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6

2016.12.07

국제

‘고아가 된 유럽’ 홀로서기는 시작됐다

“지켜주지도 않을 트럼프 말을 왜 들어야 하나” 커지는 ‘미국 없는 안보공동체’ 목소리

  • 황일도 동아일보 화정평화재단 연구위원 shamora@donga.com

    입력2016-12-06 11: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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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비자에게는 자동차 브랜드로 익숙한 스웨덴 사브(SAAB)는 사실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군수업체 가운데 하나다. 1980년대 후반 개발돼 군소국가의 사랑을 받아온 ‘작지만 단단한’ 다목적 전투기 그리펜이 바로 이 회사 작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90년대 중반 이 회사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냉전 종식과 관계가 깊다. 발트해 건너 코앞에 소련의 위협을 마주하던 스웨덴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범용성이 높은 무기체계를 자체 개발해왔지만 소련 해체와 함께 관련 산업도 사그라진 것이다.



    트럼프와 푸틴이 화해한다면

    11월 하순 스웨덴 국방부는 1990년대 이 회사가 개발했다 1개 대대 배치를 끝으로 중단했던 이동형 지대함미사일 RBS-15(Robotsystem 15)의 생산 재개를 공식 선언했다. 역시 스웨덴 업체인 중장비회사 스카니아의 발사대 트럭에 탑재돼 산간지역에서도 기동이 가능한 전천후 대함미사일을 해안지대에 배치하겠다는 것. 국토 대부분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나라는 유사시 바다를 건너올 상대의 전투함을 격침하는 작전능력이 군사교리의 골자를 차지한다.

    중립국 정책을 표방해온 스웨덴 정부는 명시적 언급을 꺼리지만, 이러한 결정이 최근 러시아의 행보 때문임을 부인하는 현지 전문가는 없다. 러시아 정부는 11월 중순 발트해 자국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에 바스티온 대함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 이 지역에는 전술탄도미사일 이스칸데르와 방공미사일 S-400 배치도 예정된 상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와 멀리 떨어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자리한 역외영토로, 소련의 일부였던 발트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이 1991년 독립한 이래 러시아에게는 유일하게 남은 ‘중부유럽으로 뻗은 팔’이다.

    20년 평화 끝에 다시 시작된 긴장. 발트해를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은 유럽 전체가 최근 목도해온 ‘새로운 냉전’의 정밀한 축소판이다. 이 미묘하기 짝이 없는 살얼음판 위에 또 하나의 메가톤급 변수가 겹쳤다. 누구도 예상 못 했던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선거(대선) 승리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외치며 동맹에 대한 기여를 재조정하겠다고 선언하던, 유럽 각국이 미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안보 무임승차를 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던 이단아가 백악관 주인이 됐다. 유럽 곳곳에 있는 전문 연구기관들은 앞다퉈 세미나를 열고 ‘트럼프 이후’를 전망하기 시작했다.



    11월 24일 스웨덴 스톡홀름 인제뇌르 콘퍼런스센터에서 안보개발정책연구소(ISDP)가 개최한 ‘미국의 대외정책 : 선거 이후(US Foreign Policy: After the Election)’ 세미나. 전직 국방부 장관과 주러시아 대사, 의회 외교위원장 등 쟁쟁한 멤버가 한자리에 모였지만, 합의가 가능한 분명한 결론은 단 하나, “모르겠다”는 것뿐이었다. 선거 기간 내내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트럼프 당선인의 메시지와 안보 분야 인선 과정에서 드러나는 예상외 행보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가늠하기조차 어렵게 만든다는 하소연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꼭 닮은 또 하나의 혼돈이다.

    방향은 크게 둘로 엇갈린다. 첫 번째 갈래는 스벤 히르드만 전 주러시아 대사가 펼치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이다. 어떻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서로 호감을 갖고 있는 트럼프가 등판한 이후 미국과 러시아 관계는 개선될 공산이 크고, 따라서 서두에서 살펴본 지역 내 군사적 긴장도 상당 부분 사라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다. 특히 더는 국제분쟁에 개입하기를 원치 않는 미국 유권자의 성향이 선거를 통해 분명해진 만큼 중동 등에서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개연성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도 뒤를 잇는다.



    “그들은 구하러 오지 않았다”

    카린 엔스트롬 전 국방부 장관의 생각은 각도가 달랐다. 미·러 관계 개선이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 축소로 이어질 경우 유럽 각국은 그 사이에 껴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것. 특히 러시아가 발트3국을 비롯한 옛 소련 국가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나설 때도 워싱턴이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결국 남는 결론은 미국과 나토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모든 나라를 괴롭혀온 악몽이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라는 경고다.

    트럼프 등장 이후 유럽 주요 언론의 오피니언 지면 상당수를 ‘종속변수에 불과한 현실’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차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유럽 안보를 흔들고 있는 변수는 대부분 유럽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그 출발점이다. 냉전 종식 이후 동유럽국가는 물론, 옛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를 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일련의 결정을 백악관이 주도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 그렇게 새로 가입한 국가에는 어김없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계나 지상배치레이더 설치 계획이 뒤따랐다. 나토 회원국 의회에서 대외관계를 오랜 기간 담당해온 한 전직 인사의 말이다.

