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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엔 신세대 군기 살아 있었다

총기 난사 아비규환 속 의연한 대응 … 매도보다는 객관적 비판 ‘군 사기’ 올려줘야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GP엔 신세대 군기 살아 있었다

GP엔 신세대 군기 살아 있었다

육군수도병원에 마련된 합동분양소를 찾아 희생자들의 영전에 참배하는 장병들과 희생자 차유철 상병의 유가족(왼쪽).

한국 청소년대표 축구팀이 브라질에 2대 0으로 패배해 세계청소년축구대회 16강 진출이 좌절된 6월19일 새벽 2시30분쯤 경기도 연천군 28사단 81연대 관할 GP(Guard Post)에서 일어난 김동민 일병의 총기 난사 사건은 많은 국민을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해 다수 언론은 신세대 장병에 대한 우리 군의 관리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과연 이러한 비판은 옳은 것일까.

GP 소대는 20대 중반의 소초장과 20대 초반의 병사들로 구성된 그야말로 신세대 집단이다. 다른 신세대는 GP 생활을 건실히 해내고 있는데, 유독 김 일병만 견디지 못하고 사고를 일으켰다. 김 일병에게 총격을 받은 신세대 장병들의 대다수는 의연히 제 소임을 수행했다. 김 일병 사건을 조목조목 재구성해보면 신세대에게서는 실망 이상으로 대견함이 발견된다.

비무장지대(DMZ) 안에 있는 GP는 웬만한 폭격엔 끄떡도 하지 않는 철옹성이다. GP는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을 택해 지어졌는데 그 주위에 지뢰와 부비트랩·크레모아 등이 촘촘히 설치돼 있어, 적은 여간한 희생을 치르지 않고는 점령할 수가 없다. 때문에 GP의 야간경계 근무자는 안전지대인 GP 옥상의 전·후방 초소에서 근무를 한다.

장병 대다수 소임 수행 대견함

GP에서 야간경계 근무를 나가는 병사들은 상황실에서 25발의 탄약을 넣은 탄창 3개와 수류탄 한 발이 담긴 통을 지급받는다. 이때 탄창 한 개는 소총에 꽂고 두 개는 탄띠 주머니에 넣으며, 수류탄 통은 탄띠와 연결된 X밴드에 매단다.



GP의 야간경계 근무는 한 조가 한 초소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거나, 전반야(前半夜)와 후반야로 나눠 자정 무렵 한 번 교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GP에 따라서는 더 자주 교대하기도 하는데, 사고가 일어난 GP가 그런 경우였다. 사고를 일으킨 김 일병은 이병삼 상병과 후방초소에서 자정부터 새벽 2시30분까지 경계 근무를 하게 돼 있었다.

이때 후번 근무자를 깨워 내보내는 일은 상황실을 지키고 있는 상황병이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서든 경계 근무자는 초소를 이탈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대 시간이 지났는데도 후번 근무자가 오지 않으면 경계를 서던 병사는 자리를 뜨지 말고 계속해서 근무를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제때에 교대해주지 못한 후번 근무자에 대한 징계는 경계 임무가 끝난 뒤 이뤄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GP에서는 경계 근무를 서던 병사가 내무실에 들어가 후번 근무자를 깨우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는 육군 규정 위반이다. 이날 후번 근무자를 깨우는 일은 김 일병이 맡기로 돼 있었다.

GP엔 신세대 군기 살아 있었다

사건 현장 상황도와 사고가 난 내무실의 사망자 발견 위치.

