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4

2013.09.09

3조 달러 진통제 뒷감당은 누가?

리먼 파산 5년 세계경제 겨우 회복세…출구전략 논의에 신흥국 퍼렇게 질려

  • 박현진 동아일보 뉴욕특파원 witness@donga.com

    입력2013-09-09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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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조 달러 진통제 뒷감당은 누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옛 리먼브러더스 사옥. 영국계 은행 바클레이스가 2008년 인수해 외벽 로고를 바클레이스로 바꿨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이 일어났다. 2001년 회계부정으로 무너진 에너지기업 엔론의 10배에 이르고 월드컴, 제너럴 모터스(GM), 델타항공의 파산을 합친 것보다 큰 규모였다. 미국 4대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리먼) 얘기다. 이 회사는 6130억 달러(약 680조 원)의 빚을 갚지 못해 158년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파산 규모가 지난해 태국의 국내총생산(GDP) 3771억 달러의 배에 가까워 사실상 신흥국 몇 개가 부도를 맞은 것과 같은 파장을 불러왔다.

    이날을 기점으로 미국과 글로벌 경제는 긴 어둠의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먼 훗날 누군가 세계경제사를 쓰게 된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틀을 짠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범, 1·2차 오일쇼크, 1980년대 신흥국 외환위기에 이어 분명히 책의 한 장을 차지하게 될 사건이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그 5년을 돌아봤다.

    리먼 사태 이후 반년 만에 미국 뉴욕 증시에서 다우지수가 40% 폭락하고 1년 만에 세계 증시에서 약 4조 달러(4436조 원)가 날아갔다. 같은 기간 세계 각국의 GDP도 5조8000억 달러 감소했다. GM 등 굴지의 기업이 파산 신청을 하면서 정부에 손을 내밀었고, 월가에서만 100개 가까운 금융사가 파산했다. 각국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길고 어두운 터널의 시작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내고 세계경제의 25%가량을 차지하는 미국의 금융위기는 예상보다 후유증이 오래갔다. 미 정부는 파산한 기업과 금융사를 구제하려고 리먼이 파산하고 이틀 뒤 7000억 달러(766조 원)라는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리먼이 무너지기 1년 전인 2007년 9월부터 베어스턴스 등 금융사의 파산과 신용경색이 일어나자 공격적인 금리 인하에 나섰다.



    그럼에도 리먼이 무너지자 결국 시중에 직접 돈을 푸는 비전통적인 통화정책인 양적완화(QE) 정책에 들어간다. 2008년 11월 25일 모기지 채권 등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800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한 1차 양적완화 정책은 2010년 3월 말 마무리됐다. 당초 계획의 배가 넘는 1조7000억 달러가 투입됐다. 유럽 각국도 미국에 이어 금융위기 진화책을 잇달아 선보였다.

    총공세로 조기에 위기를 진화하겠다는 미 정부의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실제 리먼이 무너지고 1년 뒤인 2009년 9월 23일 연준은 “미국 경제가 심각한 경기하강을 마무리 짓고 회복 국면에 진입했다”며 경기회복을 공식 선언했다. 연준의 이 성명이 섣부른 판단이었음이 밝혀지는 데는 채 몇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고속성장을 계속해 유명 경영대학원(MBA)의 주요 연구대상이 됐던 중동 두바이가 국영기업 ‘두바이월드’의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지급 유예)으로 위기에 몰렸다. 곧이어 2010년 2월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로존 국가의 재정위기가 본격화된다. 결국 연준은 2010년 11월 3일 6000억 달러의 2차 양적완화 정책을 내놓았지만 이것 역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무엇이 이렇게 깊은 상처를 남겨놓았던 것일까. 2009년 출간해 미국과 한국 등 12개국에서 수십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상식의 실패(A colossal failure of common sense)’의 저자이자 뉴에이지 미국수석전략가인 로렌스 G. 맥도날드를 지난달 뉴욕 맨해튼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리먼에서 전환사채(CB)와 부실채권 트레이딩을 총괄하던 수석부사장이었다.

    당시 리먼 파산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그는 “2007년 골드만삭스가 부채담보부증권(CDO)을 팔아치우기 시작할 때 나를 포함해 간부진이 최고경영진과 이사회에 CDO 비중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수차례 얘기했지만 그들은 귀를 닫았다. 오히려 자기자본의 40배가 넘는 빚을 끌어다 썼다”고 말했다.

    CDO는 주택담보대출채권을 묶어서 만든 증권으로, 리먼 파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상품이다. 미 주택 호황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금융사와 이를 사려는 투자자들은 돈을 끌어다 이 상품에 투자하기 바빴지만, 미 주택가격이 급락하면서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맥도날드는 “투자자는 말할 것도 없고 최고경영진조차 자신들이 사고파는 상품의 구조나 위험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품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다팔기 바빴던 ‘광기의 시절’에 상식이란 없었다”고 말했다.

    서서히 보이는 빛, 신흥국엔 또 다른 고통

    3조 달러 진통제 뒷감당은 누가?

    2011년 10월 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주코티 공원에서 노숙 시위 중인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가 아침을 맞고 있다.

    문제는 이 폭탄이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로 퍼져갔다는 것이다. 맥도날드의 설명이다.

