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7

2001.01.11

‘40대 리더십’ 시대가 부른다

격변의 시대 온몸으로 겪어 새 시스템 창출 적합… 지도자 양성 적극 나서야 할 때

  • 입력2005-03-07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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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 리더십’ 시대가 부른다
    99년 말 컴퓨터 Y2K 문제로 전세계가 호들갑을 떨 때의 일이다. 국내 유수의 투자자문사 사장 A씨는 당시 금융감독원 직원 2명의 방문을 받았다. 명목은 물론 Y2K 문제 점검 차원이었다. 이들은 99년 12월 말 증시가 폐장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자 슬그머니 철수했지만 감독기관 직원을 1주일 동안 ‘모셔야’ 했던 A씨로서는 적잖은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A씨는 “도대체 투자자문사에 Y2K 문제 점검을 나온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라고 말했다. 투자자문사란 증권사에 계좌를 개설한 투자자와 계약을 체결, 자문해주고 결과에 따라 수수료를 받는 곳. 따라서 설사 투자자문사 컴퓨터가 Y2K 문제로 다운됐다고 해도 전화만 있으면 업무를 수행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금감원이 Y2K 점검 운운하며 직원까지 파견한 것은 과거 ‘관치금융’ 시대의 주역들이 수장을 맡고 있는 금감원이 여전히 ‘과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 일이라는 설명이다.

    사회 각계 참신한 40대 발탁 맹활약

    ‘40대 리더십’ 시대가 부른다
    반면 지방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40대 L씨의 최근 결단은 우리 사회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는 최근 재벌 그룹 계열 L건설 등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도급금액 50억원의 관급 공사를 수주했다. 그런데 입찰에서 탈락한 업체들이 입찰 과정을 문제삼아 관계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자 L건설측으로부터 “로비스트를 고용해 사건을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L씨는 이 제의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번 공사의 마진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런 행동이 자신의 신념에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 그는 적어도 기업을 운영하면서 비자금 조성 등 일부 재벌 그룹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위의 두 사례는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의 ‘세대 차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금융-기업 개혁 ‘사령부’라는 금감원이 개혁과는 거리가 먼 행태를 보인 것은 과거 방식과 사고에 젖어 있는 경제관료가 조직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 반면 40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과거 방식에 젖어 있지 않은 L씨의 신선한 행동은 김대중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는 방법과 관련, 많은 시사점을 준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과 관련해 많은 국내외 전문가들은 “사람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각 분야에서 40대 ‘젊은 피’를 대거 수혈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과거 정부주도 개발경제 시대의 주역인 경제관료들에게 지금처럼 경제 개혁을 맡겨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김대중 정부 전반기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라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임명 직후부터 개혁성 시비에 시달렸던 진념 재정경제부 장관도 최근에는 40대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진장관이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경영진을 바꿀 때 40대 은행장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 이에 대해 신동규 재경부 공보관은 “진장관 발언의 맥락은 꼭 40대를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은행에서도 나이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재경부 장관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아직 40대 CEO가 나오지 않은 은행에서도 ‘젊은 피’ 수혈이 예상된다.

    최근 민주당 당직개편에서도 볼 수 있듯 40대의 중용이 쇄신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고루한 정치권에서도 40대가 어느덧 중추로 자라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변화없는 나라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이 사회 각계에 참신한 40대의 발탁과 활약을 주문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40대는 주로 50년대에 태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라는 초헌법적 조치로 통치하던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다. 475세대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물론 올해면 386세대 중 61년 생이 40대로 편입되긴 하지만 40대의 주력은 역시 475세대다.

    이들은 현재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집단적인 힘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의 평가. 70년대 서울대 운동권 출신 모임인 관악민주포럼 박석운 대표는 “우리 사회에서 40대는 그동안 자기 분야에서 ‘내공’을 기르는 데만 열중해 왔지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는 한계를 보여왔다”고 진단했다. 기존 정치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이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지도 못했다는 얘기다.

