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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형 연재소설

아홉 마디 @오메가

16화 마타 하리 길들이기

아홉 마디 @오메가

도문에 온 이후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하나와 함께 연길과 용정에서도 사람들을 만났지만 소득이 없었다. 사건이라면 북한 여성이 노래를 부르고 율동도 하는 유경식당에서의 저녁식사였다.

스무 살이 갓 넘은 여가수의 노래하는 얼굴에는 애수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노래를 하다 필승 앞으로 다가왔다. 눈웃음을 치며 손을 내밀었다. 필승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는 필승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노래를 불렀다.

‘사랑 사랑 내 사랑 그대 모습 꽃인가/ 꽃보다도 어여뿐 내 사랑이야/ 단오명절 그 봄날에 꿈과 같이 만난 사랑/ 이리 봐도 내 사랑 저리 봐도 내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 내 사랑이야….’

어느 순간 그녀의 손이 따뜻하다고 느꼈을 뿐인데, 왈칵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필승은 더는 장단을 맞출 수 없어 자리에 와 앉았다. 도문으로 돌아오는 자동차에서도 그녀의 노래가 귓전을 맴돌고 얼굴도 어른거렸다. 하나의 말이 단상을 깨웠다.

“북한 여자를 찾는다는 게 알려지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사람을 조심하세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들이죠?”

“북한 요원, 아님 중국 공안일 수도 있어요.”

필승은 새벽 산책 채비를 했다. 반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순은 가까운 곳에 있겠지. 찾지 못할 뿐이야. 정암촌을 방문한 그 여자, 순이 틀림없어.”

그날은 시내로 방향을 잡았다. 사거리를 지나자 양손에 비닐봉투를 든 남자가 걸어왔다. 한 블록 더 갔는데 여기저기 비닐봉투를 든 남녀가 눈에 띄었다. 자동차도 지나다녔다. 필승은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맞은편 거리로 향했다. 입구에 ‘도문도매시장’이란 사인이 보였다. 우측이 새벽 시장이었다.

시장 거리엔 한국말과 중국말이 섞여 들렸다. 반바지 차림의 한 남자가 노점을 기웃거렸다. 떡 파는 아줌마도 보였다. 그는 그녀와 슬쩍 눈을 맞췄다. 필승은 떡집 앞에 섰다.

“얼마예요?”

“한 근에 오 원입네다.”

“반 근만 주세요”

“반 근은 삼 원입네다.”

아줌마 옆에서 젊은 여자가 비닐봉투에 떡을 넣어 필승에게 건넸다. 인절미 하나를 입에 넣자 고소한 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필승은 우물거리며 시장을 걸었다.

한 여자가 시장으로 급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나였다. 그녀는 삼층 건물로 향했다. 옥상에서 시장 바닥을 훑다가 떡집에서 필승을 발견했다. 하나는 일을 거드는 젊은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고개를 숙인 채여서 확인이 쉽지 않았다. 하나는 고성능 카메라를 꺼내들고 촬영을 했다. 얼굴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잠깐 사이 필승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떡집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필승을 찾기 시작했다. 세 번째 원에서 필승이 보였다.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한눈을 파는 척 필승의 어깨를 밀쳤다. 필승이 걸음을 멈추자, 그는 필승의 팔을 잡고 말을 건넸다.

“아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 무심결에 한국말을…. 한국에서 오셨어요?”

“네, 서울에서 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아, 저는 수원에서 왔어요.”

서울과 연변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백이라고 했다. 둘은 시장 거리를 걷다가 전병 집 앞에 섰다. 전병 파는 여자는 두 개씩 싸서 하나는 백씨에게, 다른 하나는 필승에게 내밀었다.

“도문까진 어떻게 왔어요?”

“할 일이 있을까 하고요.”

“사연이 있는 게로구먼.”

백씨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전화번호를 적어 필승에게 건넸다.

“혹시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연락 줘요.”

필승은 받아들고 돌아섰다. 백씨는 다시 떡집으로 돌아갔다. 하나는 옥상에서 내려와 밀짚모자를 쓰고 시장 거리를 걸었다. 전병 집에서 방향을 바꿔 시장을 빠져나갔다. 하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한족이 아닌 것 같은데….”

날이 어두워지자 필승은 백씨가 일러준 카페로 향했다. 도문 광장에서 우회전, 사거리를 만나면 좌회전, 오십 보쯤 가자 두만강 카페가 나왔다. 여자 두 명이 필승을 맞았다.

“혹시 남필승 씨인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자리에 앉자 맥주가 나왔다.

“백 선생님이 늦는다고, 맥주 한 잔 하고 있으라고 연락이 왔어요.”

여자는 넘칠 듯 맥주를 따랐다. 밖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필승은 호기심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백씨가 도착했을 때 필승은 반쯤 취해 있었다.

“도문에서는 가장 세련된 술집이지.”

맞은편 방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3일조, 5일조 같은 말이 새어나왔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옆자리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함께 몇 잔 더 마셨고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홉 마디 @오메가

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궁전 같은 방에서 꿈을 꾸는 듯했다. 깔고 누운 시트의 부드러운 촉감이 필승의 나신을 애무하고 있었다. 방문 여닫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필승은 몸을 일으켜 살펴보았다. 순이었다.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보고 싶었습네다.”

필승은 순의 입술을 찾았다. 문틈 사이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쉿’ 소리를 내자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농익은 여자의 음성이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에 섞여 문틈으로 흘러들었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황홀한 법. 옛사람도 최고의 점수를 줬어. 용이 엎치락뒤치락 나는 형상을 그려봐. 용번(龍)이라고 해. 자, 옆방에 귀를 기울여 봐요.”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것 같았다. 순이 필승 아래에 반듯이 누워 있고, 필승은 순의 가슴을 끌어안고 있었다. 순이 허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가 했는데, 필승의 몸이 순에게 빨려들어 갔다. 촉감이 부드러웠다.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에서 맑고 투명한 클라리넷 음색에 맞춰 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필승의 몸은 오케스트라가 되어 순에게 다가갔다. 순이 멀어지면 필승은 플루트가 낀 오케스트라로 이끌고, 순이 다가오면 필승은 호른이 섞인 둔탁한 음색으로 답했다. 다가섬, 물러섬, 그리고 반복…. 순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맞춰 문틈 사이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어접린(魚接鱗), 암수 물고기가 서로 비늘을 비비는 형상이야. 숨이 가쁜 파트너에게 쉴 틈을 주는 동작이지. 상대의 섬세한 표정을 볼 수 있어 여자에게 더없이 황홀한 자세야.”

여자의 말이 끝나자 필승과 순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순은 쪼그린 자세로 반듯이 누워 있는 필승을 바라보았다. 필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순이 몸을 조금씩 움직이자 먼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듯 필승에게 쾌감이 밀려왔다. 필승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필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순은 필승의 목을 끌어안았다. 둘의 입술이 닿았다. 문틈으로 여자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어접린에서 학교경(鶴交頸)으로 넘어가는 걸 봤지?”

학이 서로의 긴 목을 엉키게 한 형상을 말한다.

“명기의 소질을 타고난 에미나이야. 영웅적 혁명전사가 되갔어.”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잠을 깨웠다. 순과 함께였는데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이었던가. 필승은 옷을 주워 입었다. 바지 지퍼를 올리기도 전에 누군가 박차고 들어왔다. 낚아채듯 필승을 끌고나갔다.

“누구시죠?”

안개 낀 도문의 새벽,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그는 허우적대는 필승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씨였다.



주간동아 2013.09.30 906호 (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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