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6

2016.12.07

국제

위기를 기회로 만든 피델 카스트로

90세로 타계한 쿠바 정치인…49년 집권, ‘의도된 솔직함‘으로 대중 사로잡아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 kyle@donga.com

    입력2016-12-06 11: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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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1월 8일, 쿠바 땅에 온 내가 처음 본 피델은 아바나에서 첫 번째 승리의 연설을 하고 있었다. 연설은 밤새 계속됐지만 거리를 메운 수천 명의 인파는 떠날 줄을 몰랐다. 어느 순간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어깨에 내려앉아 오랫동안 평화롭게 머물렀다. 청중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비둘기가 아니라도 그는 자석처럼 청중을 끌어당기는 연설가였다.”

    쿠바 정부 기관지 ‘혁명’의 수석 사진기자로 쿠바의 역사적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 로베르토 살라스는 2005년 한국어로 번역된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의 전기에서 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올해 11월 25일 향년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카스트로는 수많은 쿠바인의 마음을 격정적인 정치 연설로 사로잡은 ‘연설의 달인’이었다.

    1959년 1월 1일 낡은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혁명에 성공한 그는 수많은 공개 대중연설과 TV연설 등을 통해 인민에게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공개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한번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된 연설에 쿠바 인민은 몰입했고 열광했다.

    그의 연설장은 인민이 지도자를 직접 경험하고 국가의 중요 정보를 얻는 정치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자신과 쿠바 공산당의 실책도 가감 없이 공개했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의도된 솔직함’은 대중의 지지로 이어졌고 카스트로는 자칫 정치적 위기였을 순간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혁명 이후 정치 생명을 걸고 추진했던 연간 설탕 1000만t 생산에 실패한 사실을 과감하게 공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러분이 내가 솔직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설탕 1000만t 생산에 실패할 것이다. 나는 변죽을 울리지 않고 곧장 질러 말하겠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란 것을 나도 안다. 어쩌면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도 혁명 이래 최악의 경험일지도 모른다.”



    1970년 5월 20일,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한 대중연설을 통해 미국을 비난하던 카스트로는 돌연 이렇게 말하며 인민에게 용서를 구했다. 독재자의 솔직한 고백에 모든 쿠바 인민은 그의 실정을 탓하기보다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리는 데 동참하기로 마음을 모은다. 이 연설은 쿠바 사회주의 경제가 설탕 단작경제를 벗어나는 노력의 시작점이 됐다.



    제한적인 개혁·개방정책에 그쳐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가 1990년대 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전환으로 찾아온 90년대 초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이겨낸 핵심 동력도 역시 최고지도자와 엘리트, 대중을 한자리에서 단결시킨 ‘소통의 정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은 같은 시기 같은 성격의 경제위기를 겪은 북한과 다른 길을 걷게 되는 핵심적인 이유가 됐다.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의 개혁·개방 노선에서 위기를 직감한 카스트로는 또 한 번 특유의 ‘의도된 솔직함’을 활용한다. 동·서독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9년 7월 26일,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산티아고데쿠바 몽카다 병영을 습격한 날을 기념하는 연설을 통해서였다. 그는 소련 매체들이 쿠바에 대한 우호무역을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내용을 비난하는 형식을 빌려 당시까지 소련에 기댄 ‘종속적 발전’이 종언을 고할 수 있음을 인민에게 알렸다.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그해 12월에는 소련의 원조 축소로 찾아온 경제위기를 ‘평화로운 시절의 특별한 시기’라고 명명하고 온 국민이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고 촉구한다.

    “우리는 총체적인 봉쇄기간(혁명 시기 바티스타 정권에 포위됐던 위기)을 ‘전쟁 중의 특별한 시기’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평화로운 시절의 특별한 시기’를 준비해야만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말한다. 소련의 내부 사정 때문에 우리는 극도로 어려운 공급(축소) 상황을 감내해야 한다.”

    카스트로는 1990년 초부터 외국인 관광산업 활성화와 외국인 직접투자, 조인트(joint)벤처 확대 등 제한적인 개방조치를 시행했다. 이후 위기 극복을 위한 인민의 제안을 수렴하고 91년 10월 열린 제4차 공산당대회를 통해 제한적인 개혁·개방정책을 단행했다. 국영기업의 분권화, 자영업 부활, 개인의 달러 보유 및 사용 허용 등의 조치를 단행해 부족한 달러의 유입을 확대했다. 이어 94년에는 각종 시장 개설 등 암시장의 제도화를 통해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붕괴를 막았다.



