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3

2016.11.16

정치

사과하지만 나도 억울하다?

박근혜 대통령, 잘못 떠넘기기 급급하던 두 차례 대국민사과, 권력에 대한 집착은 생존의 몸부림

  •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입력2016-11-11 16: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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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국이 혼란스럽다. 최순실 씨의 국정농단 사태로 촉발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날로 증폭하고 있다. 한 자릿수까지 추락한 박 대통령 지지율과 각계각층의 시국선언, 그리고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 등이 이를 방증한다. 박 대통령은 두 차례 대국민사과를 했지만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먼저 10월 25일, 사전 녹화방송 형식으로 진행된 90초 분량의 1차 사과는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처음으로 최씨의 국정 개입을 일정 부분 인정했지만, 형식적 대응에 불과할 뿐 적극적인 사과라고 볼 수 없었다. 이에 국민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왕’ 제대로 보필 못 한 간신들의 잘못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열흘 만인 11월 4일 추가로 대국민사과를 했다. 두 번째 대국민사과는 9분 10초 분량으로 처음 90초에 비하면 5배 이상 길었다. 또한 사전 녹화가 아닌 생방송으로 진행됐으며, 방송사에 미리 원고를 배포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표정과 말투에서 약간의 변화가 감지됐다. 사과문 낭독 시 잠시 울먹이는 등 비장함과 진솔함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비쳤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감정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감정의 깊이가 그리 깊지 못했다는 뜻이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섰다 괴한에게 커터로 얼굴이 베이는 피습을 당했을 때도 수술 후 처음 한 말이 “대전은요?”였다거나, 영애 시절 부친의 서거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휴전선 상황을 물었다는 일화 등을 통해 박 대통령의 ‘감정 컨트롤’ 능력은 익히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 스스로도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런 태도가 필요할까. 사과문에 “다시 한 번 저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국민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표정과 태도에 감정이 좀 더 묻어났어야 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때 현재 갖고 있는 마음에 따라 표정과 태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어쨌든 죄송합니다” “결과적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같은 짤막한 말로 상대방에게 마지못해 사과하는 것임을 내비치고, 또 어떤 사람은 여러 이유와 변명을 늘어놓으며 ‘미안하긴 하지만 나도 억울하다’는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 어떤 사람은 표현이 서툴고 논리적이지 못해도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과연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용서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까.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상대방의 손해와 상처에 관심을 기울일 뿐 변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분노가 수그러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 대통령이 두 번에 걸쳐 사과했음에도 민심이 수습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바꿔 말하면 박 대통령은 자신을 전제주의 시대 ‘왕’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백성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는 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왕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그 책임은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고 왕의 마음을 현혹한 신하들에게 있다고 믿는 셈이다.



    가족 교류 끊고 최순실 ‘이상화’한 대가

    사과문에 등장하는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돼야만 한다”는 문구는, 그보다 앞서 나온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라는 말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이는 결국 최순실 게이트는 특정 개인의 잘못이고 자신은 이번에야 그 잘못을 인지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것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 식의 표현은 자신은 잘못이 없고 모든 책임이 최씨에게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그 부분은 사과하겠다’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박 대통령은 현재 ‘합리화(rationalization)’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다. 합리화는 빈번히 사용되는 정신 방어기제다. 정당화할 수 없는 행동이나 충동에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그럴듯한 설명이나 이유를 갖다 대는 행동을 뜻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상황을 받아들이다 보니 남들은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에 대해서도 결코 거짓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이다.

    또 사과문에는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는 곧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해 K스포츠재단과 사단법인 미르의 설립을 추진했다’는 변명으로 들린다. 나아가 ‘의도가 좋으니 나에게는 잘못이 없고 제발 사정을 좀 봐달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민은 대통령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또한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 오랜 인연을 갖고 있던 최순실 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다”는 내용 역시 합리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나도 사람이고 더군다나 혼자 살면서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최순실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는 항변인 것.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얘기다. 하지만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되는 순간 공과 사를 구분해 최씨를 멀리 했어야 한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다.

    사과문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내용은 “청와대에 입성한 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봐 가족과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냈다”는 부분이다. 가족이 혹시 대통령인 자신을 등에 업고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돼 아예 가족과도 교류를 끊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이야말로 국민이 가장 실망하는 부분이다. ‘아니! 친인척 비리를 막고자 가족과도 왕래를 끊은 모진 사람이, 혹은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고자 한 사람이 어떻게 그저 지인일 뿐인 최씨를 옆에 두고 그리 믿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최씨는 박 대통령에게 가족보다 더 중요한 존재란 말인가’ 하는 허탈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박 대통령은 최순실 씨를 ‘이상화(idealization)’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화란 한 개인을 비현실적으로 과장해 그에게 전적인 신뢰와 존경, 사랑 등을 쏟는 행동을 뜻한다. 박 대통령을 누구보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던 국민이라면 박 대통령이 국정농단 혐의를 받는 사람 따위에게 푹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화가 치밀 것이다. 더군다나 박 대통령이 최태민 씨에 이어 그의 딸에게까지 이상화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대를 이은 이상화’에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편 박 대통령은 사이비 종교 문제나 청와대에서 굿을 벌였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일체 부인했다.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박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박 대통령의 말대로 뜬소문일 뿐이라면 대통령의 정신건강 상태나 현실 판단 능력은 ‘그나마 다행’인 축에 속한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은 교주를 ‘내재화(introjection)’하기 때문이다.

    내재화란 상대방의 모든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현상인데, 이는 원시적 형태의 동일시이자 병적인 경우가 많다. 세간에 떠도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0명 인신공양설’은 사이비 교주의 교리를 내재화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는 내재화 가능성이 극히 낮다. 만약 박 대통령이 최씨를 교주로 삼고 그를 내재화했다면 이미 심리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극도의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졌을 테다. 오히려 대통령직을 자진 사퇴하고, 최씨와 함께 처벌을 받겠다거나 최씨가 아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필자 소견으로는 박 대통령은 적어도 사이비 종교에는 빠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족 대신 특정 지인에게 너무 많은 부분을 의지한 나머지 ‘인의 장막’에 갇혀 농락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측근들이 비공식적 인물이었기에 과거 환관정치와 비슷한 형태이거나 오히려 한 단계 퇴행한 ‘그림자 정치’였다고 볼 수 있다.



    생존본능과 같은 권력 집착

    무엇보다 이번 사과문의 백미는 박 대통령의 여전한 권력 의지다. “국민께서 맡겨주신 책임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 각계의 언론인들과 종교 지도자분들, 여야 대표님들과 자주 소통하면서 국민 여러분과 국회의 요구를 더욱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는 문장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는 국정혼란이나 공백에 대한 염려를 앞세워 대통령 임기를 끝까지 채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사과문 낭독 이후 지금까지 헌법이 명시한 국무총리의 ‘내각통할’만 강조할 뿐, ‘2선 후퇴’ ‘권력 이양’ 등에 대한 견해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야 3당은 박 대통령이 권력 집착을 버리지 않는 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파문에 따른 국정 공백과 갈등은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권력 의지는 뒤집어 말하면 ‘생존욕구’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전부 내려놓았을 때 느낄 상실감과 두려움이 몹시 클 것으로 보인다.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최측근이 전부 잘려나간 상태에서 향후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이 오히려 권력 집착을 더욱 부채질했을 공산이 크다. 그렇기에 현재 박 대통령이 취하고 있는 정치적 행보는 생존을 위한 당연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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