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 진짜 ‘시스템반도체 강국’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지금 잘하는 것 더 잘하게 지원”

정부, 팹리스, 파운드리, 수요기업, 대학 협력 절실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19-05-20 1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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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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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모리반도체가 ‘기억’(저장)을 담당한다면, 시스템(비메모리)반도체는 ‘행동’을 맡는다. 스마트폰, TV, 자동차 전자장비(전장) 등 다양한 제품에서 데이터를 연산·제어·변환·가공하는 주체가 바로 시스템반도체다. 시스템반도체가 있기에 우리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사용할 수 있고, 자동차가 통신장비와 정보를 주고받아 운전자 없이 자율주행이 가능하다. 

    한국은 메모리반도체 강국이다.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60~70%를 차지한다. 하지만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선 약체다. 시장점유율은 3.1%(2018년 기준)에 불과하고, 기술력도 미국 대비 80%에 그친다. 정부가 최근 ‘시스템반도체 비전과 전략’을 내놓은 것은 ‘메모리의 영광’에 가려졌던 시스템반도체 산업을 더는 방치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Tip 참조). 때마침 삼성전자도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 133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해 새로운 국가적 산업의 탄생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분위기다. 

    시스템반도체는 각 전기·전자제품마다 요구하는 기능과 사양이 달라 소품종 다량 생산하는 메모리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 생산된다. 메모리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생산설비를 갖추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시스템반도체업계는 설계전문기업 팹리스(Fabless)와 생산전문기업 파운드리(Foundry)로 양분돼 있다. 팹리스가 반도체를 기획·설계해 파운드리에 생산을 의뢰하고, 이렇게 생산된 제품을 컴퓨터, 휴대전화, 가전제품, 자동차 등을 생산하는 수요기업에 판매한다. 일감을 가져오는 팹리스가 많아야 파운드리가 성장하고 파운드리가 확실하게 생산을 맡아줘야 팹리스가 성장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정작 팹리스는 기대 반, 걱정 반

    4월 30일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왼쪽에서 세 번째)이 세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통해 양산된 삼성전자 웨이퍼에 서명한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첫 번째) 등과 함께 박수 치고 있다. [동아일보]

    4월 30일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열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왼쪽에서 세 번째)이 세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통해 양산된 삼성전자 웨이퍼에 서명한 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에서 첫 번째) 등과 함께 박수 치고 있다. [동아일보]

    정부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현재 1.6%에 그치는 팹리스 시장점유율을 2030년 10%로 끌어올리는 것과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을 현재 16%에서 35%까지 확대하는 것. 이 중 후자는 주로 삼성전자에 달렸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국내 연구개발(R&D) 분야에 73조 원, 최첨단 생산 인프라에 60조 원을 투자해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를 제치고 세계 톱으로 올라서겠다는 구상이다(현재 삼성 파운드리는 TSMC에 이어 세계 2위). 

    그런데 이번 정책의 주요 수혜자라 할 국내 팹리스업계는 ‘기대 반, 걱정 반’인 분위기다. 최근 10년 가까이 시스템반도체에 대한 정부 지원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에서 이번 정책이 희소식이 아닐 수 없지만, 동시에 서투른 정책 집행으로 마지막일지도 모를 국내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육성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다. 국내 팹리스업체들의 체력은 약화될 대로 약화된 상태다(상자기사 참조). 4월 30일 경기 화성시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팹리스업계 인사는 “여러 업체가 상생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는 자리로 알고 갔는데, 정부와 삼성의 이벤트에 들러리를 선 기분이었다”고 토로했다. 국내 팹리스업계 사람들이 당부하는, 한국이 진짜 시스템반도체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면 필요한 방안을 5가지로 정리했다.



    ① ‘황금 분할’ 포트폴리오 찾아라

    시스템반도체는 제품이 8000여 종에 달할 정도로 다양하다. 다 잘할 수가 없다. 또 인텔의 중앙처리장치(CPU)와 같이 기술이 확실하게 앞서는 제품을 따라잡겠다고 지금 뛰어들어봤자 승산이 없다. 이에 허염 실리콘마이터스 대표는 “팹리스 회사들이 함께 발전해갈 수 있도록 회사별 제품 포트폴리오 전략을 잘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뜩이나 팹리스 설계 인력이 부족하고 자본 여력도 충분치 않은데, 같은 제품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종합반도체 회사가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시스템반도체 제품을 피해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허 대표는 “특정 제품이나 분야의 시장성이 밝다고 해서 거기로 우르르 몰려드는 일은 전체 생태계를 위해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며 “각자가 잘하고 있는 제품·분야를 심화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② 팹리스·수요기업·정부의 삼위일체

    팹리스업계는 국내 팹리스업체들의 성장이 정체된 주된 이유로 ‘국가적 차원의 R&D 사업 부재’를 꼽는다. 과거 ‘시스템IC2010’ ‘시스템IC2015’ 등 시스템반도체 육성 사업이 있었지만, 최근 5~7년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면서 반도체 분야의 국가 R&D 사업은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 이에 팹리스는 자체 역량만으로 R&D에 나서는 데 한계가 있어 어려움을 겪어왔다는 것. 

