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63

2018.11.09

졸기

연기도, 사랑도, 인생도 일세를 풍미한 대한민국 대표 미남배우

신성일(1937~2018)

  • 입력2018-11-09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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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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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영화와 컬러영화가 공존하던 1950~70년대 은막의 스타들은 조각 같은 미모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여배우의 경우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졌지만 남자배우는 지존이라 불릴 만한 존재들의 장기집권이 이뤄졌다. 프랑스의 알랭 들롱, 미국의 제임스 딘, 이탈리아의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 그들과 동시대 배우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배우가 신성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라이벌은 있었다. 그보다 아홉 살 연상인 최무룡(1928~99)이었다. 하지만 최무룡이 미후네 도시로를 닮은 선 굵은 미남이었다면 신성일은 알랭 들롱처럼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섬세한 미남이었다. 그래서 최무룡은 ‘오발탄’(1961)과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빨간 마후라’(1964) 같은 시대극이나 전쟁극으로 주로 기억되고, 신성일은 ‘만추’(1966)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같은 멜로영화로 기억된다. 

    게다가 신성일이야말로 해방 후 1세대 청춘스타라 부를 만했다. 스물두 살 나이에 5081 대 1 경쟁률을 뚫고 ‘로맨스 빠빠’(1960)에 출연하면서부터 청춘스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맨발의 청춘’(1964)은 그런 이미지에 정점을 찍었고 바로 그해 11월 엄앵란과 결혼으로 사실상 대관식을 치렀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정상을 지킨 원인을 외모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이름 석 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고, 그 이미지를 지키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배우는 언제나 배우여야 한다”는 자부심으로 매일 아침 냉수로 샤워하고 하루도 운동을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말년에도 30대 청년처럼 근육이 잡힌 건강한 몸을 유지했으며, 언제 어디서나 패셔니스타로 주목받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81년 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하며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그 명성에도 금이 갔다. 어렵게 출마해도 낙선을 거듭하며 빚더미에 올라앉아 부인이 식당을 운영하며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2000년 대구 동구에서 세 번째 도전 만에 당선했으나 2005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만 2년간 옥살이를 하고 정치인의 꿈도 접어야 했다. 

    이후 신성일의 행보는 대중의 통념을 뛰어넘었다. 2011년 발간한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선 고인이 된 아나운서 출신 여성과의 사랑을 고백해 유부남의 불륜을 미화했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인생의 동반자’ 엄앵란의 반응처럼 “그것도 신성일이니까 가능한 일”로 일단락됐다. 그 후 방송에 열심히 출연한 엄앵란을 통해 두 사람이 1978년부터 사실상 졸혼(卒婚)을 실천하고 있음이 밝혀져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그의 스타성은 마지막 순간에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11월 3일 저녁 사망설 오보로 세상을 들썩이게 하더니 결국 그다음 날 오전 2시 반 ‘별들의 고향’으로 떠나갔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만추’의 시간이었고, 한때 그를 사모했던 여성 팬들은 ‘겨울여자’처럼 코트 깃을 여미며 그를 추억했다.

    ※졸기(卒記) :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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