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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연구

박하향 물씬 나는 신들린 배우

서민파 스타 설경구, 연기 시작하면 완전 딴사람… PD 되려 연영과 갔다 아예 천직으로

박하향 물씬 나는 신들린 배우

박하향 물씬 나는 신들린 배우
작가 신경숙은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를 보고 ‘강철같은 배우를 얻었다’고 썼다. 정작 설경구는 ‘강철보다 플라스틱이 더 좋다’고 했다. “강철은 포항제철 같은 데에서나 녹일 수 있잖아요. 아무렇게나 녹여서 아무 모양이나 만들어 쓸 수 있는 플라스틱이었음 해요.”

부드러운 크림빛의 터틀넥 니트에 깔끔한 세미 정장을 입고 나타난 그를 보고 매니저와 영화사 관계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형이 의상에 너무 신경을 안 써서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영 난처했거든요. 어제도 방송 나가는데 무슨 트레이닝복 같은 걸 입고 나왔더라구요.” ‘배우 옷차림이 그게 뭐냐’는 주위의 성화에 오늘은 나름대로 신경을 좀 썼다며 쑥스럽게 웃는 설경구는 “도연이(전도연)가 저 때문에 예쁜 옷을 못 입어요”라고 미안한 듯 덧붙인다.





박하사탕 ‘영호’ 이미지 벗기 큰 부담



박하향 물씬 나는 신들린 배우
그를 만난 날은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1월13일 개봉)의 기술시사회가 있는 날이었다. 완성된 상태의 영화를 보는 건 그 역시 처음이었다. “어젯밤에 잠을 설쳤어요. 영화 개봉 앞두고는 아예 잠을 못 자요. ‘박하사탕’ 개봉 때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극장 근처 여관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7시부터 피카디리 극장 앞을 어슬렁거렸어요.”

‘나도 아내가…’는 전도연과 설경구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영화. 그러나 그는 “기대가 많으면 겁나요”라고 조용하게 말한다. 아무래도 전작 ‘단적비연수’의 쓰라린(?) 경험을 떠올리는 듯했다. “무술연습까지 꼬박 1년을 매달린 작품이었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쳐 많이 속상했어요. ‘박하사탕’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소리만 질러도 ‘김영호 같다’고 하는 통에 기자들 만나면 ‘제발 영호를 잊어주세요’라고 부탁하고 다녔지요.”

잊어달라고는 했지만, 정작 자신조차 ‘김영호’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박하사탕’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을 보이고 난 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어떤 제작자는 “한 3년 아무데도 나타나지 말고 사라져 박하사탕 배우로 남으라”고 했다. 누군가는 돈을 댈 테니 유학을 다녀오라고도 했다. 그만큼 잘했다는 뜻일 테지만, 앞으로 박하사탕만큼 연기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말도 되는 만큼, 솔직히 겁도 났다.

“영화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서 끝까지 못 보고 나올 정도로 몰입해 있던 상태라 스스로도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게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어요. 한달 안에 빠져나와야지 했는데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서도 자꾸 영호가 나오는 걸 느꼈지요. 이젠 굳이 잊으려고 애쓰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한 건데 나오면 어때요? 20년 세월을 연기했으니, 그 속에 ‘적’(단적비연수)도 있고 ‘봉수’(나도 아내가…)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평생 그를 따라다닐 영화 ‘박하사탕’. “배우가 그런 작품 하나 만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 제 호를 ‘박하사탕’이라고 하기로 했어요”라고 말하는 설경구는 확실히 예전보다 편안한 모습이었다. ‘박하사탕’ 찍을 때는 얼마나 예민한 상태였는지 스태프들조차 가까이 가지 못했다는데, ‘나도 아내가…’를 촬영하는 현장에서는 상대역 전도연을 비롯해 스태프 막내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즐기듯’ 영화를 찍었다고…. 대본을 외우기도 전에 스태프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서 외우고 다니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은 영화 속 은행원 김봉수와 많이도 닮았다.