    이번에 정부는 향후 10년간 시스템반도체 R&D 사업에 1조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업계는 정부가 R&D 사업 예산을 배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팹리스와 수요기업을 적극적으로 연결해주기를 기대한다. 수요기업이 원하는 제품을 생산해야 팹리스가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장규 텔레칩스 대표는 “수요기업이 팹리스의 시제품을 테스트하고 조언해주는 것이 팹리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③ 삼성 파운드리, 국내 팹리스에 문턱 낮춰야

    5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에서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삼성전자]

    5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19’에서 정은승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사장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삼성전자]

    국내 팹리스에게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애증(愛憎)의 대상이다. 소량 생산하는 팹리스의 생산 요청을 받아주지 않고, 팹리스가 원하는 다양한 공정 설비도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팹리스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 파운드리가 걸핏하면 해외 유수 팹리스의 주문으로 ‘케파’(capacity·생산수용력)가 다 찼다며 국내 팹리스 물량을 소화해주지 않아 국내 팹리스가 사업 기회를 놓치는 일이 왕왕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삼성 파운드리가 두 곳 이상 팹리스에 같은 제품을 제출하라고 한 뒤 하나만 골라 생산하거나, 시장성 좋은 제품을 자체적으로 설계·생산하곤 해 국내 팹리스들 사이에서 원성이 높다”고 전했다. 

    삼성전자는 앞으로 국내 팹리스와 협력관계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소량 생산 주문도 수용하고, 삼성전자가 개발한 설계자산을 국내 팹리스에 제공해 제품 개발 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④ 국가 R&D 사업으로 ‘석사 이상’ 설계 인력 육성

    정부는 이번 정책에 ‘2030년까지 고급·전문인력 1만7000명 양성’을 포함시켰다.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로 학사 인력 3400명 △R&D 사업 등으로 석·박사 4700명 △반도체 설계교육센터(IDEC) 지원 확대 등을 통해 실무교육을 받은 인력 8700명을 양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중 반도체 계약학과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연계된 것으로 팹리스 인력 공급과는 무관하다. 반도체 실무교육을 받은 인력도 팹리스가 원하는 고급인력은 아니다. 

    팹리스업계는 국가나 기업이 주도하는 R&D 사업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석사 이상의 인력에 목말라 있다. 최근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투자 확대에 나서자 팹리스들은 대기업으로의 인력 쏠림이 더욱 심화될까 봐 오히려 걱정하는 분위기다. 실제 IDEC에 따르면 IDEC 프로그램에 참여한 석·박사 중 절반가량이 대기업에 취업한다. 지난해 IDEC에 참여한 바 있는 석·박사 졸업생 403명 중 중소기업에 취업한 사람은 73명에 그쳤다. 반면 대기업 취업자는 216명에 달했다. IDEC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 등 여러 대학 교수들을 지원해 시스템반도체 분야 설계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팹리스업계는 유수 대학들이 좀 더 많은 R&D 사업에 참여해 석·박사급 고급인력이 양성되고, 이들이 R&D를 하면서 경험한 팹리스의 발전 가능성을 보고 입사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공진흥 광운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서 중추를 담당하는 핵심 인력들은 2000년대 중반 국가 R&D 사업을 통해 키운 인재들”이라며 “그간 인재 육성이 끊겨 아쉬움이 컸지만, 지금이라도 인재 양성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학생들이 대기업 입사를 선호하긴 해도 대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뒤 팹리스로 옮겨가기도 하기 때문에 R&D를 통한 인재 양성은 결국 시스템반도체 산업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⑤ 국내 팹리스가 국내 파운드리 이용할 때 정부 지원 ‘희망’

    여타 산업 분야와 마찬가지로 국내 팹리스의 주요 경쟁 상대 역시 중국이다. 중국은 현재 반도체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데, 시스템반도체 팹리스업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제품군에서 국내 선두를 달리고 있는 어보브반도체 관계자는 “중국처럼 국내 팹리스가 국내 파운드리에 생산을 위탁할 때 보조금 등 지원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 팹리스업체들이 정부 보조금 덕에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있어 이들과 경쟁하기가 갈수록 버겁다는 것. 다른 팹리스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국내 파운드리 이용에 보조금을 준다면 팹리스로서는 R&D에 투자할 자원을 확보할 수 있어 기술력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Tip 정부의 ‘시스템반도체 비전과 전략’ 주요 내용

