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소득 불균형은 오히려 확대됐다. 94년에는 남아공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55%를 차지했으나, 지난해엔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70%를 차지했다고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특히 하루 1.25달러(1316원) 미만으로 연명하는 빈곤층도 26%에 이른다.

    소득 불균형은 흑인 사회 내부에서도 확대되고 있다. 이웃 나라 짐바브웨에서 온 이주민에게 일자리를 뺏긴 남아공 흑인들이 지난해 170여 차례나 시위를 하는 등 ‘흑흑갈등’도 심각하다. 요즘 백인들은 고급주택 수백 채를 전기펜스로 보호하고 24시간 경비가 삼엄한 주거단지를 선호한다. 내부에 골프장, 수영장, 레스토랑 등 호화 시설을 갖춘 곳이다. 지난날 흑인을 격리하려 했던 백인은 치안문제 때문에 이제 스스로를 좁은 공간에 가두는 길을 택했다. 돈 많은 흑인도 강도 위험을 피해 백인들과 함께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는 점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제이컵 주마 남아공 대통령은 12월 10일 만델라 공식 추도식에서 관중으로부터 수차례 ‘우~’ 하는 야유를 받아 전 세계 지도자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 만델라에 이어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을 맡은 데다 이날 행사의 주빈이었던 주마 대통령은 가장 빛나야 할 순간 야유를 받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남아공은 광산업 근로자의 지속적인 파업과 ANC의 지도력 부재 및 부패 문제, 사회 지도층과 빈곤층 간 분열 심화 등 사회적 불안정에 직면한 상태다.

    만델라의 유해는 유리관에 안치돼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프리토리아의 대통령 집무실인 유니온 빌딩 앞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15일에는 만델라 고향인 쿠누에서 국장(國葬)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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