    “당시 금융사들은 미국 경제가 서서히 둔화하리라 보면서도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급성장하던 신흥국들이 CDO를 사주면서 미 경기 둔화의 여파를 상쇄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5개 시중은행이 CDO에 5억6540만 달러(약 5200억 원)를 투자했다가 거액의 손실을 입기도 했다. 결국 월가의 탐욕에 뿌리를 둔 상식을 벗어난 투자가 세계경제 곳곳에 보이지 않은 생채기를 남겨놓은 것이다. 아직도 그 상처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한국의 추석 연휴기간 미국에서는 또 한 번 세계경제의 대전환을 맞을 이벤트가 열린다. 9월 17~18일 연준이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하는 것. 5월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처음으로 5년 가까이 이어져온 양적완화 정책을 줄여나가는 이른바 ‘출구전략’을 하반기에 가시화하겠다고 언급한 이후 각국 정책 결정권자들과 금융시장의 눈은 온통 9월 FOMC에 쏠린다. 시장에서는 9, 10, 12월 세 차례 FOMC에서 결정이 나오리라 보면서 첫 시험무대에 주목한다.

    미국이 모두 4차례의 양적완화 정책에서 푼 자금은 3조 달러에 이른다. 이것이 미국 등 세계경제의 회복에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 미 경제는 완연한 부동산경기 회복, 제조업 부활에 따른 기업실적 호조, 소비심리 회복 등의 호재가 잇따르면서 2분기 GDP 성장률이 2.5%(잠정치)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 분기 성장률(1.1%)의 배이며 시장 전망치(2.3%)보다 높다. 주요 외신들은 “유로존도 기나긴 침체의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는 전망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유럽통계청(유로스타트)은 8월 14일 유로존의 2분기 GDP가 전 분기 대비 0.3%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예상치(0.2%)를 넘어섰을 뿐 아니라 18개월 만에 마이너스 성장에서 상승세로 반전했다. 1999년 유로존 출범 이후 최장 기간인 2011년 4분기부터 6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유로존이 마침내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또 9월 2일 유럽 시장조사업체 마킷의 보고서는 8월 유로존 제조업 부문의 구매관리자지수(PMI)가 2년 2개월 만에 최고치인 51.4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유로존 경제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인 실업률마저 6월 2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한 데 이어 두 달 연속 감소세를 이어갔다.

    3조 달러 진통제 뒷감당은 누가?

    2010년 4월 23일(현지시간)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경제부 청사 앞에서 올림픽항공과 통신회사 OTE의 전·현직 직원들이 공공기관 민영화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 움직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주요 언론과 경제 전문가들은 이 같은 선진경제의 회복으로 “리먼 사태 이후 침체에 빠진 글로벌 경제를 버텨준 신흥국의 경제 주도권이 이제 선진경제권으로 넘어간다”고 진단했다. 최근 몇 년간 미국과 유로존 등이 풀어 제친 달러, 유로화가 성장률이 높은 신흥국으로 몰려들면서 인도, 브라질 같은 브릭스(BRICS) 국가와 터키,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 ‘유동성 파티’를 벌여왔다.

    하지만 미국이 돈줄을 조이겠다고 하자 이들 나라에서 달러 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가 최근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한 예로 터키로 유입된 외자(外資)는 1720억 달러(약 192조3000억 원)로 터키 경제의 22%를 차지하는데, 현재 급속히 빠져나가고 있다. 인도 국채에 투자한 외국인 자금은 25%가 빠져나갔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신흥국들이 달러가 몰려올 때 구조개혁에 나섰어야 하는데, 이를 게을리해 위기를 맞았다”며 “신흥국들이 이제 뒷감당을 해야 할 시점이 다가온다”고 지적했다.

    월가는 벌써 리먼을 잊었나

    전문가들은 다음 리먼 사태는 중국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금융규제당국의 눈을 피해 급성장해온 비(非)은행 금융사를 일컫는 이른바 ‘그림자금융’이 금융위기의 불씨로 남아 있다. 그림자금융 회사들이 서민 등에 대출해준 금액은 중국 GDP의 40%에 이른다는 로이터의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위기의 진원지였던 월가도 이제 리먼의 흔적을 좀처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회복세를 보인다. 그나마 그날을 기억할 수 있는 아이콘이라면 뉴욕 맨해튼 타임스스퀘어를 24시간 밝히는 바클레이스 빌딩이다. 아래 3개 층을 전광판으로 사용하는 36층짜리 이 빌딩은 5년 전만 해도 리먼 본사였다.

    리먼 본사로 쓰던 시절 전광판 색깔은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리먼이 파산하고 이틀 뒤 영국계 은행 바클레이스로 빌딩이 넘어가자 리먼 간판은 내려지고 바클레이스 로고 색깔인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이 빌딩을 보면서 리먼의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리먼이 금융권에 던진 교훈은 점점 퇴색해가는 느낌이다.

    월가 은행들의 부채는 크게 줄었지만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실제 올해 들어 JP모건체이스가 파생금융상품 거래로 막대한 손실을 봤다. 월가의 반발도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 7월 발표한 3500쪽에 걸친 400개 법안을 담은 금융개혁법 ‘도드·프랭크법’ 가운데 40%가 아직 시행 일정을 잡지 못할 정도로 월가의 반발은 지금도 거세다.

    금융위기를 부른 대마불사의 관행도 여전하다. 대마불사를 종식하려는 핵심 하위법인 ‘볼커룰(Volcker Rule)’ 제정은 관련 규제당국 5곳이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마련하지 못해 두 차례나 연기됐다. 2015년 7월까지 규정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또 연기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법은 은행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에 자기자본의 3%까지만 투자할 수 있도록 하고, 리스크가 큰 자기자본 매매를 금지해 은행의 위험투자와 대형화를 막겠다는 취지를 담았다.

    미 의회는 재무부의 반대에도 금융개혁법 적용 대상에서 스와프(Swap) 상품을 제외하기로 7월 결정했다. 당시 NYT는 “월가 로비스트들이 금융개혁 법안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의회 및 규제당국의 상당수 인사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월가 돕기에 나섰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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