때문에 2시30분쯤 김 일병이 “다음 사람을 깨우러 간다”고 했을 때 이 상병은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김 일병은 탄창이 꽂힌 소총은 초소에 두고 GP로 갔다. 하지만 그의 탄띠에는 두 개의 탄창과 수류탄 통이 달려 있었다. GP 내부 구조를 손금 보듯이 꿰고 있는 김 일병은 내무실로 들어가 입구 옆쪽에 있는 총기거치대에서 소총을 뽑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 총은 통신병인 정은총 상병의 K-1 소총이었다. 보병대원은 개머리판이 접히는 K-2 소총을 사용하나, 무거운 무전기를 다루는 통신병은 개머리판이 없는 K-1 소총을 사용한다. 그러나 K-1과 K-2는 같은 탄창을 사용하므로 김 일병은 K-1에 갖고 있던 탄창을 삽입하고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켰다. 이렇게 하면 ‘철컥’ 하고 탄창 맨 위의 총알이 약실에 장전돼,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K-1 소총은 첫 번째 총알을 장전하지 못했다. 김 일병이 다시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키자 장전 안 된 총알이 탄피 구멍으로 튀어나오고, ‘철컥’ 소리와 함께 두 번째 총알이 장전되었다. 김 일병은 바닥에 떨어진 총알을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자동 사격이 가능하도록 K-1 소총의 조정간을 ‘연발’로 맞춰놓았다. 그리고 수류탄 통을 감아놓은 테이프를 풀어 수류탄을 꺼내 방탄복 왼쪽 주머니에 넣고 빈 통과 테이프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김 일병은 이 행동을 하는 데 5분 이상 걸린 것으로 보인다. 불과 1분이면 끝낼 수 있는 행동을 5분 이상 했다는 것은 행동을 개시하기에 앞서 망설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김 일병이 경계 근무를 서고 있을 때 소대원 중 19명이 체력단련장에서 TV로 한국 대 브라질 축구 경기를 봤다. 술은 없었는데, 한국이 골을 내주자 일부 병사들은 졌다며 내무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는 등 분위기는 매우 자유로웠다고 한다.

새벽 1시 축구가 끝나자 끝까지 지켜본 12명도 내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김 일병이 화장실에 있을 때 GP장인 김종명 중위(학군 41기)는 체력단련장에 남아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다).

김 중위는 날이 밝으면 전역 대기를 위해 GP를 떠날 사람이었다. 6월 말 전역 예정인 그를 위해 병사들은 15일, 1인당 4000~5000원을 걷어서 마련한 30만원으로 음료수와 과자를 사 송별회를 마련했다. 그리고 17일에는 사단 수색대대 출신인 이인성 중위(학군 42기)가 후임 GP장으로 와 있었다.

상황병이 후번 근무자 깨우는 게 원칙

그러니까 이 중위는 아직 소대원의 이름과 얼굴을 다 익히기도 힘든 둘째 날 밤을 보내다 사고를 당한 것이 된다. 이 중위는 상황실에서 상황병·관측병·TOD 운용병과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취사장에는 취사병 조정웅 상병이 있었다(조 상병이 취사장에 있었던 이유도 그의 사망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GP엔 신세대 군기 살아 있었다

개머리판이 접히는 K-2 소총(위). 개머리판이 없는 K-1 소총.

이런 상황에서 김 일병은 화장실을 나와 바로 곁에 있는 내무실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탄복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안전핀을 뽑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바로 옆 침상을 향해 수류탄을 던져넣었다.

수류탄은 자고 있던 박의원 상병의 배 부근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곳은 박 상병의 잠자리가 아니었다. 박 상병은 건너편 침상이 제자리인데, 이날은 잠자리를 바꿔 잠이 들었다. 수류탄은 요란한 폭음을 내며 터지면서 박 상병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이 폭음을 GP 후방에 있는 GOP의 중대장도 들었다. 그는 즉각 대대본부에 이를 알렸는데, 이때 시각이 2시36분이었다.

이 폭음으로 내무실에서 자던 병사들이 깨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들은 “불 켜” “침착해” 등을 외치며 모포와 침낭 등으로 부상자와 사망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김 일병은 이 수선스런 소리를 들으며 어둠이 깔린 복도에 숨어 있었다. 이때 GOP 대대의 정오봉 대위가 GP 상황실로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상황병 지상록 일병은 “적으로부터 총격이 있었다”고 대답했는데, 이때 시각이 2시38분이었다.

그 직후 체력단련장에 있던 GP장 김 중위가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밖으로 나오다 복도에 숨어 있던 김 일병한테서 총알 세례를 받고 쓰러졌다. 이어 김 일병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황실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상황실의 이 중위도 상황을 파악하려고 문 밖으로 나오다 김 일병이 김 중위를 향해 쏘는 총소리를 듣고 잽싸게 문을 닫았다.

