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6

2011.10.04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기부, 내 삶의 원동력

나누는 그 자체에 가치와 의미 둬야…자본주의 빈자리 메우는 순기능 발휘

  • 류시문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원장

    입력2011-10-04 09: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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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기부, 내 삶의 원동력
    나는 가난한 소작농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무렵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쪽 고막마저 다쳐 잘 듣지도 못하는 이중 장애인이 됐다. 가난과 장애의 설움은 나의 삶 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랬던 내가 환갑이 지난 지금,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회원이 됐다.

    기부는 받은 은혜를 갚아나가는 것

    2000년 전후 다른 사람에게 받은 은혜를 이제는 되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남을 돕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든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나눔을 실천하게 된 데도 잊을 수 없는 계기가 있다.

    어린 시절 가난과 장애 탓에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아버지에게 “중학교에만 보내 달라”고 애원해 겨우 승낙을 받았다. 다음 날 소백산맥 자락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시절 이러한 결심은 기부를 실천하는 삶의 원동력이 됐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분에게 도움을 받았다. 특히 대학 시절, 청각장애로 인한 불안감으로 공황장애를 겪던 나에게 믿음을 안겨준 교수 부부가 계셨다. 그분들은 “장애란 사람의 수많은 특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너는 훌륭한 사람이 돼 남을 돕는 사람이 될 것”이라며 용기를 줬다.



    게다가 그분들은 창업자금 500만 원이 없어 고생하던 나를 위해 선뜻 정기예금을 해약해 필요 자금의 10배인 5000만 원을 빌려줬다. 나중에는 집까지 저당 잡히며 사업에 쓰라고 자금을 대줬다. 두 분의 절대적 신뢰와 지지 덕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두 분은 내 인생의 모델이며, 그분들의 믿음과 신뢰는 사업 밑천이었다.

    그분들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은 나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믿었다. 기부는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아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기부한다고 해서 사람들은 내가 부자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자동차 유지비를 절약하고자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했고, 점심식사는 관공서 구내식당에서 3000원으로 해결했다. 바쁠 때는 직원 모르게 사무실 빈방에서 라면을 먹기도 했다. 오래 입어 소맷부리가 닳은 옷을 눈썰미가 좋은 사람에게 들키기도 했다. 한번은 동창회 모임에서 술 한잔을 걸친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려고 장애인증을 내밀었는데 친구가 냅다 큰 소리로 말했다. “이놈은 장애인이 아니오. 돈 더 받으소!”

    많은 사람은 “먹고 살 만해지면 기부하겠다” “자녀 결혼만 시키면 기부하겠다” “집 한 채만 장만하면 기부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기부를 못할 것이다. 기부란 풍족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위하는 삶을 기반으로 나눔 자체에 가치를 느낄 때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놓은 기부금도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을 뒤로한 채 끊임없이 절약해서 모은 돈이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말처럼, 많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눔 그 자체에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기부할 수 있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랑,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기부가 활성화하려면 이 사회에 만연한 개인주의 경향을 극복하고, 맹자의 사단 가운데 하나인 측은지심을 갖춰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우지만 채워지는 ‘기부의 역설’

    아테네 민주주의를 꽃피운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오직 적절히 사용해야 할 만큼만 나의 것이다. 빈곤을 수치로 생각할 필요 없다. 오직 가난을 면하려는 노력이 적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라.”

    이는 부와 가난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다. 유년 시절부터 겪어온 가난이 너무 서러워 후일을 경계하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늘 생활의 눈높이를 낮춰 근검절약했고, 그렇게 모은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부할 수 있었다.

    덜 가지고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재화가 아닌가 싶다. 더 가지려고, 더 채우려고 기를 쓰는 사람을 자주 본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리 그저 덜어내면서 살고자 노력한다. 오히려 그것이 마음이 더 편하다.

    기부는 단순히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받는 것이다. 그만큼 내 마음이 풍성해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내 이웃이 부유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행복한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나에게 되돌아온다. 나누고 비웠지만 오히려 내 마음이 풍성하게 채워지는 ‘기부의 역설’이다.

    기부하면 좋은 점이 많다. 하나의 예로, 무엇보다 삶의 열정과 에너지가 충만해진다. 자꾸 가지려고만 들면 더 갖지 못하는 자신이 나약해지고 미워지겠지만, 나누다 보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일까. 비록 몸은 장애인이지만, 내적 에너지는 어느 누구보다 활력이 넘친다.

    ‘논어’ 태백편에 “나라에 도가 있으되 가난하고 천하면 이는 수치다. 나라에 도가 없으되 부유하고 귀한 것이 수치다”라는 말이 나온다. 공정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비춰 본다면, 땀 흘리며 노력하지 않는 자가 정의롭지 못한 힘이나 권력을 이용해 부와 귀를 얻는 것을 꾸짖는 말이라 하겠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난해서는 안 된다. 취약계층이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희망과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회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기부는 바로 이런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일조한다.

    기부는 남에게 등 떠밀려 하는 것도 아니요, 치사를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마음의 여유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뤄지는 고결한 인격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통한 기부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는 대안으로 작용할 것이다.

    기부 문화는 메마른 세상에 피를 돌게 하고 갈등을 완화하면서 통합을 이루는 귀중한 자산이다. 더 많은 사람이 기부에 참여해 국민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평화롭고 따뜻한 사회로 발돋움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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