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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탄탄대로 EU CEO 메르켈

독일 총선서 3선 연임 여제로 우뚝…유럽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예약

  • 전승훈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raphy@donga.com

탄탄대로 EU CEO 메르켈


2010년 유로존 부채위기 이후 유럽연합(EU) 17개국의 국가 수반 가운데 12명이 선거를 통해 교체됐다.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스페인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총리가 자리를 비워줬다. 그 뒤를 이은 후임자도 모두 고초를 겪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9월 22일 총선에서 당당하게 3선 연임에 성공했다. 단순히 살아남은 게 아니라 독일 역사에 남을 ‘역대급’ 압승을 거뒀다. 독일 역사에서 3선에 성공한 총리는 단 3명뿐. 메르켈은 전후 독일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통일을 이룬 헬무트 콜 전 총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정치인으로 우뚝 섰다.

글로벌 언론은 ‘대처리즘’을 뛰어넘는 ‘메르켈리즘’의 탄생을 알렸다. 메르켈은 유럽 대륙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여제(女帝)로 등극했다. 독일 내에서는 메르켈의 승리 요인을 독일어로 ‘엄마’를 뜻하는 ‘무티(Mutti)’ 리더십으로 평가했다. 벌어들인 한도 내에서만 쓴다는 독일 슈바벤 지역의 주부들처럼 근검, 절약하며 나라 살림을 이끌어가고, 좌우 이념을 통합해내는 그의 ‘조용한 카리스마’가 독일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메르켈리즘’과 ‘엄마 리더십’

독일 언론은 ‘메르켈리즘’에 대해 “권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힘을 가진 정책”(쥐트도이체 차이퉁), “잘난 척하지 않고,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으며,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 인간적인 매력”(빌트) 등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독일 내부 반응이다. 독일인은 유럽 경제위기 속에서도 독일의 이익을 꼼꼼히 지켜내는 메르켈의 엄마 같은 모습에 찬사를 보냈지만, 위기의 당사국 국민 마음은 달랐다. 특히 지난 수년간 메르켈은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재정위기를 겪는 국가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혹독한 긴축과 구조개혁을 요구했다. 높은 실업률과 경기 후퇴, 복지혜택 축소 등으로 피폐해진 남유럽 국민은 마치 자국 총선인 양 숨죽인 채 독일 총선 결과를 지켜봤다. 메르켈이 떨어지길 기대하면서.

그런데 결과는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CDU)·기독교사회당(CSU) 연합인 기민기사당이 과반에서 불과 5석 모자란 311석을 석권하는 압승이었다. 남유럽국가들은 한층 강화된 권력을 갖게 된 메르켈이 유로존 긴축정책을 더 거칠게 몰아붙이지 않을까 공포에 휩싸였다. 그리스 일간지 ‘타 네아’는 “유럽이 ‘메르켈랜드’가 되고 있다”는 반응을 내놨고, 이탈리아 로마의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는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은 메르켈의 그림을 실었다.

과연 메르켈은 유로존에 더욱 가혹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것인가. 결과는 아직 모른다. 집권연정의 막내 파트너였던 자유민주당(FDP·자민당)이 5% 득표율의 벽을 넘지 못해 의회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도 보수당인 기민기사당과 친(親)기업 성향의 자민당의 ‘보수연정’이 깨졌다.

2009년 메르켈 총리의 2기 집권 때부터 시작된 ‘보수연정’은 유로존 위기를 침착하게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재정위기 국가들에 가혹한 긴축정책을 요구한 탓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남유럽국가에서 시위대들은 메르켈을 ‘나치’에 비유하기도 했다. 지난해 6월 영국 잡지 ‘뉴스테이츠먼’은 커버스토리에 메르켈을 터미네이터 모습으로 묘사한 뒤 ‘유럽의 가장 위험한 지도자’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총선이 끝난 후 메르켈이 가장 먼저 연정 협상을 제안한 곳은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192석·사민당)이다. 사민당과의 ‘대연정’에 성공할 경우 집권연정은 630석 가운데 503석을 차지해 상하원 양쪽에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사민당은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등 경기부양책을 주장하면서 재정위기를 겪는 유럽국가의 실업대책, 유로 금융안정대책에 적극적인 친(親)유럽 성향의 공약을 내걸었다.

탄탄대로 EU CEO 메르켈
사민당과의 대연정, 남유럽 공포 해소할까

이 때문에 대다수 유럽인은 사민당과의 ‘대연정’이 실현되길 기대한다. 마틴 슐츠(사민당) 유럽의회 의장은 “대연정은 유럽을 위해 좋다”며 “남유럽국가의 높은 청년실업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정 제안을 받은 사민당 측은 일단 뒤로 물러섰다. 선거 다음 날 메르켈은 오전 9시에 지그마르 가브리엘 사민당 당수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가브리엘 당수는 2시간 뒤인 11시에나 전화를 받았다. 독일의 연정 협상이 앞으로 몇 달 동안 만만찮은 포커게임이 될 것이란 암시를 주는 대목이다.

