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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여러 체제와 경제발전 한국은 리트머스 시험장”

낙성대경제연구소장 김낙년 교수의 한국 경제사 해석론

  •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여러 체제와 경제발전 한국은 리트머스 시험장”

“여러 체제와 경제발전 한국은 리트머스 시험장”
“이명박 정부는 우리나라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변모했음을 대외에 자랑했다. 또 우리나라가 개도국의 경제발전 모델로 부상하자 개발 노하우를 전수해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정작 한국을 배우고 싶어 하는 나라도, 또 경험을 나눠주고 싶은 우리도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발전한 경제 성장동력이 무엇인지,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우리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지만, 선진국 주류 학자들은 여전히 일본 식민지배 경험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기초라고 여길 정도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 교수가 부실한 자료와 단절된 통계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한 말이다. 경제흐름의 연속선상에서 성장동력이 국가인지, 시장인지, 아니면 교육열 같은 경제 외적 요인인지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도구가 없다 보니 당연히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1911~2010년 국민계정 장기통계

김 교수는 바로 이런 점에서 최근 ‘낙성대경제연구소’ 학자들이 펴낸 ‘한국의 장기통계 : 국민계정 1911~2010’(김낙년 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김 교수 자신이 실증적 경제사학을 추구하는 연구집단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이다 보니 “자화자찬 같지만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일본, 미국 등에 있는 선진국 학자들”이라면서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책은 1911년부터 2010년까지 우리나라 ‘국민계정’의 장기통계를 집적한 결과물이다. 국민계정은 국내총생산(GDP)·소득·투자·무역수지·소비 등 국민경제 관련 지표를 가리키는데, 현재 세계 각국의 경제 통계는 유엔이 권고하는 국민계정체계(SNA)를 따른다. 그래야 각 나라의 공간적·시대적 비교와 분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발간한 이 책은 2006년 초판 내용을 개정·증보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경제통계’를 정비하고 국민계정체계에 맞춰 통계를 추계한 초판(‘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이 출간되자 당시 학계는 엄청난 폭풍에 휩싸였다.

초판 내용에 따르면, 1911~45년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는 인구가 해마다 1.3%씩 증가하고 1인당 생산이 해마다 2.3% 늘어나는 등 30년 가까이 ‘근대적 경제성장’을 이뤘다. 한마디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입증하는 통계라는 점에서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는 ‘침략’과 ‘수탈’의 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우리 사학계의 지배적 견해와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

사학계의 반격이 있었음은 물론, 경제학계에서는 허수열 충남대 교수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1910년대, 40년대 통계에 대한 신뢰성 문제를 제기하는 등 한동안 논쟁이 벌어졌다. 허 교수는 저서 ‘개발 없는 개발’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을 통해 낙성대경제연구소 측이 1910년대 초기 GDP를 과소평가한 바람에 1910~19년 GDP가 상대적으로 급속히 증가해 경제성장을 이룬 것처럼 비쳤고, 1941~45년은 태평양전쟁으로 그나마 경제적 성과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설령 GDP가 증가했더라도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GDP는 증가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도 말했다. 한마디로 일제강점기 성장론의 통계적 결함을 맹렬히 공격한 것이다.

한국에서 논란이 증폭되는 와중에 외국에서는 이 책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드러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장기경제통계(LTES) 정비 작업을 주도해온 히토츠바시(一橋)대학 경제연구소가 일본어로 번역해 도쿄대학출판부에서 출간(‘植民地期朝鮮の國民經濟計算 1910-1945’)했고, 이 추계를 영어권에 소개하는 논문(‘Korea’s First Industrial Revolution, 1911-1940’, explorations in Economic History, vol. 49)도 발표했다. 이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통계자료를 국제적으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인용한다는 의미였다.

초판에 이어 최근 발간한 책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 경제사 100년을 국민계정이라는 시스템으로 포괄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 커 보인다. 통계적 결함이나 허구성 논쟁을 일단 뒤로했을 때, 100여 년에 걸친 한국의 장기 경제흐름을 공간적, 시간적으로 비교 평가해볼 수 있는 틀을 갖춘 점에서는 허 수열 교수조차 그 가치를 인정했다.

지정학적 특수성 엄청난 가치

물론 이번 개정·증보판에서도 일제강점기에 근대적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측 주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를 복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일본인이 자본과 물자를 들여와 경제성장에 기여했지만, 경제활동의 주요 무대는 한반도였고 경제활동 주체 역시 압도적으로 조선인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의 경제활동 결과가 통계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현대자동차를 멕시코에서 생산하면 그 나라 GDP로 잡듯이, 당시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들어오면 조선의 경제활동 지표로 잡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다. 김 교수의 이어지는 설명이다.

“진영 논리에 빠진 소모적 논쟁보다 국제무대에서 우리 성과를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의 장기경제통계는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경제연구소의 ‘미조구치 통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지만, 2006년 미조구치 통계의 오류를 바로잡은 우리 책을 발간한 이후 낙성대경제연구소 통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 세계 경제통계를 망라한 ‘매디슨 통계’에서도 미조구치 통계와 낙성대경제연구소 통계가 나란히 제시될 만큼 주목받는다.”

김 교수는 한편으로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체제 속에서 경제발전 흐름을 연구할 수 있는 곳을 찾기도 힘들다고 밝혔다. 한반도의 경우, 의도치 않게 여러 차례 체제 전환의 실험장이 됐다. 왕조 지배하의 전통 사회가 급격한 개방 충격에 노출돼 개항기를 겪었고, 외래 권력에 의한 식민지체제로의 재편도 맛봤으며, 8·15 해방 후에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맞이했고, 곧이어 같은 땅에서 두 패로 나뉘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도 겪었다. 각 시기 체제와 제도가 달랐으며, 경제적 성과에서도 차이가 컸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제도(또는 체제) 변화와 경제성장(또는 사회 변화)의 관련성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진화론의 힌트를 얻었듯이, 우리나라는 체제 및 경제 성장 연구와 관련해 다양한 자료를 압축적으로 보유한 갈라파고스 제도 같은 곳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는 동일 조건하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흐름의 과정 및 결과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여러 체제를 겪으면서 어떠한 때 부(富)가 늘고 줄었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김 교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성과물을 케임브리지대 등 외국 유명 대학에서 주목하는 이유가 한국의 이 같은 지정학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서 허브 구실을 하겠다고 말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자격증과 증거물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료를 실제로 우리가 갖고 있으므로 경제흐름 연구와 정보의 발신지 노릇을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경제 정보 주권을 행사할 경우, 다른 나라들은 우리나라를 따라올 수밖에 없다. 이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가치다.”

김 교수와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는 한편으론 뿌듯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걱정되는 바가 없지 않았다. 김 교수팀의 연구 성과가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마당에, 일제강점기에 경제적 성장을 이뤘다는 팩트를 가뜩이나 우경화하는 일본이 ‘치사하게’ 써먹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속 일부 인사가 개인적 소견이라는 전제 아래 식민지배 경험을 ‘미화’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도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다.



주간동아 2012.11.26 864호 (p56~57)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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