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9

2015.12.30

천덕꾸러기 박정희도서관

‘이름만 도서관’ 책임 공방…‘독재 미화’ 논란에 서울시 기부채납·토지매매 올스톱

  •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15-12-29 10: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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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덕꾸러기 박정희도서관

    2003년 문을 연 대한민국 최초의 전직 대통령 도서관인 김대중도서관. 홍중식 기자

    2015년 가을 서울 마포구 상암동으로 이사한 워킹맘 박지혜(33) 씨는 주말을 맞아 남편과 네 살배기 딸을 데리고 집 근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박정희도서관)을 찾았다. 출퇴근길에 지나치며 눈여겨봤던 박정희도서관에 들러 여가시간을 즐기려 한 것. 그러나 기대감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박씨는 “건물이 크고 광장도 넓어서 책도 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책이 한 권도 없고 열람실은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1·2층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니 더 머무를 공간이라고는 매점밖에 없어 발길을 돌렸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차라리 도서관 명칭은 빼고 기념관이라 칭했다면 헛걸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닫힌 열람실, 인근 주민 불만 커

    2012년 개관한 박정희도서관은 상암동 주민들에게 달갑지 않은 곳이다. 박씨처럼 가족과 함께 들렀다 예상과 다른 도서관 운영 상태에 불만을 토로하는 이가 적잖기 때문.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상암동 주민 카페에는 “오가며 볼 때마다 흉물이라는 생각만 든다” “인근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도 이사할 때 고려 항목이었는데 첫 나들이를 갔다 대실망했다” “궁전같이 지어놓고 운영을 저렇게밖에 못 하나” 등 불만이 쇄도했다. 일부 주민은 “박정희도서관을 공공도서관으로 바꾸자”며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15년 12월 중순 찾아간 박정희도서관은 대낮인데도 2층 열람실 불이 꺼져 있었고, 열람실에는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덩그러니 있을 뿐 일반인 접근을 막고 있었다. 2층 전시관 입구에는 ‘조국 근대화의 영웅’이라는 글과 박정희 전 대통령 얼굴이 크게 박힌 대형 포스터가 걸려 있고, 집권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의전차량 2대가 놓여 있었다. 재향군인회 소속 관람객 10여 명이 전시관 입구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몰려 들어가는 것 외에 관람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부 공간의 60%가량을 차지하는 전시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전시물에 초점을 맞춰놓았다. 새마을운동, 고속도로사업, 근대화사업 등 1960~70년대 사회발전상을 실물 마네킹과 모형으로 전시해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엿보였다. 이문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소속 박정희도서관 홍보·해설가는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 등에 대해 아무래도 불편해하는 시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은 최소화했다. 전반적으로 박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우리 국민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 경제발전을 이룩했는지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끔 전시관을 꾸몄다”고 말했다.
    도서관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이 해설가는 “현재 열람실에 비치할 서적을 마련 중이다. 그러나 인근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공공도서관’ 성격으로는 운영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 공공도서관으로 운영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비치할 서적은 박 전 대통령 평전이나 당시 사회발전상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 전직 대통령 기념도서관이 공공도서관으로 기능하는 사례는 해외에서도 매우 드문 것으로 안다. 연세대 김대중도서관도 공공도서관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며 용도 변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에 위치한 김대중도서관도 열람 가능한 책은 1층 로비에 비치된 30여 권이 전부여서 도서관이란 명칭이 무색하다. 그마저도 김 전 대통령에 관한 평전과 집권 당시 정치·경제 이슈를 다룬 전문서적이 주를 이뤘고, 일반서적은 전혀 없었다.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1·2층에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갈망하며 군부독재에 맞서 투쟁했던 당시 사료들과 대통령 당선 이후 사료들, 노벨평화상 등 김 전 대통령 개인의 업적을 드러내는 전시물이 대부분이었다. 박정희도서관과 비교했을 때 집권 당시 사회발전상을 알려주는 전시는 오히려 비중이 적은 편이었다. 3층에는 운영 주체인 연세대 북한연구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천덕꾸러기 박정희도서관

    서울 마포구 상암동 약 15만㎡ 대지에 지어진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내부에는 집권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기념물이 전시돼 있지만 서적은 한 권도 없다.