    비전 
    메모리반도체 강국에서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도약 

    목표
    △팹리스 시장점유율 2018년 1.6% → 2030년 10%
    △파운드리 시장점유율 2018년 16% → 2030년 35%
    △시스템반도체 고용 2018년 3만3000명 → 2030년 6만 명

    추진과제

    ① <팹리스> 수요 창출 및 성장 단계별 지원 강화 : 5대 분야(자동차, 바이오, 에너지, 사물인터넷(IoT) 가전, 기계·로봇)·공공수요 연계, 창업-설계-시제품 등 성장 단계별 지원 체계 구축
    ② <파운드리> 첨단·틈새시장 동시 공략으로 세계 1위 도약 : 민간투자 지원, 중견 파운드리 역량 강화 등
    ③ <상생협력> 팹리스-파운드리 상생협력 생태계 조성 : 파운드리 공정·기술 개발 확대, 디자인하우스 육성 등
    ④ <인력> 민관 합동 대규모 인력 양성 : 계약학과 신설, 연구개발(R&D)과 연계한 석·박사 인력 양성 등
    ⑤ <기술> 산업 패러다임을 바꾸는 차세대반도체 기술 확보 : 자동차, 바이오,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개발(1조 원 규모) 


    자료 | 산업통상자원부

    성장 정체된 국내 팹리스업계
    LG 계열사 실리콘웍스만 잘나가

    한국반도체산업협회(협회) 회원사 중 팹리스로 분류된 업체는 60여 개다. 이 중 협회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경영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26개 회사의 ‘형편’을 살펴보면 국내 팹리스업체들이 처한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다(그래프1 참조). 

    26개 국내 팹리스의 2018년 매출 총합은 1조9000억 원으로, 12조 원 규모인 삼성전자 파운드리 매출액에 한참 못 미친다. 영업이익은 97억 원으로 적자를 면했지만, 법인세와 금융비용 등을 제한 당기순이익은 280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 26개사 중 14개사가 마이너스 당기순이익을, 15개사가 6년 전인 2012년과 비교해 매출 감소를 보였다. 

    업체별 매출 쏠림도 적잖다. 1위 실리콘웍스 매출이 7910억 원으로 전체 매출의 40%를 차지한다(그래프2 참조). 26개 회사의 2012년 매출 총합이 1조5740억 원으로 6년간 3400억 원이 증가했는데, 이 기간 실리콘웍스의 매출은 3190억 원이 늘었다. 실리콘웍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업체의 성장은 정체된 셈이다.
     
    26개사 가운데 매출 1000억 원이 넘는 회사는 실리콘웍스와 제주반도체(1440억 원), 에이디테크놀로지(1100억 원), 텔레칩스(1260억 원), 어보브반도체(1040억 원) 5개사에 불과하다. 그런데 실리콘웍스는 LG그룹 계열사로 LG전자·LG디스플레이 등 확실한 수요처를 가진 회사다. 제주반도체는 메모리반도체를 전문으로 하는 팹리스고, 에이디테크놀로지는 엄밀히 말해 팹리스가 아닌 칩리스(Chipless)업체다. SK하이닉스 등 종합반도체 회사가 요청하는 제품을 위탁설계해주는, 일종의 ODM(제조업자개발생산) 사업을 한다. 이 현황 자료에 따르면 퀄컴과 같이 독립된 시스템반도체 팹리스 가운데 1000억 원 이상 매출을 내는 업체는 텔레칩스와 어보브반도체 두 곳에 불과한 셈이다.

    인터뷰 | 이장규 텔레칩스 대표
    “80점 학생이 100점 맞을 수 있게 지원해달라”

    [홍중식]

    [홍중식]

    자동차 전자장비(전장)는 시스템반도체의 주요 수요처 중 하나다. 그중 자동차 오디오와 비디오, 내비게이션을 통합해 한번에 통제할 수 있는 인포테인먼트(AVN) 시스템은 자동차 제조사에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이다. 자동차 전장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는 네덜란드 NXP의 주력 사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AVN 시스템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NXP를 밀어내고 AVN 시스템 국산화율을 0%에서 90%로 만들어버린 시스템반도체 팹리스가 있다. 바로 텔레칩스다. 현대·기아차는 2011년부터 텔레칩스의 AVN 시스템을 장착하기 시작해 현재 제네시스, 에쿠스, K9 등 일부 고급 라인을 제외한 전 차량에 텔레칩스의 AVN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다. 