사민당은 메르켈의 1기 집권 당시인 2005~2009년 대연정을 함께 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양당은 긴밀한 협조하에 세계 금융위기를 잘 극복했다. 그런데 2009년 총선에서 집권 대연정의 결실을 메르켈이 다 가져가고, 사민당은 사상 최악의 참패(23% 득표)를 기록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2.7% 포인트가 늘었지만,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가 집권하던 당시의 전성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독일 정계에서 메르켈의 또 다른 별명은 ‘검은 과부(Black Widow)’다. 사민당, 자민당 등 메르켈과 연정을 한 당은 다음 총선에서 대거 표를 잃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3선의 메르켈은 한층 거대해진 무게감으로 연정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에 사민당은 연정에 들어가 당의 선명한 색깔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가브리엘 사민당 당수는 “연정 협상을 위한 회의를 한다고 해서 ‘대연정’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사민당은 대연정 조건으로 메르켈에게 유로존 부양정책과 최저임금제, 부자 증세 같은 정책협상은 물론, 내각 내에서의 중요한 장관 자리 등 비싼 대가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사민당 또는 녹색당과의 협상이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무산될 경우 독일은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메르켈이 과반을 확보하거나, 자민당이 의석을 얻어 다시 ‘보수연정’이 구성될 수 있기 때문에 사민당이 그걸 원치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영향력 한층 더 커질 것

메르켈은 집권기간 ‘독일의 유럽화’ ‘유럽의 독일화’를 이뤘다. 일각에서는 메르켈을 ‘유럽연합 회사’를 지배하는 최고경영자(CEO)에 비유하기도 한다. 독일은 유로존 최대 경제국인 데다 구제금융의 큰손이기 때문이다. 유럽 미래를 좌지우지할 강력한 메르켈 정권을 탄생시킨 이번 독일 총선을 바라보는 주변국의 심정은 복잡하다.

먼저 프랑스는 질투의 시선을 보낸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가장 빨리 당선 축하인사를 보냈으나 그다지 열정적인 축하는 아니었다. 내심 독일에서도 같은 좌파정권이 들어서길 바랐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기민기사당의 압도적인 승리가 2015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의 선전으로 이어질 좋은 징조라고 기대한다. 또한 유럽연합보다 개별국가의 권한을 더욱 중시하는 메르켈의 주장이 2017년 치러질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터키 정계에서는 메르켈이 집권하는 4년간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은 물 건너가리라는 예측이 제기된다. 2005년 시작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협상에서 가장 큰 반대자가 메르켈이었기 때문이다.

메르켈이 사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할 경우 유로존 활성화 대책이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 금융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는 금융 시스템 구조개혁을 위한 ‘은행연합’ 추진계획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위해 먼저 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 회원국 내 은행 약 6000개에 대한 단일감독체제를 구축할 예정이다. 그리스에 대한 추가 구제금융, 새롭게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슬로베니아 금융지원 등도 본격 논의될 전망이다.

메르켈은 그동안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리비아 공습이나 시리아 화학무기 같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모습으로 일관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압도적인 표차로 3선에 성공함으로써 그의 국제적 영향력은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마지막 4년 임기를 남겨둔 지금, 메르켈이 독일 유권자들의 ‘엄마’를 넘어 역사에 남는 유럽의 지도자로 떠오를지 관심이 집중된다.

‘독일을 위한 대안’의 선전

反유로 기치…창당 7개월 만에 4.7% 득표


9월 22일 독일 총선에서는 반(反)유로 기치를 내건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선전도 관심을 끌었다. 나치 이후 극우 정당에 대한 반감이 많은 데다 유로화 통합의 중심 국가인 독일에서 창당 7개월 만에 4.7%나 득표했다는 점 때문이다.

AfD는 이번에 비록 5% 득표율에 미달해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내년 5월 유럽의회 선거는 자신한다.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에서 직접선거로 치러지는 이 선거는 3% 이상 득표하면 의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여론조사회사인 인프라테스트 디맵에 따르면 ‘반유로화’ 정당인 AfD에 투표한 205만 명의 유권자는 좌파부터 중도, 우파까지 폭넓은 성향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AfD를 지지한 유권자 중에는 2009년 선거에서 친(親)기업 성향의 자유민주당(FDP)을 찍었다가 실망한 유권자가 43만 명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또한 옛 동독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당(Die Linke)’를 찍었던 사람도 34만 명이나 ‘반유로’ 정당 지지자로 변신했다. 이 밖에도 △앙겔라 메르켈의 중도 우파정당인 기독민주당 지지자 29만 명 △중도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 지지자도 18만 명이나 AfD를 지지했다.

독일 ‘타게스차이퉁’은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인 우익 포퓰리즘 정당이 그토록 넓은 스펙트럼의 유권자들에게서 반향을 얻었다는 사실은 독일 기존 정치계에 커다란 압력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베른드 루커 AfD 당수는 “유로존 정책이 부유한 은행과 투자자만 신경 쓸 뿐, 위기를 겪는 나라의 국민이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국가의 납세자들을 곤경에 빠뜨린다”고 주장했다. AfD 외에도 유럽 재정위기 이후 프랑스의 국민전선(FN), 영국독립당(UKIP), 네덜란드의 자유당(PVV), 핀란드의 진짜핀란드인당(TF) 등이 유로존 탈퇴, 반유럽통합 정책을 내걸며 제3당 위치에 올랐다. 이들이 내년 유럽의회에서 20%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경우 만장일치 결정이 필요한 현 유럽연합 운영체제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주간동아 2013.09.30 906호 (p50~52)

전승훈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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