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6

2016.12.07

특집 | 2016 겨울 대한민국, 뭣이 중헌디?

“아직 세월호 안에 사람이 있어요”

유가족이 되고 싶은 미수습자 가족, 1000일의 기다림 일기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6-12-06 09: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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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겨울, 촛불은 세상을 바꿨다. 시민의 힘에 밀린 대통령은 임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진퇴를 국회 손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이 내려온다고 그동안 뒤틀린 모든 문제가 단박에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직도 차디찬 바닷속에 갇혀 있는 아이들, 가습기살균제를 쓰다 억울하게 숨을 거둔 이웃들, 그리고 ‘녹차라테’로 뒤덮인 강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하며 ‘먹는 물 공포’에 시달리는 시민들이 우리 곁에 있다. 2016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강력하고 아름다운 시민의 힘으로 바꿔내야 할 과제를 모아봤다. <편집자 주>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다윤이가 거실에 있는 거예요. 제가 너무 놀라서 ‘다윤아, 너 수학여행 안 갔어?’ 그랬더니 웃으면서 ‘어, 나 안 갔어’ 하더라고요. 아이를 확 끌어안고 ‘엄마는 너 수학여행 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 하는데 갑자기 울컥해서…, 그대로, 애 안은 채로 울다가 또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그동안 내가 다윤이 찾으려고 길거리 나가서 피켓 들었던 거,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딸 찾아달라고 사정했던 거, 그게 다 꿈이었나….”

    박은미 씨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얼마 전 꿈에 찾아온 딸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 행복한 꿈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새벽 4시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순간을 떠올리다 박씨는 끝내 울고 말았다.

    그는 2014년 4월 15일 수학여행을 떠났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한 경기 안산시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양 엄마다. 세월호 안에서 마지막까지 엄마를 찾았을 딸을 기다리며,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가겠다는 생각 하나로 950일 넘게 전남 진도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엄마이기도 하다. 박씨 옆에는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양의 엄마 이금희 씨가 있었다. 그의 딸도 다윤이와 같은 날, 같은 배를 탔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9명의 사람

    그날 인천항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에는 승객 304명이 타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신으로나마 뭍에 돌아온 사람은 295명이다. 아직 9명이 차가운 바다, 그 배 안에 머물러 있고 그 가운데 4명은 단원고 학생이다. 딸이 어디 있는지 뻔히 아는데도 건져 올려줄 수 없는 엄마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박씨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던 이씨 역시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그도 얼마 전 박씨와 다를 바 없는 꿈을 꿨다고 했다. 그의 꿈속에서 은화는 “엄마 나 살아왔어. 놀랐지? 놀랐지?” 하면서 활짝 웃었다. 은화가 신난다고 팔짝팔짝 뛰는데 등까지 늘어진 검은 생머리, 늘씬한 키가 2014년 수학여행을 떠나던 그때 모습과 판박이였다고 한다. 이씨도 그만 깜빡 속고 말았다. 그동안 겪어온 모든 고초를 꿈으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행복이 지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두운 팽목항에는 거친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리 딸 사진 봤죠? 정말 예뻐요. 나 안 닮아서 얼마나 예쁜지, 내가 그 아이 보면서 매일 ‘참 예쁘다, 어쩜 이렇게 예쁠까, 대학생 되고 화장하면 더 예쁠 거야’ 했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 딸인데 예쁘고 공부까지 잘 해서 더 고마웠어요.”

    아이는 단원고 전교 1등도 했다고 한다. 눈물이 흐르던 이씨 얼굴은 딸 이야기를 하는 사이 점점 밝아졌고, 마지막엔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에 웃음이 가득 찼다. 은화는 그렇게 생각만 해도 좋은, 늘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는 딸이었다. 아이를 잃은 뒤 혈압이 250까지 치솟고 혈당이 300을 넘나들게 되고도 이렇게 버티는 건, 그 딸을 다시 만날 때까지 쓰러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11월 29일 찾아간 팽목항에는 이들 외에도 두 가족이 더 있었다. 제주에서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려고 가족과 함께 이삿짐을 꾸려 배에 올랐던 권재근 씨의 형 권오복 씨와 단원고 2학년 9반 진윤희 양의 삼촌 김성훈 씨다. 재근 씨는 당시 아내 한윤지 씨, 여섯 살 혁규 군, 다섯 살 지연 양과 동승했다. 이 네 명 가운데 막내딸만 살아남았다. 지연 양은 현장에서 구조된 뒤 식구들을 찾으며 기자들에게 “오빠랑 같이 놀고 있는데 배가 점점 기울었다. 오빠가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내게 입혀주고는 엄마 아빠를 찾아오겠다며 갔는데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후 많은 시민이 한마음으로 지연 양의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4월 23일 시신으로 발견됐고, 아빠와 오빠는 아직 배 안에 있다. 권씨는 “제수씨 시신이 수습됐을 때는 곧 동생과 조카도 찾아 다 같이 장례를 치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기다림이 1000일 가까이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그사이 초등학교 1학년생이 된 지연 양은 막내 고모(권씨 여동생) 집에서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좀 더 커서 가족에게 생긴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됐을 때 부모와 오빠 얘기를 정확히 들려주기 위해서라도 권씨는 팽목항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기억해주세요”