    집단지도체제로 개인 우상화 막아

    특히 카스트로가 경제개혁의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인민으로부터 수집하는 과정은 가히 극적이다. 쿠바 공산당은 제4차 공산당대회를 앞두고 1990년 3월부터 당원뿐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중 토론회를 열었다. 쿠바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라는 호소문을 돌려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 경제를 회생시킬 제안을 수렴했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은 채택됐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제안은 제외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전 국민이 개혁 과정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시기 김정일의 북한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최고지도자는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발전 노선이 실패했고 그 결과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거나, 알았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최고지도자와 엘리트, 인민의 소통 구조가 경직된 사회였기 때문에 최고지도부는 경제위기로 가장 먼저 한계선상에 놓인 인민의 배고픈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쿠바가 그럭저럭 경제위기를 넘기던 1994년부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최대 300만 명의 대량 아사 사태를 맞이한다.

    쿠바와 북한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의 차이도 서로 다른 대응의 한 원인이다. 쿠바에도 지배 엘리트를 위한 특권과 권력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북한의 ‘수령경제’처럼 국민경제와 독립돼 운영되는, 수령과 엘리트만을 위한 제도적인 특권경제는 없었다. 인민은 굶어 죽어가는 가운데 엘리트만 특권경제로 살아남은 북한과 달리 경제위기의 고통을 최고지도자와 엘리트, 대중이 분담해야 했던 쿠바에서는 권력자도 개방과 개혁에 동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치인 카스트로는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독재자였다. 2008년 2월 행정부 수반인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동생 라울에게 물려줄 때까지 그는 당과 군, 입법부와 행정부 등 국가기관의 최고위직을 모두 차지했다. 쿠바 공산당 제1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혁명군 최고사령관 등을 겸직했다는 점에서 북한의 김씨 3부자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카스트로는 건국 초기부터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바티스타 정권과 맞서 싸운 체 게바라, 동생 라울 등 혁명 동지와 국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발전시켜 체제가 개인 독재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김씨 부자처럼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았다. 북한이 마르크스 레닌 사상에서 주체사상으로, 김일성 사상으로 지배 사상의 퇴행을 거치는 사이 카스트로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영웅인 호세 마르티를 더 앞세웠다.

    카스트로의 1990년대 개혁에는 제한적인 정치개혁도 포함됐다. 제4차 공산당대회의 결정에 따라 92년 헌법이 개정돼 종교적 차별이 금지됐고 직접·비밀선거가 확대됐다. 군부가 경제개혁에 동원됐으며 부패 정치인 숙청 등 공산당 개혁도 단행됐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아들 디아스발라르트의 공금 유용 혐의를 인정하고 원자력위원회 집행위원장 자리에서 쫓아냈다. 공산당 지도부의 세대교체가 시작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주의 형제국 북한과 다른 길

    카스트로 사망 이후 세계적으로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사실 카스트로만큼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지도자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수많은 쿠바 반체제 인사가 투옥과 감금, 고문 등의 고통을 당했다. 카스트로 형제의 독재정치를 피해 지금도 수많은 쿠바인이 고향을 등지고 미국 마이애미 등지로 탈출해 살고 있다. 경제위기를 개혁과 개방으로 넘겼다고 하지만 아직 쿠바는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주민들은 불법적인 2차 경제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일생이 한반도에 의미 있는 것은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북한을 더 잘 볼 수 있는 유용한 비교 대상이라는 점에서다. 필자도 ‘북한과 쿠바의 경제위기와 개혁’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북한 체제의 본질적인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각각 ‘특별한 시기’와 ‘고난의 행군’이라는 유사한 성격의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북한과 쿠바의 서로 다른 양상을 보면서 그 원인인 북한 김씨 일가 독재체제의 ‘소통 부재’와 ‘경제적 불평등’을 진정 이해할 수 있었다.

    소통과 경제적 평등 문제는 2016년 12월 현재 한반도 남쪽에서도 화두다. 출범 이후 4년 내내 국민과 진정한 소통을 거부했던, 아니 진정한 소통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박근혜 정부는 결국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촛불의 바닷속으로 침몰하기 직전의 형국이다. 아둔한 권력을 등에 업고 각종 특혜를 누리던 최순실과 그의 측근들은 앞길이 순탄치 않아 보이는 국가 경제상황 앞에서 불안한 대다수 보통 사람의 평등 의식과 자존감을 심각하게 훼손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석호 기자는 북한 및 남북관계 전문기자로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과 쿠바의 경제위기와 개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정일과 카스트로가 경제위기를 만났을 때’(전략과 문화/ 2008)라는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북한을 아홉 차례, 쿠바를 세 차례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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