“다소 소심하고 평범한 보통의 한국남자예요. 실제의 저와 비슷한 면이 많지요. 어수룩하고, 약간 덜 떨어지고, 큰 야심은 없지만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싶어하는… 극적이지 않은 일상연기가 더 어렵다고들 하는데, 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즐거웠어요.”

‘박하사탕’으로 단번에 스타덤에 올라 여기저기서 손짓을 받던 그가 ‘별 특징도 없어 보이던’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그는 시나리오가 나오기도 전에 박흥식 감독을 만나보곤 출연을 결정했다고 했다. “감독이 한눈에도 참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기에 영화도 사람처럼 착하겠구나 싶어 하겠다고 했어요. 영화 속 봉수가 나를 연상케 해서 대본도 안 보고 현장 가서 감독이랑 도연씨랑 의논해 상황도 바꾸고 대사도 만들고 그랬어요.”

장르는 멜로지만, 그는 그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라고 했다.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운명의 꼬임도 없이 밤사이 내린 눈처럼 조금씩 쌓여 가는 사랑을 보여줄 작정이라는데, ‘광기’와 ‘카리스마’를 뺀 그의 멜로 연기가 어떤 색깔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연애 경험요? 그리 많진 않아요. 평소엔 무덤덤하고 건조한 성격이지만, 연애할 땐 아주 적극적이기도 해요(웃음). 세상엔 ‘적’처럼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는 파괴적인 사랑도 있지만, 은근하게 흘러가면서 잠깐씩 보석처럼 빛나는 사랑도 있죠. 늘 제 옆자리를 지키는 ‘아내’처럼 말이죠.”

설경구는 연극배우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생활 5년째를 맞고 있으며, 세 살 된 딸을 키우고 있다. 그의 아내는 지금도 배우들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기를 꺼리는데, 연예인들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 “나도 밖에 나가면 연예인이라고 그래”라고 해도 가족 눈에 그는 ‘스타’도 ‘연예인’도 아니다.

예전 학창시절 선생님과 친구들은 그가 배우 하는 것에 대해 ‘불가사의’라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에 있는 듯 없는 듯 수줍은 소년, 여자 앞에선 고개도 못 들던 그가 연기라니…. 연예프로그램 PD가 되겠다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간 설경구는 연기경험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연극무대에 섰고, 졸업과 함께 극단에 들어갔다. 극단 학전에서 시작한 연극경력이 5년. 장기 공연한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을 통해 얼굴을 알리고 ‘괜찮은 배우’ 소릴 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지하 소극장을 벗어나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에서 단역을 맡아 촬영을 마쳤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유영길 촬영감독의 한 마디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난 너 같은 얼굴 참 좋아해.”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교육열이 누구 못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는 지금도 배우 아들이 마땅치 않지만, 만사에 쉽게 싫증을 내는 그가 유독 연기에는 열정을 보이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 평소엔 게으르게 빈둥거리다가 연기만 시작하면 눈빛부터 달라지는 등 딴사람이 되어버리는 그를 두고 주위 사람들도 ‘배우가 체질’이라고 입을 모은다.

“매일매일 새로울 수 있는 일이잖아요. 평생 해도 내 속에 있는 거 다 못 찾고 죽을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 날 계속 찾아가야죠. 전 ‘믿음이 가는 배우’라는 소릴 듣고 싶어요.”

아직도 같이 연기하는 배우가 유명한 스타들이라는 사실이 신기하다는 설경구. 혼자 다닐 때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는 ‘서민적인’ 그는 영화제 시상식 때마다 배우들을 위해 깔아둔 붉은 카펫을 차마 못 밟고 늘 옆문으로 들어가곤 했단다.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웃음도 ‘헤프고’ 낯간지러운 칭찬에 얼굴을 붉히는 그의 ‘어설픈’ 모습에 더 믿음이 가는 건 왜일까.



주간동아 2001.01.11 267호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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