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6

2016.12.07

르포

스스로 ‘하야’에서 강제 ‘퇴진’으로

다섯 번째 집회, 대통령 ‘모르쇠’에 실망 150만 명 운집… 악천후도 못 막은 질서 있는 분노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6-12-06 16: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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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촛불집회가 열린 11월 26일 날씨는 최악이었다. 정오부터 내린 눈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영하권에 머문 기온 탓에 조금만 걸어도 손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촛불은 악천후에 굴하지 않았다. 오후 5시 이전 집회 현장에 도착한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광장이 아닌 청와대 인근 골목으로 모였다. 법원 판결로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주최 측 추산 35만 명의 시민은 오후 5시까지 청와대에서 200m 떨어진 청운효자동주민센터를 중심으로 청와대를 빙 둘러싸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오후 5시 30분이 지나면서 촛불은 계속 불어나 광화문광장 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청와대 근처에 있던 시민들도 내려왔다. 그들은 오랜 시간 추위와 싸울 채비라도 한 듯 한껏 두꺼워진 옷차림이었다. 주목할 대목은 시민들이 든 손팻말의 내용이 5주 만에 바뀌었다는 점. 네 번째 집회까지 시민 대부분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라는 문구가 쓰인 손팻말을 들었지만, 이날 집회에는 ‘하야’ 대신 ‘퇴진’이 적혀 있었다.

    이날 광화문광장과 내자동로터리까지 거리에는 150만 명(경찰 추산 27만 명) 넘는 시민이 촛불을 들었다. 영하로 떨어진 기온에도 다섯 차례 촛불집회 중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다. 매주 집회를 거치며 집회 참가자는 계속 늘어났지만 오히려 집회 현장은 점점 더 질서가 잡혀가고 있었다. 100만 명이 모인 11월 12일 4차 집회에서는 통행 문제로 간혹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더 많은 사람이 모인 5차 집회는 4차 때에 비해 훨씬 체계가 잡혀 있었다. 시민 대부분이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며 질서를 유지했고, 집회 무대도 더 넓어졌기 때문이다. 집회에 참가한 시민은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에만 머물지 않고 내자동로터리부터 대한문까지 대로변은 물론, 골목골목으로 퍼져 촛불을 들었다.



    깊어진 분노에도 잃지 않은 질서

    5주째 한 번도 빠짐없이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서울 중구의 이정수(58) 씨는 무교동사거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이라고 쓴 리본을 가방에 걸어 놓고 서 있었다. 이씨는 “화환용 인쇄업체를 운영해 직접 인쇄한 것을 가져왔다. 원하는 분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지난주까지는 ‘퇴진’과 ‘하야’ 두 가지 문구를 준비해왔는데 이번 주에는 퇴진 문구만 만들어 왔다. 문구를 전부 ‘퇴진’으로 바꾼 이유는 대통령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국민이 매주 모여 하야를 외쳐도 대통령은 검찰 조사조차 성실히 받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밝혔다. 이씨의 주변으로 그가 만든 리본을 가방이나 옷에 단 사람이 종종 보였다.



    이씨의 리본 문구만 바뀐 것은 아니었다. 주최 측이 나눠주는 팻말에도, 시민이 만들어온 팻말에도 대부분 ‘하야’ 대신 ‘퇴진’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경기 수원시의 정모(30·여) 씨는 “그래도 대통령이고 국민이 뽑은 분이니 그동안 예우하는 차원에서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의미에서 ‘하야’라는 문구를 주로 사용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4주째 계속된 촛불집회에도 하야는커녕 여전히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그 와중에 계속 최씨 일가의 전횡이 보도되니 국민의 분노와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그 때문에 대통령이 스스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하야’에서 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퇴진’으로 문구가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직설적 표현보다 풍자와 해학으로

    이번 촛불집회에도 거리를 청소하며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많았다. 3주째 집회에 참가하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는 서울 노원구의 남지은(21·여) 씨는 “집회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국민을 설득하려면 무엇보다 매주 열리는 촛불집회를 질서 있게 치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도 집회에 계속 참가해 환경미화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여수에서 온 김민수(25) 씨도 쓰레기를 주우며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김씨는 “언론보도를 통해 촛불집회에 참가하면서 현장도 청소하는 자원봉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감동받았다. 집회 현장 청소는 지방에서도 할 수 있지만, 대규모로 사람이 모이는 광화문광장에 손이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상경해 거리 청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에 등장한 또 하나의 볼거리는 다양해진 깃발 모양과 내용이었다. 이동공간이 생겨서인지 5차 촛불집회에는 행진 대열이 많았다. 대로부터 골목까지 깃발이 휘날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대학 학생회나 노조에서 내건 깃발보다 개인이 만든 독특한 내용들이 눈에 더 많이 띄었다. 청와대의 비아그라 구매를 풍자한 ‘하야하그라’ ‘한국 고산지 발기부전 연구회’ ‘사립 돌연사 박물관’ 등 현 시국을 풍자하는 내용이 다수였으나 그중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깃발도 있었다.   

    ‘얼룩말 연구회’ 깃발을 들고 시위에 참가한 숭실대 철학과 김현수(21) 씨는 “학생회나 학생단체 이름으로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학생들을 위해 이 깃발을 들었다. 의미 없는 단어의 조합으로 만든 것이니 특정 단체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대통령과 현 시국에 불만을 표출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깃발 아래 모여 함께 행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계속 촛불집회에 참가해온 경기 안양시의 정모(23·여) 씨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하야에서 퇴진으로 점점 커지고 있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오히려 점잖아지고 있다. 화가 난다고 대통령에게 원색적으로 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잘못을 풍자하는 깃발을 들거나 노래를 부른다. 이렇듯 끓어오르는 분노에 대한 표현의 절제가 대통령의 답답한 행보와 맞물려 매주 더 많은 시민이 촛불을 들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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