    윤희 양의 삼촌 김성훈 씨가 팽목항에 남아 있는 이유는 또 다르다. 그의 조카는 사고 발생 엿새 만인 4월 22일 시신 상태로나마 뭍에 올라왔다. 김씨는 그때 다른 가족과 함께 이 바다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올라오지 못한 윤희 친구들 생각에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고 한다.

    “은화랑 윤희가 1학년 때 친했거든요. 그렇게 같이 놀던 친구가 여럿 있었어요. 그런데 세월호가 침몰한 뒤 다른 식구들이 아이를 찾아 한 명 한 명 떠나는데도 우리 아이들은 안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같이 슬퍼하던 사람들이 나보다 앞서 떠나고, 우리 아이는 어떻게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그 상태가,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여기 임시로 쳐놓고 생활하던 텐트 벽에 애들 이름을 쭉 적었어요. ‘이 아이들 다 데리고 갈 때까지 같이 있자. 팽목항 떠나지 말자’고 약속을 한 거죠. 그런데 부모는 아이가 나오면 아무래도 데리고 갈 수밖에 없게 되더라고요. 윤희 삼촌만 계속 못 떠난 거죠. ‘애들 다 나올 때까지, 은화 나올 때까지’ 그렇게 말하며 약속 지키다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랑 같이 있게 됐어요.”

    은화 엄마 이씨의 설명이다. 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쓴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는 바로 이에 대한 내용이 있다. 4월 24일 아이를 찾은 2학년 4반 김건우 군 어머니의 증언이다.

    ‘다른 실종자 가족들한테 우리 아들 나와서 간다고 하는데… 미안한 거예요. 우리 아들이 이렇게 나와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기도 하고 그러다 내가 미쳤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아들이 이렇게 나온 것이 감사할 일인가요. 실은 거기(팽목항)서 우리가 마지막이 될까봐 너무 힘들었어요. 나만 남으면 어떡하지. 우리 아들만 못 찾으면 어떡하지…. 죽었어도 좋으니 못 찾는 거보다는 찾아서 몸뚱이라도 찾아 만났으면 좋겠다 이 생각밖에 없었어요. 포기하고 나니까, 나온 것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더라구요. 그래서 짐 챙기면서 그랬어요. ‘하느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돌아와줘서, 아들, 고마워.’ 옆에서 다들 부러워하더라구요. 이게 부러워할 일인지. 그런데 그게 부러워요, 거기에선. 그리고 서로 축하를 해요. 이게 말이 돼요? 그런데 그래요. 그러니 내가 미치겠는 거예요. 내가 왜 이게 감사해요? 도대체 왜? 그런데 감사하다고 하고, 아주 미쳤구나. 뭐가 감사해. 애가 죽어서 나오는데 뭐가 감사할 일이야. 이게 미친 세상이지.’

    그런 날들이었다. 시신으로나마 아이를 만나는 것이 감사한 장소에서 이들 가족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속이 온통 문드러졌다. 다윤이 엄마 박씨는 희귀질환인 신경섬유종증으로 한쪽 청력을 잃었고, 다윤이 아빠는 허리 디스크에 시달린다. 은화 아빠는 얼마 전 부정맥으로 졸도하기도 했다. 수색 상황을 보러 맹골수도 현장에 갔다 배 위에서 넘어진 혁규 큰아버지 권씨 역시 한쪽 팔을 잘 쓰지 못한다. 박씨는 “이런 상황에서는 몸이 비정상인 게 정상 아니냐”고 했다. 고혈압, 당뇨 등을 앓고 있는 이씨는 그런 박씨를 가리키며 “다윤이 어머니는 난치병, 나는 불치병 환자”라고 농을 던졌다.

    그렇게 아이를 찾을 때까지는 몸도 추스를 수 없는 시간이 950일 넘게 흘러가고 있다. 이들 가족이 기자와 만난 날은 정부가 세월호 미수습자 수색을 중단하기로 한 지 2년 하고도 18일째 되는 날이었다. 꼭 2년 전 11월 11일, 정부는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 주재로 세월호 관계장관 회의를 연 뒤 수중수색 종료를 공식 발표했다. 이미 9월쯤부터 해양경찰 관계자가 ‘세월호 실종자 수색 작업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대안으로 인양을 고려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기술적 검토를 하고 있다’고 하는 등 조금씩 ‘플랜B’를 세우던 참이었다. 시신 발견이 뜸해지는데 날이 추워지고 잠수사들의 안전사고도 이어지자 9명의 미수습자를 찾으려 수색을 계속하는 건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주영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은 이때 발표한 담화문에서 ‘아직도 실종자 가족들께서는 차가운 바닷속에 자신의 핏줄을 남겨둔 단장의 비통함을 가슴에 묻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결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수중수색의 종료 요청을 해주셨습니다. 그분들의 가슴 절절한 용단에 죄인의 심정으로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했다. 그 ‘죄인의 심정’으로 정부가 이야기한 것이 선체 인양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다시 2년이 더 흐르도록 배는 여전히 맹골수도 수중에 파묻혀 있다.