    전직 대통령도서관 3곳, 성격 제각각

    김대중도서관이 전시관으로만 운영되는 데 대해 도서관 관계자는 “2003년 설립 당시에는 전시관과 도서관으로 운영됐으나 2006년부터 전시관으로만 활용하고 있다. 좀 더 많은 관람객에게 양질의 전시를 선보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도서관이 기부금으로 운영되다 보니 예산 마련에 어려움이 있다. 원래는 전시를 설명해주는 도슨트(안내원)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이마저도 2014년 중단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통령도서관이 최초로 설립된 미국의 대통령도서관은 어떤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미 대통령도서관은 기부금을 받아 해당 대통령의 출생지나 주요 정치활동 지역 또는 출신대 캠퍼스 등에 건립되는데 주로 재임 중 공무에 관한 자료와 서적, 사진 등의 기록물을 전시한다. 최초 대통령도서관은 제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0년 뉴욕 하이드파크에 만든 자신의 기념도서관이다. 당시 그는 재임 중 국정운영 기록을 비롯한 모든 기록물을 연방정부에 기증했는데 도서관 운영권은 국립기록관(The National Archives)이 맡았다.
    이후 1950년대 퇴임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통령도서관 설립에 대한 정부 지원을 희망하자 미국 의회는 55년 ‘대통령도서관법’을 제정했다. 법에 따르면 민간 지지자들이 설립한 대통령도서관을 국립기록관에서 기탁받아 운영하고, 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도 가능하게 했다. 이는 대통령이 퇴임한 후 자신이 소장한 역사 기록물을 자발적으로 기증하도록 독려하고 보존을 제도화해 궁극적으로는 미국 국민이 자유롭게 정보를 이용할 수 있게 보장한 것이다.
    천덕꾸러기 박정희도서관

    2016년 3월 개관 예정인 김영삼도서관은 다른 곳과 달리 공공도서관 성격이 강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홍중식 기자

    이에 따라 미국의 퇴임 대통령들은 본인이 직접 기부금을 모아 고향에 건립한 뒤 정부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도서관 설립에 참여했다. 현재 미국에는 루스벨트 이후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로널드 레이건, 존 F. 케네디 등 21개 대통령도서관이 건립됐다.
    한국에서는 2003년 전직 대통령도서관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2012년 박정희도서관 개관 이후 2016년 3월 김영삼도서관이 세 번째로 개관할 예정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통령도서관은 운영 주체가 국가에 있는 미국과 달리, 제각각 운영되고 있다. 김대중도서관은 아시아·태평양재단에서 건립한 후 건물과 대지, 각종 사료를 연세대에 기증하면서 운영권을 해당 대학이 갖게 됐다. 박정희도서관은 현재 재단법인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에서 운영권을 가진 상태며, 김영삼도서관은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에서 건립까지만 관여하고 이후 대학 측에 기부하거나 경영권을 맡기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 가운데 공공도서관에 가장 근접한 것은 김영삼도서관이다. 설립 주체인 김영삼민주센터 관계자는 “개관 이후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는 전시관으로, 3~5층은 도서관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특히 5층은 개방형 열람실로 만들어 인근 거주 학생이라면 누구나 와서 공부할 수 있도록 꾸밀 예정이다. 건물 설립 이전에 사업 계획을 명확히 잡았기 때문에 공공도서관 성격이 강한 대통령도서관으로 개관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단·서울시 눈치 보기 급급

    공간 및 예산 부족 문제로 도서관 운영을 접은 김대중도서관은 차치하더라도 도서관 공간이 충분히 마련된 상태에서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박정희도서관은 개선의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취재 결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재단) 측과 서울시 측은 운영권을 놓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2001년 재단 측은 정부로부터 박정희도서관 설립을 허가받고 서울시와 상암동 터를 무상 임대받기로 협약서를 체결했다. 건물을 지으면 서울시에 일체를 기부채납하고 시설의 절반 이상을 도서관으로 운영한다고 약정했다. 그런데 이듬해 공정이 16%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박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도서관을 국민 세금으로 짓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공사가 중단됐다. 2005년 정부는 국고보조금 200억 원 지원을 돌연 취소했고, 재단 측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2009년 대법원으로부터 승소 판결을 받았고 이듬해 공사가 재개돼 2011년 말 완공됐다.
    문제는 이후 또 발생했다. 재단 측은 곧바로 서울시에 기부채납 의사를 밝히고 관련 서류를 제출했지만 서울시가 결정을 주저한 것. 서울시 관계자는 “당시 시민단체 측이 서울시 소유 토지를 재단이 무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해 비판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게다가 도서관 기부채납을 받은 뒤 서울시 차원에서 매년 관리비를 들여 운영하는 것도 세금이 투입되는 문제여서 시민 불만이 제기됐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재단 측에 대지를 매각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고 2014년 매각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시민단체에서 “재단에 토지를 매각하면 독재 미화 등 재단 측이 편향된 시각으로 도서관을 운영할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며 매각을 반대했다. 현재 재단 측은 “매입에 필요한 자금이 마련된 상태로 서울시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주민들이 공공도서관으로 운영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권이 우리 쪽으로 완벽히 넘어오면 공공도서관 형태로 용도 변경을 할 의사도 있다. 지금은 손발이 묶인 상태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현재 박정희도서관에 대한 권한은 재단과 서울시가 갖고 있다. 도서관으로 운영하지 않는 데 대한 책임도 양쪽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재단 측은 “우리 마음대로 도서관을 운영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서울시 측은 “주민들의 요구를 알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손을 놓은 실정이다. 재단과 서울시, 시민단체와 인근 주민 모두의 합의가 이뤄지기 전까지 박정희도서관에서 책을 열람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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