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9

2016.10.19

인터뷰

금속활자의 비밀 캐는 영화감독 우광훈

“고려와 유럽 교류, 직지와 구텐베르크 성경 관계 확인”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6-10-14 1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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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사실이라면 역사가 바뀌는 거예요.”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 제작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지난 2년간 고서(古書)를 뒤지고, 유럽 각지의 도서관과 박물관을 훑으며, 세계 유수의 학자들을 인터뷰한 끝에 확인한 ‘금속활자의 비밀들’을 들고 찾아갔을 때다.

    “짜릿짜릿했죠. 어떻게 내가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에요.”

    ‘역사를 바꾼’ 남자 우광훈 감독(사진)의 소감이다.





    고려왕에게 보낸 14세기 교황의 편지

    그와의 이야기는 ‘존경하는 고려인들의 국왕께’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한 통의 편지에서 출발한다. 우 감독 등 제작진은 지난해 가을, 바티칸 비밀문서고에서 이 편지를 찾아냈다. 1333년 당시 교황이 중국 베이징 주교를 맡아 떠나는 니콜라스 신부 편에 들려 보낸 서신이다.

    거짓말처럼 잘 보존된 하얀 양피지 위에는 고대 라틴어로 쓰인 ‘고려’라는 국호가 선명했다. 이어서 유려한 필체로 ‘왕께서 그곳(고려)의 그리스도인들을 잘 대해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교황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남은 유럽인에 대한 첫 기록은 1594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스페인 신부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편지는 그보다 261년 전, 이미 우리나라에 유럽 출신 ‘그리스도인’이 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미 있는 자료가 왜 그동안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비밀문서고에 갇혀 있던 걸까. 우 감독은 어떻게 그것을 찾아냈을까. 이어지는 질문에 그는 ‘직지’라는 단어를 꺼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 얘기다.

    직지는 1967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됐다. 1377년 고려에서 출간된 지 약 600년 후의 일이다. 그때까지 인류 최초 금속활자본은 1454년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성경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직지의 존재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이 왜 프랑스 국립도서관 서고 안에 들어 있는지도 한동안 미스터리였다. 직지를 찾아내고 연구해 세상에 알린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 고(故) 박병선 박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구텐베르크 성경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배우고 있을 테다. 우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이렇게, 누군가의 손이 닿기만을 기다리는 ‘역사의 비밀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이는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을 기획하고 공동감독을 맡은 캐나다인 데이비드 레드먼의 생각이기도 하다.

    우 감독에 따르면 레드먼은 2013년 프랑스에서 영화 비즈니스를 공부하다 우연히 한국인 친구로부터 직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서양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구텐베르크 성경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가르친다고 해요. 그런데 왜 그동안 직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을까 궁금해진 레드먼은 이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프랑스 국립도서관을 방문하죠. 거기서 자신을 대하는 직원들 태도가 지나치게 퉁명스럽다는 걸 느끼고요. 직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꺼리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합니다.”

    레드먼은 문득 ‘지금까지 직지가 알려지지 않은 건 고려 금속활자의 존재를 숨기려는 어떤 세력의 음모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고 한다. 마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와도 같은 전개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이 비밀을 풀어 영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은 레드먼은 이때부터 유럽 곳곳을 돌며 자료 조사를 시작했다. 한국을 방문하고 장동찬 프로듀서의 도움으로 당시 ‘직지홍보대사’로 활동하던 정지영 영화감독도 만났다.

    정 감독은 다시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하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우 감독을 이 글로벌 프로젝트에 합류시켰고, 영화의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여성, 명사랑아네스 씨를 영화 진행자로 삼았다.



    금속활자는 ‘인류 모두’의 자산

    이때부터 국경과 시대를 초월한 이들의 금속활자 공부가 시작된다. 우 감독은 “12~15세기 간행된 각종 문헌 속에서 인쇄술, 고려 등과 관련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찾았다. 고려가 금속활자를 개발한 시절 교황청이 있던 프랑스 아비뇽, 구텐베르크의 고향 독일 마인츠, 교황청 자료가 모여 있는 바티칸 등 세계 곳곳의 연구자들과 연락해 그 지역에 남아 있는 흔적들도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교황이 고려왕에게 보낸 편지 등 고려와 유럽의 직접 교류 증거들을 발견하고 가슴이 벅찼다”고 밝혔다.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LIFE)’는 1999년 펴낸 밀레니엄 특집호에서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했던 사건과 인물 100선’의 1위로 ‘구텐베르크’를 선정하며 이렇게 썼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건 아니다. 그것은 14세기 한국인들이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의 좀 더 진보된 기술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양에서 직지의 존재를 아는 이들조차 여전히 광범위하게 갖고 있는 믿음이다. 고려가 좀 더 일찍 금속활자 기술을 개발한 게 사실이라 해도, 유럽인 역시 자생적으로 관련 기술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금속활자의 비밀들’ 제작진은 바로 이 부분의 가려진 진실을 찾아내 공개한다. 중세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지금 우리 생각보다 훨씬 밀접하게 문화와 기술을 주고받았고, 그중에는 인쇄술도 포함돼 있으며, 그 흔적이 역사 곳곳에 기록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 감독은 “우리 영화 제목이 ‘금속활자의 비밀들’인 건 발로 뛰어 찾아낸 비밀이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교황 편지’ 외 또 다른 증거를 차례대로 하나씩 공개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것을 통해 우 감독이 말하려는 건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낸 ‘한민족의 우수성’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오늘날 인류 문명을 만든 인쇄술의 발전이 수많은 민족, 지역, 문화 교류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고 했다.

    이런 제작진의 뜻 때문에 ‘세계사 속 직지 실종 음모’를 파헤치며 시작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군데군데 미소가 지어질 만큼 따뜻한 이야기가 가득한 작품이 됐다. 동시에 인류 역사의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비밀을 알아나가는 지적 즐거움도 선물한다.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은 영화제 출품, 학술적 발견 성과를 공유하는 포럼 개최 등에 이어 내년 초 한국과 세계시장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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