    올해 안에 반드시 세월호를 들어 올리겠다고 공언했던 해양수산부는 11월 11일 ‘연내 인양 불가’를 공식 확인했다. 열악한 기상 상태 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럼 다시 날이 풀리고 꽃이 피어날 내년 봄에는 아이들을 찾을 수 있을까. 은화 엄마 이씨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수도는 수심이 깊고 물살이 거세요. 한 달에 두 번 오는 소조기 때 아니면 사실상 작업을 못 하는데, 소조기라고 늘 날씨가 좋은 것도 아니거든요. 풍속, 물살, 작업 여건이 딱 맞는 날이 한 달에 며칠 안 돼요.”



    “맹골수도를 바라봐주세요”

    이씨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왈칵, 그사이 잊고 지낸 옛 기억이 떠올랐다. 우리도 한동안은 날마다 이 얘기를 했었다. 전 국민이 맹골수도의 정조시간과 파도 높이, 수온을 알았고 매일 신문 1면에 해역 상황이 보도됐다. 모든 날씨예보도 진도 날씨로부터 시작하는 날들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 모든 걸 뒤로 미뤄둔 채 2년여를 더 살아왔는데 은화 엄마의 삶은 아직도 그날,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여전히 맹골수도 날씨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인양팀을 응원한다.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바다만 바라보던 바로 그때처럼.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세월호 안에 9명이 아니라 15명, 50명, 100명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2년여 전 그때 다 한마음으로 아파해주셨잖아요. 팽목항으로 달려 내려오고, 같이 울고. 처음엔 우리 아이들 살려달라고, 그 뒤엔 찾아달라고 같이 기도해주셨잖아요. 그 마음을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다윤이 엄마 박씨의 바람이다. ‘어서 아이를 찾아 꼭 한 번 품에 안아보고 따뜻한 데 보내주고 싶다’는 그는 “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이면 그날이 좀 더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11월 23일 경기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는 ‘단원고 4·16 기억교실’이 문을 열었다. 2014년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사용한 교실 10개를 복원한 장소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학생 246명의 손때 묻은 책상과 그들을 추모하는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곳에 은화와 다윤이의 책상은 없다. 아직 미수습 상태인 단원고 학생 남현철 군, 박영인 군 책상도 마찬가지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은 안산과 팽목항 등에 마련된 공식분향소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은화 엄마와 다윤이 엄마 등 남은 가족은 팽목항에 페트병을 잘라 만들어놓은 작은 꽃병에 꽃을 바꿔 꽂으며 하루빨리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그래서 그들은 ‘사망자’가 되고, 부모는 ‘유가족’이 되기를 기도한다.   

    ‘원인을 찾고, 책임자를 찾고, 해결책을 찾는다고 합니다. 우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가족’부터 찾아야 합니다.’

    4·16 기억교실 복도 벽에 붙어 있던 문구다. 아직 세월호 안에는 은화, 다윤이, 현철이, 영인이, 그리고 혁규 등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과 단원고 교사 고창석, 양승진 씨, 일반인 승객 권재근, 이영숙 씨가 남아 있다.  



    세월호 언제 올라올까

    업체, 방법, 절차 등을 놓고 갈등을 거듭하던 세월호 인양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2015년 8월이다. 당시 당국이 예정한 인양 시점은 올해 6월. 그러나 인양 첫 단계인 세월호 뱃머리(선수) 들기부터 기술적·환경적 원인으로 계속 실패하면서 예정일은 수차례 연기됐다. 간신히 이 단계를 넘어선 뒤엔 배 뒷부분(선미) 들기 작업이 다시 난항에 빠져 결국 연내 인양이 무산됐다. 정부는 내년 초는 돼야 세월호 선미를 들어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이후 배를 끄집어내 목포항에 거치하기까지 다시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그 안에서 미수습자를 찾아내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권오복 씨는 “내년 4월이면 진도에서 네 번째 봄을 맞게 된다. 너무 늦기 전에 동생과 조카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금희 씨는 “다 같이 맹골수도를 바라봐달라.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도 거세지 않길, 그 안에서 배를 끌어올리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우리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길 한마음으로 기도해주시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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