    이장규 텔레칩스 대표(사진)는 삼성전자 반도체연구소 출신으로 역시 삼성 출신이 창업한 씨앤에스테크놀로지에서 근무하다 1999년 텔레칩스를 창업했다. 그는 이번에 결성된 ‘얼라이언스 2.0’에도 참여하고 있다. 얼라이언스 2.0은 정부, 연구기관, 반도체 수요기업, 팹리스 등 25개 기관으로 구성된 협의체로 향후 시스템반도체 분야 유망기술 발굴 등 역할을 맡는다. 

    텔레칩스 사업을 소개한다면. 


    “AVN 시스템이 주력 제품으로 전체 매출의 60%가 현대·기아차에서 나온다. 국내로 들어오는 수입차에도 대부분 현지 딜러 옵션으로 텔레칩스의 AVN 시스템이 장착돼 있다. 올해 말부터는 방송용 셋톱박스 핵심 칩 양산에 들어간다. 현재 미국 브로드컴이 국내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는데, 이를 텔레칩스의 국산 칩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끈끈한 연대가 경쟁력 높여

    정부의 이번 시스템반도체 육성 방안을 어떻게 평가하나. 

    “우선 시스템반도체 지원 예산을 확보했다는 점에서는 반갑다. 하지만 여러 업체와 대학에 예산을 잘게 쪼개 나눠줄까 봐 걱정이다. 확실한 수요처를 이미 확보하고 시장성이 확대될 수 있는 업체를 선별해 지원해야지, 지금부터 신생업체를 키워서는 승산이 없다. 80점 받는 학생이 100점 받을 수 있게 정부가 도와줘야 한다.” 

    텔레칩스는 다른 팹리스에 비해 매출도 많고 흑자도 내고 있다. 자력으로 연구개발(R&D)할 순 없나. 

    “반도체 칩 하나 개발하는 데 200억~300억 원이 든다. 기획부터 양산까지 6~7년이 걸린다. 그런데 칩을 하나만 개발하는 게 아니다. 제품 라인업을 갖추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적어도 1, 2년마다 새 칩을 선보여야 해 동시에 3개 칩을 개발해야 한다. 이 비용을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다.” 

    수요기업한테서 연구개발비 도움을 받을 순 없나. 

    “수요기업은 리스크를 지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인 개발비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수요기업은 사내 자원을 제공할 수 있다. 시제품을 테스트하거나, 어떤 제품·사양이 필요한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팹리스에 큰 도움이 된다. 정부가 이번에 구성한 얼라이언스 2.0을 통해 팹리스와 수요기업을 끈끈하게 연결해줬으면 좋겠다.” 

    정부가 이번에 5대 주력 분야를 꼽았다. 

    “그게 걱정이다. 정부가 지원 분야 아이템을 정해놓으면 업체들이 예산을 따내려고 그쪽으로 쏠릴 수 있다. 지원 분야를 한정하기보다,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일례로 요즘 인공지능(AI) 기술과 자율주행차가 주목받는데, 무조건 그 분야에 나서기보다 기존에 잘하고 있는 기술에 AI를 접목함으로써 시장성을 더 확대할 수 있는 제품을 지원해야 한다. 없는 시장을 만드는 것은 대기업이 할 일이다. 중소 팹리스들은 시장이 요구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인력 확보가 어렵다고들 한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다. 대기업 입사시험에서 탈락해도 중소 팹리스로 안 온다. 재수하고 삼수한다. 요즘 몇몇 대학을 돌며 리크루팅을 하고 있다. 석사 등록금 전액 지원, 학비 보조금 지급, 삼성전자 수준의 급여를 내걸었다. ‘대기업에서보다 주도적으로 일하며 빠르게 역량을 계발할 수 있다’ ‘우리 회사에서 경험 쌓고 독립해 자기 사업을 하는 후배들도 있다’고 내가 직접 학생들에게 얘기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왜 정부가 나서서 국내 팹리스를 키워야 하나. 

    “한마디로 국가 산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도래하면서 시스템반도체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물론 수요기업들이 반도체 칩을 해외에서 사다 써도 된다. 하지만 국내 팹리스업계가 수요기업의 니즈를 탄탄하게 뒷받침해주면 국산 완제품의 경쟁력이 더욱 강화된다.” 

    국내 팹리스 스스로가 노력할 부분이 있다면. 

    “과거 몇몇 회사에서는 오너가 돈을 번 뒤 지분을 팔고 떠나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창업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잘하는 분야에 더욱 집중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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