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국민의 본분을 다할 것을 선서합니다.”
8월 12일 경기 과천 정부과천청사에서는 한국 국적 증서 수여식이 열렸다.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특별귀화’를 허가받는 자리였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932명이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날 귀화한 외국인에는 김경천(1888~1942) 장군, 헤이그 특사였던 이위종(1887~?) 지사, 윌리엄 린튼(1891~1960) 선교사의 후손들이 포함됐다.
‘나는 한국인’ 자부심 갖고 성장
그중 유창한 한국어로 선서를 한 사람은 이준(50·프랑스명 필립 리) 변호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인(1896~1979)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 이 전 장관은 인권변호사로 독립운동가에게 무료 변론활동을 펼쳤다. 창씨개명을 반대했으며,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작고 시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부했다. 그의 아버지는 1960년대 말 프랑스 대학 최초로 한국학 전공을 창설한 이옥(1928~2001) 전 프랑스 파리7대학 교수다. 이 변호사 자신도 한국계 최초 프랑스 변호사다. 3대가 모두 ‘최초’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 변호사는 90년부터 한국에 정착해 김·장 법률사무소 등 로펌에서 일했고, 2005~2011년에는 한불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양국 교류에 힘써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현재는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다국적 로펌 존스 데이(Jones Day)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 국적 취득으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고 말한 그를 8월 14일 만났다.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 묘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릴 때는 국적이 행정적 요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성장한 후로는 국적이 제 정체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방한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이 사석에서 제게 물었어요.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순간 대답을 망설였어요. 그리고 ‘프랑스인이자 한국인’이라고 대답했죠. 저의 생물적, 문화적 뿌리에는 한국이 깊게 스며들어 있어요.”
이 변호사는 어린 시절에도 가족과 종종 한국 땅을 밟았다. 첫 고국 나들이는 만 네 살 때였다. 1969년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할아버지 댁을 찾았을 때 수십 명의 친척이 모인 풍경을 ‘충격’으로 기억한다.
“대가족이 모인 것도, 집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도 프랑스와 달랐죠. 어른들이 ‘신발 벗고 들어가라’고 하는데 왠지 부끄러워 신발을 신은 채 할아버지 안방으로 달려갔어요. 할아버지가 너그럽게 웃으며 저를 꼭 안아줬죠. 그때 할아버지의 커다란 품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제게는 원초적 행복의 기억입니다. 할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호방한 성격과 우렁찬 목소리는 기억에 생생해요.”
당시 가난했던 한국 사회는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그는 한국을 ‘어린이에게 정이 많은 나라’로 회상한다.
“한국 장난감이 매력적이었어요. 딱지나 구슬은 프랑스에 없던 거였죠. 환상적(fancy)인 색깔의 어린이용 양말도 기억에 남고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70년 남산에 세워진 어린이회관이었어요. 그때까지 프랑스에서 어린이를 위한 건물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또 한국에서는 남의 집 아이에게도 다정다감하게 대하잖아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한국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죠.” 이후 그는 4~5년마다 두 달의 여름방학을 서울에서 보냈다.
1970~80년대 프랑스에서 한국은 ‘독재정권’ ‘전쟁이 끝나지 않은 약소국’ 이미지였다. 고등학생이던 그는 친구들과 정치 토론을 하다 자연스레 한국을 대변하곤 했다.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때 프랑스인 급우가 “한국 스파이가 미군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려 싸운 적도 있다. 그만큼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강했다.
하지만 한국 문화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제자들을 모아 저녁밥을 사주곤 했다.
“프랑스에서는 교수가 학생에게 밥을 사지 않거든요. 아버지에게 ‘굳이 그렇게 돈을 쓸 필요가 있나’ 하고 묻기도 했어요. 나중에 한국 사회를 깊게 체험한 후에야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끈끈한 정이라는 것을요.”
