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0

2013.03.25

사냥 본능 키운 사자 외줄타기 곡예사 침팬지

서울대공원 ‘동물행동풍부화 프로그램’… 야생 환경 조성 ‘동물 복지’ 실현

  • 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입력2013-03-25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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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 본능 키운 사자 외줄타기 곡예사 침팬지

    소방호스를 나무 넝쿨처럼 엮어놓은 침팬지 우리(왼쪽). 한 관람객이 ‘고릴라와 몸무게 대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1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 사자 우리에 설치한 원형 구조물이 돼지 등뼈를 달고 천천히 돌아간다. 구조물이 돌아가는 낌새를 눈치 챈 사자가 한 마리씩 모여들더니 순식간에 예닐곱 마리가 구조물을 에워싸고 돼지 등뼈를 노리기 시작한다. 사자들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돼지 등뼈를 따라 걸으면서 점프하고 앞발을 휘두르면서 먹이 사냥에 열을 올린다.

    #2 전망대에 자리 잡은 침팬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관람객을 둘러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먼 하늘을 바라보며 등을 긁는다. 침팬지가 팔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모양을 놓칠까 꼬마 관람객은 침팬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침팬지는 여유롭게 관람객을 훑어보더니 날쌘 몸짓으로 소방호스를 잡고 곡예를 하기 시작한다. 관람객 사이에서 탄성이 터지자 침팬지는 신이 난 듯, 손을 놓고 외줄타기를 하다 다른 줄로 갈아타고 공중제비를 도는 등 신나는 묘기를 보여준다.

    여느 동물원이나 서커스 무대에서 볼 수 있는, 훈련받은 동물들 쇼가 아니다. 서울대공원 ‘동물행동풍부화 프로그램’에 따라 달라진 사육환경에 적응해가는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흙과 잔디 깔아주니 번식도 쑥쑥!

    서울대공원은 2003년부터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이 야생에 가까운 환경에서 원래의 야생 습성에 맞는 적합한 행동을 할 수 있게 돕는 ‘동물행동풍부화 프로그램(이하 풍부화 프로그램)’을 실시 중이다. 풍부화 프로그램은 동물을 우리 안에 가둬놓고 전시하던 기존의 보여주는 동물원을 넘어, 동물들이 좀 더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관람객과 상호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상생 동물원’을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관람객이 터치스크린 지시에 따라 침팬지 인사법(팬트후트)을 익혀 비슷하게 따라하면 침팬지에게 먹이를 주는 ‘침팬지와의 대화’, 관람객 한두 명이 저울 위에 올라가 몸무게를 재서 고릴라 몸무게와 오차가 크지 않으면 고릴라에게 특별 먹이가 나오고, 오차가 크면 관람객에게 벌칙용 바람이 나오는 ‘고릴라와 몸무게 대결’은 인간과 동물이 직접 대면하면서 상대방 반응을 즐기는 대표적인 상호교감 프로그램이다.

    또 다른 인기 프로그램으로는 ‘사자를 달리게 하라’가 있다. 관람객이 자전거 페달을 돌리면 특별 먹이가 달린 원형 구조물 레일이 돌아가면서 사자가 먹이를 먹을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이다. 양효진 서울대공원 동물기획과 큐레이터는 “하루 20시간 이상 잠을 자는 사자 습성을 이해하지 못한 관람객 사이에서 ‘왜 잠만 자느냐’는 불평이 쏟아졌는데, 이 프로그램을 실시한 이후부터 사자 움직임이 많아져 반응이 좋다”며 “전에는 사자가 우리 곳곳에 숨어 있어 발견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특별 먹이를 주지 않는 시간에도 레일 주위에서 지내는 사자가 많아 관람객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자연 생태에 가깝게 동물의 생활환경도 개선했다. 배설물을 쓸어버리기에 적합한 콘크리트 바닥과 관리가 용이한 쇠창살 우리는 그 안에 갇혀 사는 동물에 대한 배려보다 인간 편의에 맞춘 것이었다. 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해진 동물이 스스로 털을 뽑는 등 자해하거나 무리끼리 심한 싸움을 벌여 상처를 입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풍부화 프로그램을 실시하면서 콘크리트 바닥 대신 흙과 잔디를, 철창 대신 목책과 유리벽을 설치하는 등 살풍경한 우리를 좀 더 자연 생태에 맞게 변화시키고 각 종(種)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시설도 설치했다.

