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9

2003.08.28

“서울에서만 연극 하란 법 있나요”

연극인들 잇따라 지방에 새 둥지 … 지자체 지원받기 쉽고 재충전 기회로도 그만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08-21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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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만 연극 하란 법 있나요”

    양주 미추산방 흰돌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정글이야기’, 15년째 순항중인 춘천인형극제

    ”우리, 연극 보러 밀양에 갈까?” “아냐, 차라리 춘천에 가서 인형극 보자.”

    아직은 좀 낯설게 들리는 말이다. 그러나 3, 4년쯤 후면 연극팬들 사이에서 이런 대화가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연극인들이 조금씩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와 서울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탈서울’ 예술인의 첫 주자는 무용가 홍신자씨. 1993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홍씨는 서울 대신 경기 안성시 죽산면에 흙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홍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웃는돌 무용단’과 함께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자연 속에서 공연을 펼치는 ‘죽산국제예술제’를 9년째 주관하고 있다. 홍씨 외에도 이윤택씨(연희단거리패 대표)가 경남 밀양으로, 손진책씨(극단 미추 대표)가 경기 양주로, 인형극인 강승준씨가 강원 춘천으로 떠났다. 또 음악인 임동창씨는 경기 안성에서, 영화감독 박철수씨는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충남 부여에서 사물놀이교육원을 운영하고 있다.

    연극인들이 서울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돈’이다. 지방 주재 연극인의 대표격인 이윤택씨는 “서울에 비하면 지방에서는 3분의 1 수준의 제작비로 연극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98년 12월 자신의 연극집단인 ‘연희단 거리패’를 이끌고 밀양으로 내려간 이씨는 폐교한 초등학교 부지를 인수해 ‘밀양연극촌’을 열고 야외극장인 ‘숲의 극장’과 스튜디오, 천막극장 등을 지었다. 이씨와 연희단거리패는 이곳에서 매주말 공연 외에 2001년 여름부터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도 열고 있다. 이씨는 “올해 밀양시가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 6000만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TV·영화 출연 기회는 포기하는 셈



    “서울에서만 연극 하란 법 있나요”

    손진책 극단 미추 대표(왼쪽)와 무용가 홍신자씨. 두 사람은 각기 경기도 양주와 죽산에서 활동하고 있다.

    “연극은 여건상 외부의 경제적 지원이 절실한데, 서울에는 수백 개의 극장이 있어서 정부지원이 일일이 미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지자체(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렇지 않죠.” 이씨는 “다른 연극인들에게도 지방으로 가라고 권하지만, 연극인들이 대학로를 떠나면 잊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허영심 때문에 서울을 벗어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은 지방 연극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짚고 있다. 지자체의 지원을 받고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으나 중앙무대에서 영영 잊혀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젊은 연극인들은 대학로에서 활동하다 TV나 영화에 발탁돼 스타덤에 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방에 가면 이 같은 화려한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또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관객이 오지 않을까봐 두려울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만 연극 하란 법 있나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공연된 ‘한여름밤의 꿈’(위). 자신의 극단을 98년 경남 밀양으로 옮긴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대표(아래).

    하지만 춘천에 거주하고 있는 강승준씨(춘천인형극장장)은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강 극장장은 춘천의 인형극 전용극장인 ‘물의 나라 꿈의 나라’ 운영을 위해 2001년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했다.

    “지방 관객 나름의 특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너무 아카데믹하고 어려운 공연은 지방에 걸맞지 않죠. 대신 재미있고 확실한 인상을 주는 작품을 공연하면 멀리서도 관객이 옵니다. 지방에서 활동하려면 이 같은 관객의 특성을 연구하고 그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죠.” 그가 운영하는 ‘물의 나라 꿈의 나라’의 관객은 8월 초마다 열리는 춘천인형극제 관객을 제외하고도 연간 7만명 선이다. 강 극장장은 “연극인들에게 자신감만 있다면 지방에서 활동하는 것도 재충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고 본다”고 조언했다.

    관객 확보 외에도 연극인들의 지방 활동은 아직 제약이 많다. 공연기획자인 이승훈씨(메타 스튜디오 대표)는 “대학로의 공연 환경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로만큼 공연에 대한 노하우를 갖춘 전문가가 많은 곳도 없다”고 말했다. 결국 연희단거리패처럼 결속력이 강한 연극집단이 통째로 가지 않으면 활발한 공연활동이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지방 특유의 ‘텃세’도 무시할 수 없다. 한 연극인은 “극단이 이사 온다니까 군청에서 무슨 유흥집단이 오는 줄 알고 허가를 안 내주더라”고 귀띔했다.

    이런 점에서 각 지방마다 있는 문예회관과 손을 잡으라는 손진책씨의 조언은 귀담아들을 만하다. 예를 들면 과천시민회관은 극단 ‘모시는 사람들’과 ‘서울발레시어터’를 상주 단체로 삼고 있다. 이처럼 지방의 문예회관과 극단이 관계를 맺으면 연극인들이 지방에서도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는 것. 또 지자체 입장에서는 손쉽게 지역을 대표하는 극단을 키우는 셈이다. 95년 양주로 내려와 현지에 ‘미추산방 흰돌극장’을 연 손대표는 “서울을 오갈 때 번거롭다는 점만 빼고는 모든 게 좋으나 양주군이나 경기도 등 지자체에서 좀더 우리 극단을 ‘이용’해줬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모든 문화와 재원이 서울에 집중돼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치기 위해 서울을 벗어나는 데는 만만치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지방에 터를 잡은 연극인들은 그만큼 스스로의 예술에 자신 있는 사람들, 용기 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지자체가 이 같은 용기 있는 예술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활용 방안을 모색한다면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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