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4

2009.07.14

“반드시 처리하자” vs “차라리 밟고 가라”

여야, ‘비정규직 법안’ 처리사활 건 대치 ‘냉동정국’

  • 유성운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polaris@donga.com

    입력2009-07-08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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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에 한나라당이 비정규직법 개정안과 미디어악법을 ‘원샷’으로 처리하려 한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의원 여러분께서는 주말에 지방에 내려가지 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국회 근처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6월26일 오후 2시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1, 2차 입법전쟁 후 약 4개월 만에 민주당 원내사령관의 입에서 ‘비상 대기령’이 떨어진 것이다.

    “반드시 처리하자” vs “차라리 밟고 가라”

    5인 연석회의는 비정규직법 시행 유예 문제를 놓고 11일간 설전만 거듭하다가 파행으로 끝났다.

    18대 국회 개원 후 손을 놓고 있던 여야는 비정규직보호법 개정 시한이 닥치자 뒤늦게 6월1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3개 교섭단체 간사와 한국노총, 민주노총 대표가 참여하는 5인 연석회의를 구성했다.

    쟁점은 비정규직보호법 시행 유예기간이었다. 민주당은 ‘유예 불가’를, 한나라당은 ‘4년 유예’의 정부안보다 1년 낮춘 ‘3년 유예’를 주장했다. ‘마지노선’인 6월30일에는 ‘1년 유예’(민주당)와 ‘1년6개월 유예’(한나라당)까지 좁혀졌으나 이 간극을 끝내 줄이지 못한 채 5인 연석회의는 결렬됐다.

    3년에서 1년6개월까지 양보한 한나라당이 협상 결렬을 감수하며 ‘1년’안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내년 6월 지방선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의원은 “‘1년 유예’를 받아들일 경우 내년 지방선거 정국에 비정규직 문제가 다시 떠오를 텐데 민주당은 이를 이슈로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비정규직보호법 개정안 처리를 놓고 한나라당 내부 의견은 다소 엇갈린다. 하나는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의견이다. 7월1일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으로 정규직 전환이 안 된 비정규직의 대량 해고가 시작되면 여론 악화의 ‘쓰나미’가 민주당을 덮치리라는 예상이다. 민주당의 ‘발목잡기’가 이들에 대한 구제를 막았다는 논리로 비정규직보호법 개정안을 처리하며 미디어관계법도 ‘끼워팔기’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1년 유예 vs 1년6개월 유예 결국 결렬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로 인한 혼란은 어디까지나 170석 이상을 갖고 있는 집권여당이 떠안을 몫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서민’ ‘중도’ ‘실용’을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깔려 있다. 민주당에게 ‘1년’안은 ‘세이프티(안전) 라인’이다. 협상 내내 공조체제를 다져온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 김재윤 환경노동위원회(이하 환노위) 간사는 입버릇처럼 “양대 노총이 수용할 수 있는”이라는 전제를 달며 양 노총을 의식했다.

    “반드시 처리하자” vs “차라리 밟고 가라”

    6월30일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장실에서 추미애 위원장(왼쪽)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비정규직법안 처리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서거 정국’의 동력이 떨어져가는 민주당으로서는 노동계마저 적으로 돌릴 여유가 없다”며 “한나라당과 협상에 타결하면 그 불똥이 누구에게 튀겠냐”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악역은 원래 여당의 몫이다. 차라리 여당이 빨리 직권상정을 해주는 것이 민주당 처지에서는 속편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환노위 추미애 위원장의 처신도 많은 논란을 낳았다. 추 위원장은 여야 간 협상이 한창이던 6월30일 “3당 간사 간 합의를 하더라도 양 노총이 받지 않으면 이를 상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추미애가 자기 정치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추 위원장이 당면한 문제 해결보다 향후 정치 행보를 고려하며 양대 노총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 자유선진당 권선택 환노위 간사는 “추 위원장이 여야나 노동계와 정치권을 중재할 만한 중재안이나 조정안은 내지도 않고 양대 노총에 결정권을 맡길 거면 국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대립이 첨예하게 진행되는 동안 7월1일 오후 한나라당 조원진 환노위 간사가 추 위원장의 회의 진행 거부를 이유로 사회권을 차지해 전격적으로 비정규직보호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이에 추 위원장은 ‘무효’를 외치며 이날 밤 9시에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소속 의원들을 소집해 상임위 전체회의를 열었다. 하루에 상임위 전체회의가 두 번 열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민주당은 추 위원장이 사회권을 양도한 적 없다며 한나라당의 상정에 대해 ‘무효’를 주장하지만 한나라당은 추 위원장이 회의 진행을 기피했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국회 의사국은 “‘의회자율권’에 따라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며 한발 물러서고 있어 법적 공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7월2일 한나라당은 자유선진당, 친박연대와 ‘1년6개월 유예’안에 합의하며 민주당을 재차 압박했다. 민주당 김재윤 환노위 간사는 “수용할 수 없다”고 거부 의사를 밝힌 데다 한나라당 단독 상정에 대한 공방도 치열해 여야 간 협상이 당분간 재개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당내에서는 가장 중요한 목표인 미디어관계법 저지를 두고 너무 많은 ‘힘’을 빼고 있다는 염려도 있다.

    사실 민주당으로서는 미디어관계법에 대한 고민이 더 크다. 민주당 의원에게 “미디어관계법과 비정규직법안 중 하나를 막아야 할 경우 어느 것을 선택하겠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미디어관계법”이라고 답할 정도로 민주당은 미디어관계법을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인다.

    미디어관계법은 국회의장 직권상정 처리?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이번 회기 내에 끝을 보겠다는 구상이다. 10월 재·보궐선거 전에 깔끔하게 정리를 하겠다는 것이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이번에 처리하지 못하고 9월 정기 국회로 넘어가면 곧 연말까지 끌려갈 것”이라며 “반드시 이번에 끝내야 한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다. ‘19대 총선 공천’에 반영한다며 국회 출석부까지 만들어 의원들을 독려할 정도다.

    미디어관계법은 이미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이하 문방위)에 상정된 상태로, 원칙대로라면 문방위 전체토론이나 법사위의 심사가 남아 있지만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곧장 본회의 처리가 가능하다. 민주당 전병헌 문방위 간사는 “한나라당이 구태여 복잡하게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치지 않고 미디어관계법을 직권상정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미디어관계법 저지가 뚫릴 경우 민주당은 ‘사면초가’의 후폭풍을 각오해야 한다. 호남지역의 한 재선의원은 “막지 못한다면 MBC를 비롯해 언론노조와 각종 시민단체 등 민주당의 원군을 잃게 될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뭇매를 맞아 제1야당으로서의 위치가 위태로울 것”이라며 고민을 토로했다. 민주당으로서는 ‘참여정부’ 후반기의 악몽이 떠오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미디어관계법 결사 저지는 민주당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냥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어떻게’ 막느냐다. 지난 본회의장 점거 사태 이후 국회사무처가 곳곳에 CCTV를 설치하고 잠금장치를 보수하는 등 보안시스템을 강화해 ‘점거’ 카드는 불가능한 상태다. 최문순 천정배 장세환 등 강경파가 연일 ‘결사항전’을 외치며 강경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지만 마땅한 해법이 없어 보인다. 민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170석이 넘는 저들이 기어이 밟고 가겠다면 밟혀야지 어떻게 하겠냐.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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