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3

2016.11.16

커버스토리

광장의 함성이 대선 승리 보장 못 해

87년 6월 항쟁 승리하고도 12월 대선 패배…‘1盧3金’ 구도 재현 가능성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6-11-11 16: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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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혹은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11월 1일부터 3일까지 이 같은 질문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 10명 가운데 9명은 ‘잘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뿐 아니라, 박 대통령을 배출한 새누리당에 대한 국민 여론도 크게 나빠졌다. 같은 기간 한국갤럽 조사에서 새누리당 정당 지지율은 18%에 그쳐 31%를 기록한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지지율을 크게 밑돌았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11월 3, 4일 양일간 실시한 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잘못한다’는 의견이 82.8%였고, ‘잘한다’는 의견은 12.7%에 그쳤다. 정당 지지율 역시 민주당 32.8%, 새누리당 23.1%, 국민의당 14.2% 순이었다.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야 차기주자 지지율에서는 야권 주자의 지지율 우위가 뚜렷했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20.7%로 1위를 기록하며 18.6% 지지율에 그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따돌렸고,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가 10.9%로 3위를 기록했다.

    여권 차기주자는 대부분 한 자릿수의 저조한 지지율에 머물러 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유승민 의원이 3.9%로 새누리당 당적을 가진 차기주자 가운데 공동 1위를 기록했고 김무성 전 대표(2.8%), 남경필 경기도지사(1.9%), 홍준표 경남도지사(1.5%), 원희룡 제주도지사(0.5%) 순이었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속절없이 무너진 콘크리트 지지율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국민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은 10월 이후. 그 전까지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20% 후반을 유지했고, 두 달 전까지만 해도 30%를 상회했다. 특히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한 이후에도 박 대통령 지지율은 한동안 30%를 견고하게 유지해 ‘콘크리트 지지층’을 실감케 했다. 그러나 4년 가까이 30%대를 유지해온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보름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국민이 인내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사상 초유의 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만일 내일 당장 대통령선거(대선)를 치른다면 대통령에 대한 국민 여론, 정당 지지율, 차기주자 선호도 등 모든 면에서 야권 후보의 승리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내일 당장 대선을 치를 가능성은 없다. 일부 국민이 요구하는 것처럼 ‘대통령 하야’가 현실화하더라도 대선은 최소 두 달 가까이 지난 뒤에야 치를 수 있다.

    10월 31일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6월 항쟁은 성공했으나 12월 대선에서 패배한 1987년 경험을 잘 기억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 원내대표의 이 같은 언급은 과거 그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 우 원내대표는 87년 6월 항쟁을 이끌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기 부의장 출신. 특히 그는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된,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목숨을 잃은 이한열 열사의 모교인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당시 국민적 구호였던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은 6·29선언을 통해 현실화됐다. 그러나 직선제 개헌 이후 치른 12월 대선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兩金)이 분열하고 당시 공화당 김종필 후보까지 뛰어들면서 ‘1노(盧)3김(金)’의 4자 구도가 됐고, 결국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집권에 성공했다. 우 원내대표가 ‘6월 항쟁에서 승리하고도 12월 대선에서 패한 과거 경험’을 상기한 것은 지금의 정치 지형이 당시 상황과 유사하게 흘러갈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정권교체다.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정권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선거로 (정권을) 심판하고, 선거로 희망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고 이것이 민주당의 과제다. 광장에서 싸우는 방식이 있고, 제도권에서 싸우는 방식이 있다. 우리는 제도권 안에서 싸워야 하고 그것이 민주당의 책무다.”

    11월 현재 각종 여론조사 지표만 보면 분명 야권과 야권 차기주자에게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선거는 여론조사 결과와 다르다. 근본적인 차이는 여론조사는 응답자가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선거는 투표한 국민이 당락을 가른다는 것이다. 11월 8일 미국 대선 직전까지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막상 투표함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달랐다.

