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3

2016.11.16

특집 | 트럼프 쇼크

진짜 민심 읽지 못한 주류 정치의 패배

교육 양극화, 빈곤의 대물림에 분노한 백인들 트럼프에 몰표…민주주의 작동 방식 재검토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 kyle@donga.com

    입력2016-11-11 16: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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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8일 미국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할 것이라고 기자에게 가장 진지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김창준(77)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이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살면서 한국을 자주 오가는 그는 10월 20일 동아일보 국제부 주최 오찬 모임에 연사로 나와 “흑인 대통령이  8년 동안 했다. 이제 여성에게 넘긴다고? ‘앵그리 화이트 맨’(분노한 백인 남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또 “백인 남성들은 아내에게 ‘클린턴을 찍겠다’고 하고는 몰래 트럼프를 찍을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며 웃은 날, 당일 각종 여론조사 평균치를 제공하는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의 두 후보 지지율은 힐러리 클린턴 48.5% 대 트럼프 42.1%였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은 “한국에서는 트럼프가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미국 현지 분위기는 다르다”며 “한국 언론이 CNN만 봐서는 안 된다. CNN은 트럼프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매체라 정확한 여론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뚜껑이 열린 대선 결과는 그의 말이 맞았음을 증명했다. 당일까지도 클린턴의 승리를 점치던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타임스(NYT)’ 등 이른바 미국 주요 언론은 죄다 반성문을 써야 했다. 초지일관 트럼프의 우세를 전망하던 ‘LA타임스’만이 선거 후 ‘트럼프 경도 언론’이라는 누명을 벗었다.



    그림의 떡이 된 ‘기회의 평등’

    미국 언론이 줄줄이 헛다리를 짚은 것은 꼭 언론 잘못만은 아니다. 여느 선거 때보다 유권자의 ‘선호위장’이 강했던 이번 선거에서 전통적인 여론조사 방식으로는 ‘속내를 꼭꼭 숨긴’ 트럼프 지지자의 목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 구성에 대한 유권자의 여론이 언론을 통해 정치 과정에 반영되는 미국 민주주의의 고전적인 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을 확인한 것은 이번 선거가 미국 민주주의에 울린 경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언론들이 직접 쓴 반성문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상당하다. 마거릿 설리번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는 11월 9일 ‘트럼프의 승리를 원하지 않은 언론은 고개를 돌렸다’는 칼럼을 통해 “수많은 유권자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지만 언론인은 대부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해 자체를 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그는 “다수 언론인이 대학을 나온 도시 출신으로 진보성향을 띠고 있고 뉴욕이나 수도 워싱턴, (캘리포니아 등) 서부에 살면서 공화당 성향의 중부 지방에는 인터뷰를 위해 며칠 머무를 뿐”이라고도 했다. 자동차공장 노동자나 광부 등 자신과 전혀 다른 계층의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그들이 지지하는 트럼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번 대선 결과를 토대로 미국인은 자신들이 ‘예외적’이라고 주장하던 세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인 ‘기회가 평등한 나라’라는 신화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저학력, 저소득층 백인의 분노가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트럼프를 백악관으로 보낸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CNN 출구조사 결과 대학 졸업장이 없는 백인 남성의 72%, 대학 졸업 미만 백인 여성의 62%가 트럼프에게 몰표를 던졌다. 앵그리 화이트의 반란이 확인된 셈이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 8년 동안 미국은 부시 행정부 마지막 해에 터진 2008년 경제위기를 극복한 듯 보였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부익부 빈익빈, 즉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한계에 몰린 이들은 흑인과 히스패닉 등 저학력 유색인종이었지만, 이제 빈곤의 외연이 백인에게도 확대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경제적 약자 대열에 합류하면 자식도 빈곤을 물려받는, 그래서 ‘미국 예외주의’가 약속한 기회의 평등이 이젠 그림의 떡이 된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 정치학자인 로버트 퍼트넘(71)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해 3월 출간한 ‘우리 아이들 : 빈부격차는 어떻게 미래 세대를 파괴하는가’에서 어려서 고아가 된 로라(27)와 소피아(21) 자매를 소개했다. 창녀에 마약 중독자였던 어머니는 자매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행방을 알 수 없다.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죽자 자매는 고립무원 상태에 빠져들었다. 자매의 비극적인 삶을 소개한 이유는 미국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부모를 둔 자녀가 갈수록 기회의 사다리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급기야 경제 하층민으로 전락해가는 모습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풍부한 사례와 통계수치를 들어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지고 있는 교육 양극화의 민낯을 고발했다.



    여성 대통령 탄생에 인색한 미국인

    2000년 ‘나 홀로 볼링’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인의 파편화돼가는 삶에 경종을 울린 바 있는 퍼트넘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일 때부터 멘토 노릇을 해왔다. 힐러리와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폴 라이언 하원의원도 그의 대화 상대였다. 하지만 미국의 빈부격차 현상은 현실 정치의 틀 속에서 해결되지 못했고, 급기야 ‘트럼프 돌풍’의 한 원인이 됐다.

    개인적으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트럼프 가족이 백악관에 입성하게 된 이번 결과를 여러 면에서 수긍하기 어렵다. 대선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입만 벌리면 터져 나오는 막말과 여성 성추문 전력, 부동산 재벌이 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탈세 의혹, 타운홀 미팅 방식으로 치른 2차 TV토론에서 드러난 타인에 대한 무배려,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질서 유지에 대한 단순 무식함 등이 그 이유다.

    하지만 그런 후보가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고 주류 언론의 거친 저항을 거쳐 유권자의 표로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 민주주의가 작동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총기 사망사고가 터지는 미국이지만, 이번 선거과정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인한 대규모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3번의 TV토론에서 모두 판정승을 거두고도 본선에서 패한 힐러리가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직후 트럼프에게 전화를 걸어 패배를 시인하는 모습 역시 ‘다수결 원칙’을 생명으로 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인이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에 인색한 이유는 시간을 두고 분석해볼 일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시작해 뉴욕 주 연방 상원의원, 오바마 정부에서 국무부 장관을 지낸 그를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부부 대통령의 신기원 앞에서 멈춰 세운 이유는 오로지 상대가 트럼프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류 언론의 해석대로 그가 고장 난 워싱턴 주류 정치의 상징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백인 여성이 흑인 남성보다 더 늦게 참정권을 인정받은 본질적인 성적 편견의 역사가 미국 정치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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