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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어디 가’

부럽다, 나도 떠나고 싶다

대한민국 TV, 여행 프로그램이 대세… 가식 내려놓고 진짜 관계 맺기 한창

  • 이명석 대중문화 비평가 roman100@naver.com

부럽다, 나도 떠나고 싶다

부럽다, 나도 떠나고 싶다

‘노인이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는 방송가의 불문율을 깬 tvN ‘꽃보다 할배’ 출연진들. 박근형, 신구, 이서진(짐꾼 구실), 이순재, 백일섭(왼쪽부터).

지금 대한민국 TV는 여행 중이다. 역마살이 도진 듯 자꾸만 어디론가 떠난다. MBC ‘일밤-아빠! 어디가?’(‘아빠 어디 가’)는 서해 무인도로, SBS ‘일요일이 좋다-맨발의 친구들’은 베트남 어촌 마을로, tvN ‘꽃보다 할배’는 유럽과 대만으로 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SBS ‘정글의 법칙’처럼 아프리카나 아마존 오지로 떠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여행이 누구와 어떻게 가는지를 들여다보면 참 놀랍다. 어른도 어려운 무인도에 10세도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연예인들에게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현지인처럼 생활하라고 한다. 70대 노배우들에게 직접 게스트하우스를 찾으라며 프랑스 파리 지하철역을 헤매게 한다. 신기하게도 그 모두가 재미있다. 우리의 TV 속 여행이 새로운 요지경을 발견했다.

2013년 새해 벽두에 시작한 ‘아빠 어디 가’는 화제의 중심이다. 유소년 아이와 아빠를 짝지어 여행을 가게 했는데, 방송 직후부터 국민 ‘귀요미’들을 양산하며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대세가 됐다. ‘꽃보다 할배’도 만만치 않다. 70대 노배우 4명을 데리고 유럽과 대만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더니, 온갖 화제를 모으며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못지않은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원로급 여배우들이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KBS 2TV ‘엄마가 있는 풍경 마마도’(‘마마도’), 사위와 장모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에피소드를 이어가는 SBS ‘자기야-백년손님’(‘자기야’) 등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여행이 줄을 잇는다. TV 여행 프로그램은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을까.

파격적인 여행 이야기 등장

TV 방송이 여행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89년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가 이뤄지고 약간의 적응기를 거친 뒤부터다. 95년 시작한 KBS 1TV ‘세상은 넓다’는 시청자가 출연해 자신이 직접 찍어온 여행지 모습을 소개하는 것으로, 아직까지 이어지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당시는 패키지여행과 배낭여행이 새로운 여행의 전형이 돼가던 때로, 낯선 지역에 가봤다는 자체가 콘텐츠로서 의미가 있던 시기다.



하지만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냥 가봤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KBS 1TV ‘걸어서 세계 속으로’와 EBS ‘세계테마기행’은 방송국 교양 프로그램 PD나 소설가, 영화감독 등 자신의 세계를 갖춘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여행지를 찾아가게 했다. 여행자가 단순히 현지 명소를 보고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느낀 바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여행 방법에 있어서도 무조건 저렴하게 가는 배낭여행이 아니라, 자신만의 테마를 가지고 현명한 소비를 하는 독립 여행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일본의 작은 현들을 돌아다니고, 유명 소설가의 흔적을 따라 남미 산맥들을 넘으며, 태국 수상가옥에서 현지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가나 PD 정도의 지명도로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방송에는 연예인이 등장해야 했다. 서인영, 성유리, 유아인이 여행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On Style ‘론치 마이 라이프’는 이런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스타일 좋은 젊은 연예인을 런던, 파리 같은 도시로 데려가 세련된 여행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리얼리티’까지 덧붙여 출연자의 돌발적인 행동이나 제작진과의 마찰 등도 여과 없이 내보냈다. 그러나 노이즈 마케팅에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여행 프로그램의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못을 박으려는 찰나, 뜻밖의 모델이 툭 튀어나왔다. 2007년 방송을 시작한 KBS 2TV ‘해피선데이-1박 2일’(‘1박 2일’)이다. 라이벌인 MBC ‘무한도전’이 무엇이든 도전하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했다면, ‘1박 2일’은 건장한 남자들이 대한민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밑바닥 여행을 하는 콘셉트에 집중했다. 복불복의 야외 취침, 앞서거니 뒤서거니 미션을 수행하는 대결도 흥미로웠지만 우리 국토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만만찮았다. 300회를 넘기며 인기를 이어온 ‘1박 2일’의 성공 비결은 예능과 여행을 합쳐놨다는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거기에선 사람 냄새가 났다. 삶의 구체성과 휴머니티가 살아 있었다.

