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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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1년치 시간, 어젠더

  • 김민경 holden@donga.com

    입력2008-12-08 18: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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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로 만든 1년치 시간, 어젠더

    럭셔리 브랜드에서 어젠더는 판매 순위 1, 2위에 오르는 아이템입니다. 남녀 모두 늘 갖고 다니는 데다, ‘시간’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어서 선물로도 인기가 있거든요. 사진의 어젠더들은 모두 에르메스 제품으로, 홍보담당자는 2009년 에르메스의 ‘테마’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합니다.

    가을에는 전어, 겨울엔 굴을 사먹듯 쇼핑에도 제철이 있답니다. 이번 주의 ‘제철 쇼핑’은 다이어리 혹은 어젠더(agenda)입니다. 전에는 다이어리, 그전에는 업무수첩, 일기장, 탁상일기 등으로 불리던 것이 최근 쇼핑신에서는 ‘어젠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어요. 뭔가 좀더 비즈니스 퍼슨스러워선지, 수첩 볼 때마다 정신 바싹 차리자는 자기암시를 하기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1월에 산 다이어리는 역시 신선도가 떨어져 부쳐버린 ‘굴전’ 같아요. 신선하고 또랑또랑한 다이어리를 사려면 12월에 사야죠. 한동안은 신상 PDA를 들고 다니는 맛에 다이어리를 쓰지 않았어요. 엄청나게 불편했어요. PDA를 펜이나 손톱으로 두드릴 때 나는 인공적이고 테크놀로지스런 소리는 멋졌어요. 음, 그게 다였죠. 속으론 한 장씩 넘기면 일주일 동안의 일과 약속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날로그 다이어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요.

    그러다 한 후배가 커피 15잔을 마시면 ‘공짜’ 다이어리를 준다며 열심히 드나드는 ‘별다방’에 함께 가느라 저도 못 이기는 척 다이어리파로 돌아왔답니다. 하지만 그 다이어리, 결국 또 다른 후배에게 주고 말았어요. 늘 보는 다이어리만큼 나와 잘 맞아야 하는 물건도 없더라고요. ‘별다방’ 다이어리의 과도한 선과 이모티콘과 깜찍한 타이포를 볼 때마다, 15개 스탬프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사먹은 달고 느끼한 땅콩 커피맛이 기억났고, 펼친 면이 자꾸 접히는 제본 기술은 제 성질을 건드렸죠.

    다이어리는 내가 갖지 못한 면을 갖고 있어서 나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구실을 해야 해요. 기억력이 떨어지고 하루에 두 건 이상 마무리할 일이 있고, 꼭 정해진 시간에 ‘마감’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버티컬’ 레이아웃이 가장 편리해요. 즉 다이어리를 펼치면 월요일에서 일요일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세로 한 칸을 차지하는 하루 시간에 점선이 쳐 있는 디자인이죠. 그리고 구석에 3개월치 달력이 있어요.

    뭐 대단한가 싶지만, 이렇게 시간 ‘짜는’ 아이디어를 1952년에 처음 선보인 프랑스의 ‘쿠오바디스(QUO VADIS)’는 ‘버티컬’의 선두주자로서 지금도 다이어리의 명품으로 꼽힌답니다. 또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수첩 ‘몰레스킨(MOLESKIN)’은 일종의 ‘로망’이죠. 몰레스킨은 ‘아멜리’ 등 수많은 유럽 영화에 등장하니 ‘다이어리계의 샤넬’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샤넬을 100m 밖에서도 알아보게 하는 것이 ‘더블C’ 로고라면, 몰레스킨을 특징짓는 건 표지 밖과 안을 잡아주는 야무진 고무밴드예요(맞아요, 짝퉁 많아요). 최근엔 유럽이나 미국에서 한 교양 한다는 사람들은 일본 장인들이 만든 다이어리를 ‘들어줘야’ 한답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등 여행과 함께 발전한 럭셔리 브랜드의 다이어리는 굉장히 인기 있는 아이템이라 매년 ‘매진’을 기록합니다. 에르메스의 경우 2009년 브랜드의 테마가 속지에 프린트된 다이어리를 곧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구체적인 사항은 ‘극비’랍니다. 커버는 악어, 타조, 송아지 등 고가 소재고 스티치는 말 안장을 꿰매는 장인들의 솜씨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종이와 가죽으로 붙잡아 꿰매서 팔 생각을 하다니, 참 대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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