그 순간 상황실 쪽으로 달려온 김 일병이 총을 쐈으나 피해는 없었다. 이 중위는 문을 닫으면서 상황실에서 나간 불빛을 통해 우리 군복을 입은 이가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 이 사격으로 인해 수런거리던 내무실이 조용해지며 숨 막히는 정적이 밀려왔다. 1, 2분에 불과한 침묵이었지만 GP 안의 장병들에겐 매우 긴 시간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내무실 총기거치대의 총에는 실탄이 없다. 실탄은 상황실에 있다. 병사들은 야간경계 근무를 나갈 때 상황실에서 실탄과 수류탄을 받아 나간다(김 일병도 이곳에서 탄창과 수류탄을 수령해 야간경계 근무를 나갔다). 또 상황실에는 총도 있으므로 김 일병은 이곳을 제압하지 않고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용기가 없었는지 김 일병은 상황실을 부수고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인기척이 있던 취사장 쪽으로 이동해 문틈으로 보이는 다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조정웅 상병이 신음을 하고 쓰러지자 그는 정조준 사격을 했는데 더 이상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탄창에는 다섯 발이 남아 있었지만 기능 고장으로 장전되지 않았던 것.

김 일병은 탄창을 뽑아내고 새 탄창을 꽂아 조 상병을 쏴 절명케 했다. 그리고 내무실 입구로 총부리를 들이밀고 실탄이 다 떨어질 때까지 무작정 난사했다(보지도 않고 쏘았다). 이때 내무실 입구에서 ‘때를 기다리던’ 차유철 상병 등이 즉사했다(내무실에서는 수류탄 폭발로는 박 상병 등 2명이, K-1 사격으로는 차 상병 등 4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GP는 또다시 숨 막히는 정적에 빠져들었다. 5분여가 흘렀을까. 탄약과 실탄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김 일병은 계단을 통해 GP 옥상으로 올라가 제 위치인 후방초소가 아닌 전방초소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강찬 상병과 임창용 일병이 있었다. 폭음으로 예민해진 이 상병이 어둠 속에 나타난 김 일병을 주시하자, 김 일병은 사격 자세를 취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실탄이 떨어진 총이라 총알이 나가지 않았다.

김 일병이 범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 상병은 김 일병이 폭음으로 예민해져서 그렇게 행동한 것으로 생각하고 “너 여기 왜 왔느냐”고 물었다. 김 일병은 “이병삼 상병이 가 있으라고 해서 왔다”고 대답했다. 이 상병이 “빨리 네 자리로 가라”고 하자 김 일병은 후방초소로 돌아갔다.

후방초소로 돌아온 김 일병은 K-1 소총을 내려놓고 탄창이 꽂혀 있는 자기 총을 들었다. 폭음으로 긴장하고 있던 이병삼 상병은 김 일병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김 일병은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 탄창이 꽂힌 자기 총으로 이 상병 등을 쏘는 행위는 하지 않고 경계 근무를 섰다.

그로부터 4분여가 지난 2시50분쯤 상황실에 있던 무기로 무장한 이 중위가 두 명의 병사를 대동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수라장이 된 내무실을 둘러본 그는 움츠러든 병사들에게 ‘즉각 전투태세’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고 판단됐으므로 병사들은 반바지와 팬티 차림 그대로 총을 들고 상황실로 달려가 실탄을 받아 각자의 방어 위치로 달려갔다.

병사들 “불 켜” “침착해”