할아버지의 생애 적극 알릴 것
그는 지난해 8월 특별귀화 제도를 알게 됐다. 신청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먼저 자신이 프랑스 국민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웠다. 필요한 서류는 출생증명서, 학교 졸업증명서 등이었다. 하지만 30여 년 전 졸업한 고등학교(Claude Monet·Lyce′e)에서는 “예전 자료 찾기가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우연히 행운이 찾아왔다. 그 학교가 올해 9월부터 외국어 과목으로 한국어를 개설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교 교장을 만나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2011년 프랑스 파리 국제대학촌(유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밀집한 구역)에 한국인 기숙사 설립이 확정됐을 때 법률 자문을 했다. 이때 알게 된 교육청 인사들을 통해 교장과의 만남이 수월하게 이뤄졌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아 귀화를 신청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귀화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1960년대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알리려고 노력한 것, 제가 한불 간 교류 증진을 위해 애써온 것, 프랑스의 한류 유행이 합쳐져 제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자 할 때 도움을 준 거죠.”
이 변호사는 내년까지 이 전 장관의 생애를 기리는 인터넷 웹페이지를 완성할 예정이다. 그는 이번 귀화를 계기로 할아버지의 업적을 깊이 연구하고 적극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이 강해졌다.
“한국 사회가 저희 할아버지를 비롯한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더 많이 배웠으면 합니다. 그분들이 국가를 위해 한 일들을 보면 한국의 발전 방향을 더 진지하게 모색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저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 사회의 성장에 적극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는 요즘 다국적 로펌에서 일하며 “‘세계 속 한국’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도전정신과 추진력이 강하고 야망이 크죠. 또 굉장히 창의적이어서 한류의 힘을 전 세계에 발휘하고 있어요. 저희 아버지가 한국학 전공자 3~4명을 겨우 모집했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수백 명이 전공을 신청할 정도입니다. 한국이 다른 문화와 융합하는 힘을 기른다면 국제적으로 더 큰 소임을 맡을 수 있을 겁니다.”
8월 12일 경기 과천 정부과천청사에서는 한국 국적 증서 수여식이 열렸다.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특별귀화’를 허가받는 자리였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932명이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날 귀화한 외국인에는 김경천(1888~1942) 장군, 헤이그 특사였던 이위종(1887~?) 지사, 윌리엄 린튼(1891~1960) 선교사의 후손들이 포함됐다.
‘나는 한국인’ 자부심 갖고 성장
그중 유창한 한국어로 선서를 한 사람은 이준(50·프랑스명 필립 리) 변호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인(1896~1979)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 이 전 장관은 인권변호사로 독립운동가에게 무료 변론활동을 펼쳤다. 창씨개명을 반대했으며,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작고 시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부했다. 그의 아버지는 1960년대 말 프랑스 대학 최초로 한국학 전공을 창설한 이옥(1928~2001) 전 프랑스 파리7대학 교수다. 이 변호사 자신도 한국계 최초 프랑스 변호사다. 3대가 모두 ‘최초’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 변호사는 90년부터 한국에 정착해 김·장 법률사무소 등 로펌에서 일했고, 2005~2011년에는 한불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양국 교류에 힘써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현재는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며 다국적 로펌 존스 데이(Jones Day)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 국적 취득으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고 말한 그를 8월 14일 만났다.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 묘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어릴 때는 국적이 행정적 요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성장한 후로는 국적이 제 정체성에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방한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이 사석에서 제게 물었어요. ‘당신 어느 나라 사람이오?’ 순간 대답을 망설였어요. 그리고 ‘프랑스인이자 한국인’이라고 대답했죠. 저의 생물적, 문화적 뿌리에는 한국이 깊게 스며들어 있어요.”
이 변호사는 어린 시절에도 가족과 종종 한국 땅을 밟았다. 첫 고국 나들이는 만 네 살 때였다. 1969년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할아버지 댁을 찾았을 때 수십 명의 친척이 모인 풍경을 ‘충격’으로 기억한다.