부럽다, 나도 떠나고 싶다

MBC ‘일밤-아빠! 어디가?’는 연예인 아빠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여행기를 다뤄 인기다(왼쪽). SBS ‘자기야-백년손님’에서 함익병 피부과 의사가 장모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짜증까지 생생하게 전달

그런 ‘1박 2일’이 매너리즘에 빠져 허덕이기 시작하던 올해 변종 2편이 불쑥 나타났다. ‘아빠 어디 가’와 ‘꽃보다 할배’는 둘 다 방영 직전 깊은 우려를 낳았다. ‘아빠 어디 가’는 ‘1박 2일’의 여행 체험과 SBS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의 스타 가족 이야기를 적당히 버무려놓은 아류작에 불과한 프로그램일 것이라 여겨졌다. 지명도 있는 MC조차 없는 상황에서 통제할 수 없는 애들과 뭘 한단 말인가. ‘꽃보다 할배’는 더했다. ‘1박 2일’의 나영석 PD가 CJ E·M으로 건너가 내놓은 첫 작품인데, 70대 노배우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고? ‘노인이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는 방송가의 불문율은 들어본 적도 없나. 양쪽 다 잠깐의 화제로 끝나리라는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방송 시작과 더불어 인기몰이하며 전국을 강타했다.

‘아이나 노인이라서 안 된다’가 아니라 ‘그들이 아니면 안 된다’였다. 10세가 안 된 아이들과 70세가 넘은 배우들의 공통점이 뭘까. TV 카메라 앞에서도 가면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빠 어디 가’의 민국이는 야외 취침을 못하겠다며 주저앉아 울고, ‘꽃보다 할배’의 백일섭은 샹젤리제를 찾아가는 길이 죽기보다 싫다며 짜증을 폭발한다. 그런데 이게 ‘살아 있네!’라는 느낌을 준다. 박제화되던 ‘리얼 버라이어티’를 뒤집고 진짜를 건져 올린 것이다. 아이들은 아빠가 힘들게 끓여준 라면 한 그릇에서 최고의 행복을 찾아냈다. ‘H4 할배들’은 방송 금기였던 고스톱과 소주 반주까지 자연스레 소품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여행의 핵심은 어디로 떠나느냐가 아니다. 누구와 어떻게 떠나느냐다. ‘자기야’는 장모와 사위가 유원지에서 함께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툭탁거리는 모습을 그린다. 장모는 다리가 아프다며 쉬려 하고, 사위는 조금이라도 운동을 시키고자 움직이시라고 한다. 그저 형식적으로 대접하는 사이가 아니라, 조금씩 다투면서 진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마마도’에서는 강아지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수미와 “아무리 그래도 강아지가 1순위냐?”며 절대 이해 못 하겠다는 김용임이 다툰다. 그러자 동생들의 감정을 풀어주려고 여든 가까운 왕언니 김영옥이 재롱을 피운다. 함께 떠나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기쁨이다.

여행은 한 번 가면 두 번 가고 싶다. 고생한 기억이 가득해도 다음 휴가가 되면 또 떠날 곳을 찾는다. 그런데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고 통장 잔고는 위태하다. 그래서 떠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할 때 새로운 TV 여행 프로그램이 현명한 길을 안내한다. 과감히 떠나라. 적은 돈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신선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안내자와 패키지 관광은 버리고, 당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과 손을 잡아라.



주간동아 2013.09.30 906호 (p64~65)

이명석 대중문화 비평가 roman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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