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1

2013.06.10

디지털유산, 상속이냐 포기냐

SNS·블로그 등 사망자 활동 내용 관리 한국도 법제화 추진

  • 문보경 전자신문 부품산업부 기자 okmun@etnews.co.kr

    입력2013-06-10 09: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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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死後), 내 개인 정보가 인터넷 공간에 떠돌아다닌다면 어떨까. 게임머니와 전자화폐를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해할 만한 문제다. 바로 디지털유산 상속에 대한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는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 사망한 사람이 활동하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 블로그를 가족이 대신 운영하거나 폐쇄할 수 없고, 상속도 불가능하다. 본인의 아이디(ID)는 오직 본인만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도 현행법상 이를 관리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5월 디지털 유산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김장실 새누리당 의원이 디지털유산을 상속할 수 있는 근거를 담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다.

    구글, 휴면계정 관리 서비스 도입

    그동안 유명인의 자살이나 사망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디지털유산 관리에 대한 이슈가 야기됐다.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이후 해당 장병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e메일에 대해 유족들이 접근할 수 있게 요청하면서부터다.

    당시 싸이월드를 운영하는 SK커뮤니케이션즈는 이를 ‘제3자에 의한 아이디(ID) 도용’으로 보고 거부했다. 정보통신망법 제49조는 정보통신망에 의해 처리, 보관, 전송되는 타인 정보를 훼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법원 선고에 따르면, 사망한 자는 타인에 포함돼 가족이라고 해도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



    현재 국내 인터넷 포털사이트는 모두 아이디 상속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 관리 권한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유가족이 요청하면 블로그나 e메일 계정을 삭제하는 정도가 전부다.

    고인의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제3자가 운영하는 경우, 이는 아이디나 패스워드의 도용에 의한 것이다. 포털사이트가 이를 인지한 경우 해당 사이트를 폐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추모를 위한 목적 등을 감안하기도 한다. 명예훼손이 우려되는 글에는 블라인드 처리를 하는 사이트도 있다.

    이처럼 국내 업체는 디지털유산에 대해 보수적 태도를 취한다. 개인 사정을 감안해 처리하다 보면 법을 위반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디지털유산에 관한 법률을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이러한 시대 흐름을 반영해 구글은 3월 전격 휴먼계정 관리 서비스를 도입했다.

    구글은 사용자가 사망한 후 지정한 사람에게 데이터를 상속하거나 완전히 삭제할 수 있는 서비스를 세계 처음 시작했다. 블로그와 e메일에 저장한 사진과 글 등 디지털유산을 상속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를 통해 고인은 인터넷에서 ‘잊힐 권리’를 보장받게 됐다. 구글은 가입자가 일정 기간 접속하지 않으면, 사망에 준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관리할 권리를 사전에 지정한 사람에게 넘긴다.

    안드레아스 투에르크 구글 서비스담당 매니저는 “갑자기 사용자 계정이 휴면상태가 되면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 등을 어떻게 할지 직접 결정할 수 있다”며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글 가입자는 휴면계정이 되는 시점을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사전에 정할 수 있다. 가입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데이터를 처리할 시점을 설정하는 기능이다. 사용자는 계정에 남은 각종 데이터를 가족이나 친구 등 지정한 사람에게 상속하거나 완전히 삭제할 수 있다. G메일, 유튜브, 구글 드라이브, 구글 플러스, 피카사 등 구글이 운영하는 모든 사이트에 적용된다.

    국내에서도 디지털유산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8대 국회에서만 디지털유산과 관련해 정보통신망법의 일부 개정안이 세 차례나 발의됐다. 2010년 박대해, 유기준, 김금래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바 있다.

    디지털유산, 상속이냐 포기냐

    서울 미근동 SK커뮤니케이션즈 본사.

    이들 법안은 모두 포털사이트 등 서비스 제공자에 대해 면책 근거를 뒀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포털사이트가 디지털유산을 가족을 비롯한 제3자에게 제공하면 법 위반이 되는데, 이를 개정해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취지였다. 법안 상정 이후 유족에게 제공할 수 있는 디지털유산 범위와 그 권한 등에 대해 활발히 논의가 이뤄졌지만 법안은 폐기됐다. 개인정보 보호 등 맞물리는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했던 것이 이유다.

    이번에 김장실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이용자가 생전에 획득한 게임 아이템, 작성한 게시물, 관리한 미니홈피, 블로그 등을 디지털유산으로 정의하고, 소유 및 관리 권한을 승계할 수 있게 했다. 또 구글의 휴면계정 관리 서비스처럼 이용자가 사망하기 전 디지털유산의 처리 방법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미리 지정한 경우,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는 이용자가 지정한 처리방법에 따라 디지털유산을 처리하도록 했다.

    ‘잊힐 권리’도 보장할 법 필요

    디지털유산, 상속이냐 포기냐
    이번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사후 자신의 디지털 정체성이 사이버공간에서 유령처럼 떠다니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재산적 가치를 지녔지만 운영자가 사망해 자칫 사장될 수 있는 디지털유산도 살릴 수 있게 된다. 생전에 블로그 등에 남긴 창작물은 저작재산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미국의 데스스위치 같은 온라인 유산처리 서비스도 국내에 본격 등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유산 관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잊힐 권리’ 역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잊힐 권리는 개인이 원하지 않은 게시물이나 내용을 삭제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지금도 자신이 올린 글은 삭제할 수 있지만 상대방이 올리거나 제3자가 퍼뜨린 글은 지우기 어렵다. 신상 털기로 악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글을 올린 당사자가 아니면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은 잊힐 권리를 법제화했다. 지난해 1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사용자 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 데이터보호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국내에서도 잊힐 권리를 보장하는 저작권법 일부개정안,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발의된 바 있다. 법안이 통과되면 인터넷상에 게시한 자신의 저작물을 자유롭게 삭제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사후에 게시물 관리 범위를 다루는 디지털유산과 다른 문제지만, 인터넷상 저작물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인터넷 업계 관계자는 “늦었지만 디지털 사회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법안이 나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인터넷 역사가 짧아 법제도에 한계가 많으므로 서둘러 고쳐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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