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4

2012.04.23

한순간 실수한 아이들 모정으로 품고 쓰다듬고

30년째 재소자 돕는 이명자 씨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2-04-23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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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순간 실수한 아이들 모정으로 품고 쓰다듬고
    이명자(71) 씨는 30년째 교도소를 오간다. 갇힌 자의 벗을 자처하기에 그곳을 어렵지 않게 느낀다. 그동안 서울구치소와 서울남부교도소 등에서 인연이 닿은 이만 600명에 달한다. 재소자를 만날 수 있는 건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반. 그는 그곳에 갈 때마다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간다. 기자와 만난 4월 17일에도 떡과 빵을 사들고 서울남부교도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할머니는 취재에 응하는 것을 영 어색해했다. 고운 주름과 흔들리는 음성에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다.

    “나란 사람이 이런 걸 해도 되나 몰라요. 그래도 내 얘기를 하면 재소자 아이들을 도와줄 분이 많아질 거라는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냈어요. 딸이 오늘 아침까지도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려고 이 일을 한 것 아니지 않느냐’며 만류했지만 몰래 나왔어요.”

    이명자 할머니가 대단한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그간의 봉사활동을 인정받아 1996년 법무부 장관 표창장, 2002년 대통령 표창장을 받긴 했지만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그럼에도 제 밥벌이하는 데 골몰하는 사람 틈에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눈길을 끈다.

    마흔두 살 때 시작 30년째 갇힌 자의 벗

    사회에 공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살던 그는 어느 날 대한성공회 미사시간에 ‘갇힌 자를 돌보라’는 신부님 말씀을 들은 걸 계기로 1982년 교도소 교화위원이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종교 교화시간에 그곳에 들러 재소자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선교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그때가 마흔두 살. 공무원인 남편은 아내의 외부활동에 마뜩잖아 할 법도 했지만 든든한 후원자가 돼줬다. 어려서부터 엄마와 함께 양로원에 가 노인들과 함께 떡을 나눠 먹던 두 딸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사글세로 살던 그가 담 안의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고 있어선지 청소년, 특히 여자보다 비교적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아이에게 관심이 갔어요. 처음에는 서울구치소에서 고아인 청소년을 많이 만났죠. 누구에게도 사랑이란 걸 받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저를 ‘어머니’라고 부를 때 보였던 그 눈망울을 잊을 수 없었어요. 한번은 생일 케이크 앞에서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라고 외치며 우는 아이를 보니 얼마나 엄마 품이 그리우면 그럴까 싶어 목이 메더라고요.”

    만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정을 쏟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을 볼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부족했다. ‘한번 빵이나 얻어먹자’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온 재소자의 마음을 얻는 것은 교도소 담을 허무는 일만큼 어려웠다.

    “이런 식으로 만나면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편지를 나눴죠. 교화시간에 출소 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충을 얘기하면 그 내용을 메모해뒀다가 그걸 바탕으로 편지를 썼어요. 처음에는 안부 인사를 많이 했는데 편지를 서너 번 주고받다 보면 아이가 스스로 죄를 말하고 반성하더라고요. 저는 아이들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만 진심을 나누다 보면 그 얘기가 나와요. 아이들이 누구와 진심으로 대화해본 경험이 적어선지 편지하는 걸 어려워해요. 저부터도 편지를 제대로 쓰는 데 10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처음엔 왠지 꺼림칙해서 주소도 안 가르쳐줬는데 이제는 집도 공개해요. 오가면서 밥도 먹을 수 있게 하면서 나 자신을 여니까 소통이 되더라고요. 이렇게 주고받은 편지가 어느새 사과 박스로 여덟 박스나 됐어요.”

    그는 편지를 쓰는 것이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출소하는 사람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월급 날 함께 식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택한 두 번째 교화 방법은 가정을 이루게 돕는 것. 오랜 수형생활로 이성과의 대화법을 모르는 이들에게 사랑의 카운슬러를 자처하는 한편, 교회를 빌려 결혼식도 올려준다.

    “가정을 이루면 뒤탈이 없어요. 자식과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일에 집중하죠. 신기하게도 결혼을 시킨 아이들은 사고가 안 나요. 한두 번 중매를 서기도 했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알아서 예쁜 색시를 데려 와 식을 올리게 도와줬죠. 언젠가 아들 하나를 낳고 사고 쳐 교도소에 들어온 아이가 있었는데, 여자가 떠날 것 같다고 고민하기에 수소문해 그 여자를 찾아갔어요. 장아찌 한 통을 담아가지고 가 ‘그 아이가 밤낮으로 너를 생각하고, 너를 위해 열심히 살 각오를 하고 있다. 가정을 살린다는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했죠. 다행히 여자가 잘 참아줘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요.”

    때로는 재소자와 가족의 화해도 시도한다. 대체로 어렸을 때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에 타인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재소자와 그 어머니를 대면하게 한다. 하지만 화해가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한번은 어머니와 재소자의 면회를 주선하자 어머니가 “이놈아, 빌딩 하나 짓고 나서 나를 찾아라. 왜 지금 찾느냐”면서 아들을 매몰차게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가정을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사회적으로나마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자리를 주선했다.

    “사랑을 나눠주는 심부름꾼으로 살고파”

    한순간 실수한 아이들 모정으로 품고 쓰다듬고

    이명자 할머니는 재소자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려고 편지를 써왔다.

    “가족과 결합이 안 되면 좌절하기 쉽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해요. 목공일을 할 때 공구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걸 사주면서 용기를 북돋워줘요. 사람이 배신을 당하면 의지가 더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이런 친구가 많아서 일자리를 주선하지만 쉽진 않아요. 대부분 오래 있지 못하고 자기 사업을 하더라고요.”

    재소자를 챙기다 보면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 교회 지인과 동네 사람들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 10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그를 돕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의 행동반경도 넓어졌다. 고아를 도와줘야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부천 소망의집이라는 고아원에서 봉사하는 한편, 자원봉사 모임인 한빛만나회도 꾸렸다.

    “저는 심부름꾼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나누고 싶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받고 싶은데 제가 그 연결고리가 되니까요. 누가 백일이라고 해서 10만 원을 주면 떡을 사요. 또 제 돈을 보태 어묵도 사죠. 5000원이면 듬뿍 살 수 있거든요. 거기에 고추장까지 사서 함께 보내면 아이들이 떡볶이를 만들어 먹으며 ‘맛있다 맛있다’ 하니까 얼마나 좋아요(웃음).”

    그간 어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어떤 이는 기도모임 회장인 그를 두고 돈이 많은 재벌 회장인 줄 알고 접근했고, 경찰서를 들락거려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를 번거롭게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번 꼬인 인생 실타래를 풀어준다는 생각으로 성심껏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 덕에 안정을 찾은 사람이 많아졌고 인연이 지속됐다.

    “이 나이 먹으면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일주일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죠. ‘어머니 회 잡수러 오세요, 추어탕 잡수러 오세요’ 하는 어엿한 아들도 있고, 제 사랑이 필요한 아들도 많거든요. 물론 이런 걸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요. 요즘은 그동안 뿌린 씨의 열매를 거두는 것 같아요. 잘 자란 사람들이 출소한 아이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면 뿌듯해요.”

    100만 원이 있다면 그 돈을 모두 저축하기보다 10명에게 10만 원씩 주겠다는 이명자 할머니. 제 돈 불리느라 여념 없는 사람들은 그의 남다른 선택을 다소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할머니의 넉넉한 미소를 보니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이 옳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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