    “나토 확장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리지 않고 미국이 추진해온 일관된 정책이었다. 언제 다시 일어설지 모르는 러시아를 봉쇄해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야심이 얽혀 있었다. 여기에 새로 가입한 동유럽 나토 회원국의 대(對)러 공포감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이 지역의 군사적 긴장은 하루가 다르게 솟구쳤다. 더 많은 군사력 배치로 우리를 지켜달라는 새 회원국의 요구, 이를 이용한 미국의 공격적 군사력 배치가 맞물렸다. 그 결과가 바로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였다.”

    2014년까지 나토에 가입했거나 가입을 검토하던 주요국 가운데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달랐다. 러시아와 국경을 2295km나 접한 이 나라에서 친러파 대통령이 축출되고 나토 및 유럽연합(EU) 가입 추진이 가시화하자, ‘옛 영광을 되찾고 말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를 병합하는 무리수를 감행한다.

    정작 유럽 안보 전문가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회상하는 부분은 미국과 나토가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구두선(口頭禪)만 반복한 이들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뜯겨나가고 민병대로 위장한 러시아 군대가 국경을 넘는 동안에도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에 의해 증폭된 갈등으로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정작 미국은 구하러 오지 않았다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치명타를 입은 것은 미국 지도력만이 아니었다. EU와 나토의 결속력 역시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무력감이야말로 브렉시트(Brexit)로 상징되는 탈(脫)공동체 움직임의 ‘숨어 있는 1인치’라는 게 유럽 안보 전문가의 공통된 분석이다.

    크로아티아 출신 언론인 토미슬라브 야키치가 11월 28일 ‘지오폴리티컬모니터’에 기고한 글은 트럼프 이후 이러한 자괴감이 한층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고아가 된 유럽(Europe the Orphan)’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 글은 ‘미국이라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유럽은 이제 홀로서기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핵심. 1960년대 당시 ‘미국을 믿지 못하겠다’며 독자 핵무장에 나섰던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50년대 소련과는 다른 ‘우리식 공산주의’를 앞세웠던 요시프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을 거론하면서 ‘다시 ‘유럽의 길’을 말해야 한다’는 공격적인 주장이다.

    한미동맹과 관련한 언급으로 국내에도 상세히 전해진 바 있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기간 내내 나토 회원국 역시 안보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국내총생산(GDP)의 2%를 국방예산으로 지출해야 한다는 합의를 충족하는 나라는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5개국밖에 없다는 것이 핵심 근거였다. 앞서 스웨덴 사례에서 보듯 유럽 각국, 특히 경제적으로 여력이 있는 서유럽과 북유럽 주요국은 이미 다양한 군사력 증강 계획을 공식화하고 있지만, 그 방향이 트럼프가 기대하듯 ‘미국 지도력을 인정하되 방위비만 올려주는’ 식이 될 공산은 커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럽,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에서 벗어나는 유럽이라는 미래가 훨씬 매력적이라는 게 이들 국가의 속내에 가까워 보인다.



    할 말이 없던 이유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나토와 EU로 상징되는 다자기구에서 발을 빼고 각 나라가 홀로서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미국을 빼고 새로운 군사동맹체계를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반복해서 제기된다. 청사진도 전혀 다르다. 전자는 각국의 탈퇴로 이어져 유럽공동체 붕괴로 연결될 공산이 크지만, 후자는 미국을 빼버리고 유럽 국가로만 구성된 새로운 안보기구를 낳을 수도 있다. 특히 새 안보기구와 관련해서는 그간 EU 차원에서 논의해온 공동안보방위정책(CSDP)과 신속대응전투부대(Battlegroup)가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쉽게 말해 ‘어차피 우리 돈을 쓸 거라면 약속을 지키지도 않을 트럼프 따위의 말을 왜 들어야 하나’라는 뜻이다. 국제기구 고위직을 지낸 뒤 스톡홀름의 저명한 군사연구기관에서 임원으로 일하는 한 안보문제 전문가는 “2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흐름이 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어떤 식으로든 준비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만들어진 셈”이라고 말했다.

    물론 여전히 많은 부분이 미지수다. 거꾸로 트럼프 당선인은 ‘힘에 의한 평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며 군사비 확충과 핵전력 현대화 계획을 밝힌 적이 있고, 최근 안보라인에 임명된 인물 다수가 군 출신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한 부분이다. 분명한 것은 워싱턴이 어떻게 움직이든 그에 탄력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는 유럽 각국의 의지 역시 어느 때보다 선명하다는 사실이다. 앞서의 안보문제 전문가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되물었다. 탄핵 정국이 이어지는 서울을 떠올리자 딱히 할 말이 없어 멋쩍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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