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0

2016.03.23

사회

기혼자라고요? 황당한 혼인신고제

부부 쌍방·증인 확인 의무 없어 무효소송 속출

  • 김지현 객원기자 bombom@donga.com

    입력2016-03-21 09: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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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은 두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며 부부의 연을 맺는 인륜대사다. 평생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필요한 만큼 신중한 결정이 요구된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남편, 아내가 돼 있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이뤄지는 일이다. 현행 혼인신고제의 허점 때문이다.
    혼인신고 절차는 간단하다. 혼인 당사자와 증인이 기재한 혼인신고서, 당사자의 가족관계증명서, 신분증 또는 인감증명서, 도장을 들고 구청에 가면 신고할 수 있다. 신고서에는 부부와 증인 2인의 연락처가 기재되지만 구청 직원이 이들에게 연락해 혼인 사실을 확인할 의무는 없다. 또한 부부 중 한 명만 가도 접수가 가능하기 때문에 혼인신고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다른 한 명의 신분증과 도장을 훔쳐서 사용해도 혼인신고가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부부 양측이 출석하지 않아도 혼인신고가 가능하다는 허점을 악용한 피해 사례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재산 노린 ‘몰래 혼인신고’ 악용

    재산 소유를 목적으로 상대방 몰래 혼인신고를 한 사례가 있다. 회계사인 남성 A씨는 여성 B씨를 만나 2010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결혼 전부터 예단비 문제로 갈등하다 신혼여행 직후부터 파탄의 길을 걸었다. B씨는 A씨가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했고, A씨가 신혼집을 나와 동생 집으로 가자 동생의 집과 A씨 회사에 예고 없이 나타나 A씨의 소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둘은 사실혼 관계였을 뿐 법적 부부는 아니었다.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른 2011년 B씨는 A씨 몰래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고, A씨가 마련한 임차보증금 3억여 원을 중도금으로 사용해 아파트 한 채를 5억여 원에 매수해 자기 명의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마쳤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A씨가 혼인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부부 중 한 명의 일방적 혼인신고였기 때문에 혼인은 무효 판결이 났다. 법원은 사실혼 관계의 기간과 두 사람의 나이, 직업 등을 참작해 “B씨는 A씨에게 위자료와 함께 아파트 매수금의 55%를 반환하라”고 판결했다.
    상대방의 혼인 의사가 명확지 않은 상황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해도 혼인은 무효가 될 수 있다. 남성 C씨와 여성 D씨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2005년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C씨는 하루아침에 급성뇌질환으로 입원했고 병원에 있는 2년 동안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인지능력이 저하됐다. D씨는 구청에 혼인신고를 했지만 C씨의 가족이 제기한 소송에서 혼인 무효 판결을 받았다. 환자가 된 C씨가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C씨가 혼인신고에 동의했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했다는 이유에서다.
    치기 어린 장난으로 기혼자가 된 사례도 있다. 2004년 대학시절 연인이던 여성 E씨와 남성 F씨는 어느 날 연애 문제로 다퉜다. E씨는 F씨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증명해보라”고 요구했고 F씨는 E씨에게 혼인신고서를 보여주면서 “너를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다음 날 F씨는 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고 둘은 헤어진 후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수 년 후 E씨는 다른 남성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에게 혼인신고를 맡겼다. 남편은 “구청에 갔더니 당신이 기혼자로 등록돼 있더라”며 크게 화를 내고 파혼을 요구했다. E씨의 전 애인이자 법적 남편인 F씨와는 이미 오래전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혼인 무효’도 호적에 기록 남아

    이처럼 부부 양측의 혼인 의사가 불분명하거나 진정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경우 혼인 무효 판결이 나올 수 있다. 이때 ‘부부 중 한 명이 합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관건이다. 신동호 법무법인 혜안 변호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혼인신고가 됐다면 제소 기간의 제한 없이 무효 확인 소송을 낼 수 있다. 하지만 혼인신고에 합의하지 않았음을 밝히지 못하면 낭패를 본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남녀가 혼인신고서를 작성한 뒤 어떤 갈등이 불거져 “결혼을 취소하자”고 하고 헤어졌을 때, 한쪽이 혼인신고서를 제출해버리면 실제로 다른 한쪽이 결혼을 진정으로 거부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아 소송이 기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 변호사는 “결혼을 약속한 후 싸워서 한쪽이 복수심을 품고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면 자기도 모르게 기혼자가 될 수 있다”며 혼인신고제의 맹점을 지적했다.
    혼인 무효 확인을 받아도 호적에 기록은 남는다. 신 변호사는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가족관계등록법)에 따르면 호적에 ‘혼인 무효’로 표기된다”며 “법률적으로는 처음부터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혼인 관련 기록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허위 혼인신고의 폐해를 줄이려는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새누리당 신의진 의원은 2016년 1월 6일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혼인신고 시 부부 쌍방이 출석해야 하며 양측 모두 혼인에 대한 안내를 받는다’는 것이 골자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는 허위 혼인신고로 법적 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개정안 작업에 참여한 신순영 서울가정법원 판사는 “법조계 내부에서는 오래전부터 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외부로 공론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전했다.
    2007년 5월 17일 개정된 가족관계등록법에 따르면 2007년 개정 전까지는 혼인신고가 더욱 허술했다. 혼인 당사자 중 한 명만 출석해 신고하면 다른 한 명의 신분증을 요구하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인적사항을 알아내 일방적으로 신고하는 일이 훨씬 쉬웠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자 2007년 법을 개정하면서 한 명만 혼인신고에 출석할 경우 불출석한 한 명의 신분증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허위 혼인신고에 따른 피해는 여전히 속출하고 있다. 신순영 판사는 “법 개정이 빨리 추진돼 남녀가 진지한 성찰 없이 간단하게 혼인신고를 해버리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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