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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경영자’ 강요 모두가 피곤할 수밖에…

‘피로사회’ 쓴 재독학자 한병철, 강연서 자유로운 삶 강조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자기 경영자’ 강요 모두가 피곤할 수밖에…

‘자기 경영자’ 강요 모두가 피곤할 수밖에…
폴로셔츠와 면바지. 지식인의 패션 스타일은 거의 고정됐다. 하지만 한병철(54)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는 다르다. 가지런히 두 번 접은 바지, 가죽 재킷, 한복 옷감 같은 머플러. 여기에 무심하게 묶은 꽁지머리까지 더해지니 좀처럼 그를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분석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기엔 그의 영향력이 매우 강하다. 지난해 그가 펴낸 ‘피로사회’는 동아일보가 선정한 ‘2012 올해의 책 10권’과 출판인 18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대통령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책’으로 꼽힐 정도로 화제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병철은 어떤 사람일까. 이달 펴낸 ‘시간의 향기’ 책날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1994년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0년에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독일과 스위스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피로사회’를 통해 독일에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가장 주목받는 문화비평가로 떠올랐다.”

지옥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파

하지만 이력만으로는 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대화를 나누는 것. 아쉽게도 그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 출판사에 따르면, 그는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단 한 번 일간지 기자간담회, 단 한 번 대학 강연을 하고 지난번 ‘피로사회’를 펴냈을 때처럼 바람처럼 떠난다고 한다. 결국 기자는 3월 19일 서울대에서 있었던 ‘저자 특강’ 강연에서 저자의 생각을 들었다. 독자에게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강연 내용을 복기해본다.



저는 대학 4학년 때인가 처음으로 철학이 궁금해 철학 수업을 들었어요.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이름을 따라 사는 것 같아요. ‘한병철’ 할 때 ‘철’, 그 음을 따라가서 금속공학(철)을 하고, 그 의미를 따라서 ‘철’학을 하고(웃음). 제가 한국말로 강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한국을 떠난 뒤 30년 동안 한국말을 안 하고 살았고, 독일에서 철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철학 개념을 한국말로 모르거든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가장 먼저 독일의 철학 사정부터 얘기하고 싶어요. 철학의 나라라고 하지만 완전히 퇴락했어요. 교육제도가 영미제도로 바뀌면서 철학을 ‘학습’(학점 따는 공부)해 철학이 파괴된 거예요. 사회를 비판하는 철학자도 없죠. 사실상 철학은 굉장히 정치적이거든요. 플라톤 ‘동굴의 비유’에 보면, 동굴에 있는 사람을 밖으로 끄집어내 진리와 빛을 보게 하는 것도 정치적이고, 동굴에 있는 사람들이 동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정치적이죠.

제가 독일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사회문제를 철학적으로 바라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겁이 많아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죠. 철학자는 둘로 나뉘어요. ‘약장수’처럼 돌아다니며 철학을 ‘파는’ 철학자가 있고, 학교 안에서 철학 자체만 ‘학습’하는 철학자가 있는 거죠. 굉장히 슬퍼요. 그 중간에 사회에 대해 사유하는 철학자가 있어야 하는데…. 물론 저도 사회의식이 없었어요. 몇 년 전부터 책 10여 권을 썼죠. 구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살다가 세상에 내려와 보니까 세상이 참 잘못된 것 같았어요. 세상이 지옥 같아. 이 지옥을 어떻게 하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시작했죠.

이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웃음). ‘피로사회’에 대해 말하겠는데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근면’ 같은 교훈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나요? 생산성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한계에 직면해요. 생산성을 더 높이려면 ‘난 할 수 있다’는 말로 동기 부여를 해야 하죠. 이것이 채찍과 명령보다 효과적이에요. 결국 자기 자신이 경영 주체가 되는 셈이죠. 푸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인간이 ‘자기 경영자’가 됐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봤어요. 하지만 저는 부정적으로 봐요. ‘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압으로 작용해 에너지가 소진되고 우울증에 걸리니까요. 결국 인간은 타자에게 굴복하지 않아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죠.

제가 ‘에로스의 종말’을 썼는데요. ‘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갇힌 한 타인과의 에로스적인 관계는 성립할 수 없다는 내용이에요. 나만 생각하면 타인이 보이지 않아요. 타인은 ‘난 할 수 있다’를 ‘난 할 수 없다’로 바꿀 때 보여요. 요즘은 사랑도 ‘소비’돼요.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랑은 없어지고 소비할 수 있는 ‘달콤한’ 사랑만 존재하죠.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게 달콤해져야 하고 긍정성이 강화돼요. 부정성은 점점 없어지죠.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사회

‘자기 경영자’ 강요 모두가 피곤할 수밖에…

3월 19일 서울대에서 강연하는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

물론 부정성은 필요해요. 부정성이 있어야 변증법적인 발전이 지속됩니다. 그런데 스마트폰, 페이스북을 보면서 ‘좋다’ ‘좋다’를 연발하는 긍정 사회에서는 시스템이 지속되죠. 분노해야 사회가 바뀌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본주의가 굉장히 교활해요.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서 인간을 착취하고, 인간에게 달콤함을 주면서 시스템을 지속하죠. 사람들의 관심이 자신에게 몰리니까 지쳐서 우울증에 걸리고, 연대도 안 되고….

책 ‘투명사회’에서는 디지털 매체가 판옵티콘이란 감옥을 만든다고 말했어요. 독일에서는 투명사회를 긍정적으로 봤어요. 정보가 많아지고 부패가 없어져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논리죠. 그런데 저는 신뢰가 없어지고 공동체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봐요. 우리는 실제로 판옵티콘에서 살고 있어요. 남이 나를 감시하지 않아도 내가 나에 대한 정보를 매체를 통해 알려주고 있거든요. 결과적으로 판옵티콘 감시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자기를 감시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되면 통제사회로 넘어가기 쉬워요.

마지막으로 신작 ‘시간의 향기’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사람들이 피곤한 이유는 모든 시간이 자기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해요. 내가 남에게 주는 시간은 노동을 위한 시간이 아니에요. 성과를 떠난 다른 시간이에요. 모든 시간이 자기 시간이 되면 우울해지죠. 서문에 이렇게 썼어요. “느리게 살기는 오늘날 당면한 시간의 위기, 시간의 질병을 극복할 수 없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 혁명이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

책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덧붙여 여러분에게 “지금 하는 걸 계속하다간 바보가 될 것 같다면 이제껏 하던 것을 버리고 다른 것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공대에 다니면서 바보가 되는 것 같아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어요. 그때는 과(전공)를 바꾸는 게 불가능해 나라를 바꾸는 게 더 빨랐어요. 과를 바꾸려고 나라를 바꾼 거지(웃음). 21세에. 이후 10년 동안 난방도 못 하고 살았어요. 돈을 벌어도 자유롭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10년 동안 실업자로 살았죠. 그렇게 자유로웠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그걸 책으로 쓸 수 있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내 책을 읽으니까 관심을 받아 ‘부산물’로서 교수 자리를 얻었죠. 자기를 압박하면 의미 있는 삶도 못 살고, 좋은 사회도 못 만들고, 자기도 몰락해요. 여러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간동아 880호 (p38~39)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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