    반면 ‘위기의 40대’ 소리도 나오고 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그동안 40대는 우리 사회 시스템에 순응하면서 허리 역할을 충실히 해왔지만 이제는 구조조정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됐다”고 지적했다. 사회에는 눈을 감고 가정에만 충실해 왔지만 그 결과 이제는 자기 밥그릇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40대인가. 시민단체 관계자는 40대의 특징을 “식민지 유산을 이어받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전쟁의 경험도 없고, 박정희 유신독재 시대를 살긴 했지만 거기에 협력한 세대도 아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급속한 시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순발력과 경륜까지 갖추고 있어 새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세대라는 설명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역임했던 박세일 서울대 국제지역원 교수는 “인간이란 자기 경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40대가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 주도형 경제개발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상황에 그 방식과 경험에서 벗어나기 힘든 50대 이상은 개혁을 주도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과거의 성공 경험이 이제는 ‘자산’이 아니고 ‘부채’이기 때문에”(고려대 경영학과 장하성 교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주역은 40대 중반 이하가 돼야 한다는 것.

    물론 세대 분리론에 대한 경계도 있다. 80년대 재야운동에 투신했다가 지금은 변리사로 일하고 있는 오세중씨의 말이다.

    “한때 386세대가 각광받았지만 금방 그 뿌리가 얕다는 것이 드러났다. 반면 40대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씨를 뿌렸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소외감이 있다. 이제는 세대 분리를 강조하기보다는 각 세대가 갖고 있는 특장을 한데 모아야 할 때라고 본다. 그리고 40대는 그 가교 역할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오씨의 말이 아니더라도 40대들은 자신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를 자각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40대 스스로 조직화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지난해 4월19일 탄생한 관악민주포럼도 그런 움직임 가운데 하나. 이 모임 박석운 대표는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모색해보자는 차원에서 모임을 결성했다”면서 “2001년부터는 연세-고려대나 이화여대 등의 비슷한 모임과 연대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40대의 대중적 ‘스타’가 아직 없다는 점이다. 이는 40대가 경험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던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은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 자체가 ‘잠수함’ 스타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긴급조치법에 따르면 학내에서 3명만 모여도 회합죄로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과 달리 대중적 인물이 나올 수 없었다는 것.

    40대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갖췄는지도 좀더 두고봐야 할 문제. 30대 후반의 고려대 정경학부 함성득 교수는 “외국의 40대 정치지도자는 그 나라 국민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할 기회를 갖게 됐지만 우리의 40, 50대 정치인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함교수는 이어 “이들은 자기 시간을 갖고 ‘내공’을 쌓는 일보다는 쓸데없이 사람 만나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40대 지도자 길러낼 시스템 갖춰야

    분명한 사실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나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예를 들 것도 없이 ‘40대 리더십’이 세계적인 추세라는 점이다. 세계적인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말에는 108년 역사의 세계 최대 기업(시가 총액 기준)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잭 웰치 회장의 후임으로 40대의 제프리 이멜트를 임명한 데 이어 미국 최대 통신업체인 AT&T사도 신임 사장에 데이비드 도먼을 선임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서도 각 분야에서 40대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한 시스템을 하루빨리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 뉴욕 월가에서 15년 동안 활약하다 귀국한 현대투신증권 로이 홍 고문은 “미국에서는 회사에서 면접을 볼 때 나이를 물으면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연공서열을 따진다”고 지적했다.

    도이체방크 금융기관본부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2월 벤처기업 티지코프 대표로 자리를 옮긴 정정태씨는 “외국의 경우 어느 분야든 전문가가 움직이고 있고, 각 개인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40대만 되면 세계적인 전문가가 된다. 반면 우리는 제너럴리스트만 길러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대표는 이어 “다행히 최근 일부 기업 등에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덧붙였다.

    바야흐로 이제는 누구나 노력해 능력만 있으면 한 분야의 지도자, 나아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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