    높은 곳을 좋아하고 나무타기를 즐기는 유인원을 위해선 기둥과 전망대를 마련했다.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습성을 가진 침팬지를 위해선 다양한 높이의 침팬지 타워를 설치하고 각 전망대 사이에 소방호스를 나무 넝쿨처럼 얼기설기 엮어 열대우림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줬다.

    열대조류관은 2층 높이 건물 안에 큰 나무와 시냇물을 만들어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게 했다. 유리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활개를 치고 날아오르게 한 것. 관람객과의 경계도 사라졌다. 전망대를 따로 만들긴 했지만 창살이나 유리벽으로 구분한 게 아니라, 아무런 걸림돌 없이 열대조류 생활상을 관찰할 수 있게 했다.

    관람객 태도도 크게 바뀌어

    사냥 본능 키운 사자 외줄타기 곡예사 침팬지

    돼지 등뼈를 입에 무는 데 성공한 사자.

    환경 개선 성과는 ‘2세 탄생’으로 이어졌다. 열대조류관을 개선한 지 한 달 만에 멸종위기종 2급 동물인 청금강앵무 두 마리가 국내 동물원 최초로 부화에 성공하는 등 새들 부화가 줄을 이었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1급 동물인 토종 붉은여우 우리에서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황토를 깔아놓자 곧바로 번식이 이뤄져 새끼 8마리가 태어났다. 멸종위기종 1급 동물인 표범도 2009년 두 마리가 태어난 뒤 번식이 끊겼으나 3년 만인 지난해 3월 출산에 성공했다.

    동물을 대하는 관람객 태도도 크게 바뀌었다.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우리 한켠에 꼼짝 않고 누워만 있는 동물을 움직이게 하려고 쓰레기를 던지던 관람객은 동물원의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그런데 생활환경을 바꾼 후 관람객 태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양 큐레이터는 “생활환경을 개선한 후 동물에게 음식물이나 쓰레기를 던지는 관람객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동물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굳이 동물을 괴롭히면서까지 반응을 얻을 필요가 없고, 먹이를 직접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뭔가를 먹여주고 싶은 욕구도 충족할 수 있게 돼 직접 먹이를 주는 행동을 자제하게 된 것이다.

    물론 아무리 좋게 만들어봤자 동물원은 동물원이다. 서식지에 가깝게 자연환경을 재현했다고 하지만, 사람 손으로 만든 환경인 이상 그 속에서 인공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서식환경을 재현하기보다 차라리 자연으로 돌려보내라는 동물원 반대론자 주장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 생각이다. 이미 여러 대에 걸쳐 동물원에서 번식을 거듭해온 동물에게 ‘자연 속 삶’을 살게 하는 것은 야생동물을 강제로 우리에 집어넣어 전시물로 만들어버린 과거 행동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동물원은 동물원 자체의 존재 의미를 지닌다. 자연에서 야생동물을 볼 일이 거의 없는 현대인을 위해, 그리고 붉은여우처럼 인간의 관리 하에 개체수를 늘려야 하는 희귀동물의 생태 연구와 보호를 위해서라도 동물원은 꼭 있어야 하는 장소다. 서식지가 파괴돼 갈 곳을 잃은 동물에게 동물원은 새로운 터전 구실도 한다.

    김보숙 서울대공원 동물운영팀장은 “동물원 동물은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더 행복하게 살도록 인간이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관점에서 풍부화 프로그램은 동물원 동물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복지프로그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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