이때 내무실에는 K-1 소총의 임자인 정은총 상병이 유일하게 군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정 상병은 자신의 총이 없어진 것을 알았으나, 상황이 급박한 만큼 주인 잃은 총을 들고 방어 위치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사방은 더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적군의 움직임이 없자, 이 중위는 우리 군복을 입은 이가 총을 쏜 것을 기억해 옆에 있던 병사로 하여금 군복을 입은 병사만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전방초소와 후방초소에 있던 네 명의 경계병과 정은총 상병이 불려왔다. 이 중위는 이들에게 총기와 수류탄을 내놓게 한 뒤 이들의 군복과 오른손에 코를 갖다대고 화약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범인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되자 다섯 명을 관측장교 방에 가두고 두 명의 무장 병사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졸지에 무장해제를 당하고 범인으로 의심받게 되자 네 명의 병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김 일병을 의심했다. 이강찬 상병은 “너 아까 어디 갔다가 우리 초소로 왔어”라고 물었고, 이병삼 상병은 “네가 아까 들고 온 총은 누구 것이야”고 물었다. 자기 총을 못 찾은 정은총 상병이 단번에 그 말을 알아듣고 “네가 왜 내 총을 갖고 갔어”라고 물었다. 임창용 일병도 김 일병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로 인해 기가 꺾인 김 일병은 “내가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다. 그 순간 네 명의 병사가 김 일병의 주머니를 뒤지자 수류탄 안전핀과 총알 한 발이 나왔다. 증거를 확보한 병사들은 문을 두드리며 “범인을 잡았다”고 소리쳤다. 문을 연 이 중위는 이들이 내놓은 안전핀과 총알을 보며 김 일병에게서 “범행을 했다”는 자백을 받고, 즉각 병사들로 하여금 김 일병을 포박케 하고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GOP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적과의 교전이 아니다. 우리 초소에서 일어난 총기사고인데 대여섯 명이 부상을 입었다. 범인을 잡았다”고 보고했다. 이때 이미 7명이 사망해 있었는데, 이 중위는 5~6명이 부상했다고 잘못 보고한 것이다(그 후 부상자 1명이 숨져 사망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시각이 3시쯤이었으니 매우 신속한 범인 검거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김 일병보다 겨우 세 살 더 많은 같은 신세대 이 중위의 대처다. 그는 총격이 이어질 때 섣불리 대응하지 않고 생존을 모색했다. 총격이 끝난 뒤에는 피가 낭자한 참혹한 상황에도 위축되지 않고 병사들을 방어 위치에 투입하는 침착함과 용기를 보였다. 그리고 군복 입은 병사만 불러와 화약 냄새를 맡는 등의 행동으로 범인을 심리적으로 제압했다.

이때 이 중위가 겁을 먹고 부대를 통제하지 못했다면 김 일병은 2차 범행을 감행했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현장에서의 김 일병 사건은 일단락됐는데, 정작 더 큰 태풍은 그때부터 몰아쳤다.

군대 문제이기 앞서 사회 문제

먼저 28사단 헌병대가 김 일병과 생존자를 상대로 수사에 착수하고, 이어 상급 부대인 6군단 헌병대도 수사에 참여했다. 범인이 생포된 만큼 두 헌병대는 김 일병의 진술을 토대로 1차 보고서를 만들어 국방부로 보내자, 국방부는 오전 10시에 발표했다. 김 일병의 진술을 토대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첫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는 여론이 높아지자 육군은 인사근무처장(박철수 준장)을 단장으로 하고 헌병과 감찰 요원 등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재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김 일병이 며칠 전부터 마음을 먹고 계획적으로 범행했다고 발표했다(6월20일).

그러자 “첫 번째 발표와 두 번째 발표가 다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로 인해 육군은 김훈 중위 사건 이후 최초로 GP를 기자단에게 공개하고 육본 직속의 헌병기구인 중앙수사단으로 하여금 세 번째 조사를 하게 해 23일 그 결과를 발표케 했다.

육군이 여론에 밀려 세 번이나 수사 발표를 하는 사이 국가인권위원회와 국회 국방위까지도 조사에 가세했으나 이들은 별다른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조사 열풍이 불면서 ‘신세대 장병 관리가 엉망’이라는 투의 상투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켜본 한 관계자는 이렇게 개탄했다.

“사고가 났으니, 육군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비판이었으면 좋겠다. 우리 군에서 문제인 것은 신세대가 아니라 김 일병 같은 문제 장병이다. 과거 구세대로 구성돼 있던 시절에도 유사한 사고는 일어났다. 신세대 병사들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잘하는 것도 그 이상으로 많다. 이 중위의 대처는 정말 훌륭했다.

이 사건의 요체는 김 일병 같은 나약한 심성의 군대 부적응자가 수색대 같은 주요 부대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KMPI(Korean Military Personality Inventory) 같은 인성검사를 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검사가 부실했다. 하지만 지금의 김 일병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그는 20여년간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사회화 과정을 거친 뒤 단 7개월간의 군인화 과정을 밟았다. 김 일병이 컴퓨터 게임에 빠진 것은 군대에서가 아니라 사회에서였다.

김 일병 문제는 군대의 문제이기에 앞서 우리 사회의 문제다. 군인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국민이 나약하면 군대에서 아무리 잘 뽑고 가르쳐도 좋은 군인을 만들 수 없다.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고율은 같은 또래 젊은이가 벌이는 범죄보다 오히려 낫다. 사고가 났다고 무조건 군을 비판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군을 바로 세우는 길 아니겠나. 우리 군의 사기는 죽지 않았다.”





주간동아 2005.07.05 492호 (p44~47)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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