“대가족이 모인 것도, 집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것도 프랑스와 달랐죠. 어른들이 ‘신발 벗고 들어가라’고 하는데 왠지 부끄러워 신발을 신은 채 할아버지 안방으로 달려갔어요. 할아버지가 너그럽게 웃으며 저를 꼭 안아줬죠. 그때 할아버지의 커다란 품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제게는 원초적 행복의 기억입니다. 할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호방한 성격과 우렁찬 목소리는 기억에 생생해요.”
당시 가난했던 한국 사회는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그는 한국을 ‘어린이에게 정이 많은 나라’로 회상한다.
“한국 장난감이 매력적이었어요. 딱지나 구슬은 프랑스에 없던 거였죠. 환상적(fancy)인 색깔의 어린이용 양말도 기억에 남고요.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70년 남산에 세워진 어린이회관이었어요. 그때까지 프랑스에서 어린이를 위한 건물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또 한국에서는 남의 집 아이에게도 다정다감하게 대하잖아요.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한국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죠.” 이후 그는 4~5년마다 두 달의 여름방학을 서울에서 보냈다.
1970~80년대 프랑스에서 한국은 ‘독재정권’ ‘전쟁이 끝나지 않은 약소국’ 이미지였다. 고등학생이던 그는 친구들과 정치 토론을 하다 자연스레 한국을 대변하곤 했다.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때 프랑스인 급우가 “한국 스파이가 미군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려 싸운 적도 있다. 그만큼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이 강했다.
하지만 한국 문화 가운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제자들을 모아 저녁밥을 사주곤 했다.
“프랑스에서는 교수가 학생에게 밥을 사지 않거든요. 아버지에게 ‘굳이 그렇게 돈을 쓸 필요가 있나’ 하고 묻기도 했어요. 나중에 한국 사회를 깊게 체험한 후에야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끈끈한 정이라는 것을요.”
할아버지의 생애 적극 알릴 것
그는 지난해 8월 특별귀화 제도를 알게 됐다. 신청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먼저 자신이 프랑스 국민임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웠다. 필요한 서류는 출생증명서, 학교 졸업증명서 등이었다. 하지만 30여 년 전 졸업한 고등학교(Claude Monet·Lyce′e)에서는 “예전 자료 찾기가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우연히 행운이 찾아왔다. 그 학교가 올해 9월부터 외국어 과목으로 한국어를 개설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모교 교장을 만나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2011년 프랑스 파리 국제대학촌(유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밀집한 구역)에 한국인 기숙사 설립이 확정됐을 때 법률 자문을 했다. 이때 알게 된 교육청 인사들을 통해 교장과의 만남이 수월하게 이뤄졌다. 결국 그는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아 귀화를 신청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이 귀화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1960년대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알리려고 노력한 것, 제가 한불 간 교류 증진을 위해 애써온 것, 프랑스의 한류 유행이 합쳐져 제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자 할 때 도움을 준 거죠.”
이 변호사는 내년까지 이 전 장관의 생애를 기리는 인터넷 웹페이지를 완성할 예정이다. 그는 이번 귀화를 계기로 할아버지의 업적을 깊이 연구하고 적극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이 강해졌다.
“한국 사회가 저희 할아버지를 비롯한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더 많이 배웠으면 합니다. 그분들이 국가를 위해 한 일들을 보면 한국의 발전 방향을 더 진지하게 모색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인권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저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 사회의 성장에 적극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는 요즘 다국적 로펌에서 일하며 “‘세계 속 한국’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인은 도전정신과 추진력이 강하고 야망이 크죠. 또 굉장히 창의적이어서 한류의 힘을 전 세계에 발휘하고 있어요. 저희 아버지가 한국학 전공자 3~4명을 겨우 모집했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수백 명이 전공을 신청할 정도입니다. 한국이 다른 문화와 융합하는 힘을 기른다면 국제적으로 더 큰 소임을 맡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