    또 다른 차이는 여론조사 설문 문항과 실제 투표용지에 적히는 후보자의 선택지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대선 관련 여론조사는 여야에서 소위 잠룡으로 분류되는 인사를 망라해 지지 여부를 묻는다. 그러나 대선은 각 당 경선을 거친 후보, 또는 무소속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 등록을 마친 후보만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 각 당의 경선 결과에 따라, 또는 본선 진출 여부에 따라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대 총선 정당 득표율에 담긴 함의

    1987년 12월 복학생 신분으로 대선을 치른 한 정치권 인사는 “아무리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아도 결국 선택지를 만드는 것은 기성 정치인”이라며 “(87년 대선 때)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대학생들이 열심히 뛰었지만 양김의 대권 욕심 앞에 학생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87년 대선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뛴 경험이 있는 한 인사도 “6월 항쟁으로 표출된 국민적 에너지가 양김의 분열로 양분되면서 제도적 정권교체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정치권, 특히 야권 일각에서는 1987년 대선 당시 양김의 분열이 다음 대선 때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20대 총선의 정당 득표율이 87년 13대 대선후보 득표율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된 이유로 거론된다. 두 선거의 득표율을 비교해보면 새누리당(34%)과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37%)의 득표율이 비슷하고, 국민의당(27%)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28%), 민주당(26%)은 평화민주당(평민당) 김대중 후보(27%), 정의당(7%)은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8%)의 득표율과 유사하다. 즉 1노3김 구도로 치른 13대 대선처럼 다음 대선에 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이 각각 대선후보를 내고, 여권에서 35% 이상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후보를 내세우면 결과를 장담키 어렵다는 것.

    박 대통령에 대한 강한 국민적 거부감, 그리고 박 대통령을 배출한 새누리당의 책임론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재기가 가능할까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국민적 분노가 다음 대선 결과에 그대로 반영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최순실 게이트가 국민의 눈과 귀를 장악한 현 여론조사 결과에는 한국적 ‘샤이 트럼프’ 현상이 숨겨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샤이 트럼프 현상이란 트럼프 대선후보를 지지하기는 하지만 남이 알면 창피하다고 여겨 여론조사 때 속내를 감췄다 실제 투표장에선 트럼프에게 투표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트럼프의 대역전극을 설명하는 용어다.

    미 대선의 샤이 트럼프 현상처럼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게 우호적인 여권 지지층 일부가 사회 전반의 거센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여론조사 때 속내를 감췄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여러 과학적 기법을 동원해 실제 민심에 근접한 조사 결과를 얻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응답자가 속내를 감추면 그것까지 찾아내 조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론조사 결과는 조사 시점의 결과를 의미한다. 그 결과가 다음 주 그다음 주까지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며 “현재 박 대통령 지지율과 새누리당 지지율은 밀접하게 연동돼 있다. 대통령에게 화가 난 국민이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에게도 화풀이를 하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앞으로 검찰 수사를 통해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단죄가 끝나고 대통령의 거취 문제가 정리되면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선거 전문가들은 “선거는 과거에 대한 심판적 성격과 함께 미래에 대한 선택적 의미가 강하다”고 말한다.



    샤이 트럼프 현상, 한국에는 없을까

    1987년 6월 항쟁 당시 거리를 누비며 ‘호헌 철폐’ ‘군정 종식’을 외치던 국민 가운데 상당수는 그해 12월 투표장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4명의 이름이 적힌 기표용지를 들고 김영삼과 김대중 두 후보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지 적잖이 고민해야 했지만, 한국 보수층은 당시 급격한 변화에 따른 무질서를 우려해 노태우 후보에게 한 표를 던졌다. 87년 당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한 인사의 회고.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룬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지만 야당으로 급격하게 권력이 넘어가면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져들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딱히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안정 속 개혁’을 하겠다는 노태우 후보에게 한 표를 줬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국민적 열망은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월 항쟁이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그러나 광장의 함성이 곧 제도권의 변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987년 12월 대선처럼 평소 침묵하다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침묵하는 다수’가 대한민국의 변화를 주도해왔다고 할 수 있다.

    최정묵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부소장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하는 등 국내외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국민적 분노가 불안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있다”며 “그렇게 되면 보수 진영에서 ‘안정’을 바라는 국민 여론을 파고들 여지가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단기간에 곤두박질한 박 대통령 지지율에서 알 수 있듯, 여론은 언제든 계기가 주어지면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변적 속성을 지닌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크고, 지지율이 높은 대선주자가 많아 야권이 유리해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된 야권의 현주소는 유리한 조건이 곧 유리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1987년 대선 상황을 연상케 한다. 과연 11월 광장으로 나온 국민적 분노를 야권이 내년 대선에서 제도권 안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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