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서울, 왜곡은 안 됐지만
4월 27일 오후 서울 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찾았다. 총 7편의 영화가 상영 중이었는데 ‘어벤져스2’는 4DX와 아이매스(IMAX) 상영관을 포함해 절반 넘는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었다. 오전 7시 50분 조조영화를 제외하면 오후 시간대에는 빈자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사람도 많았다. 대다수 관객이 궁금해한 건 한국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그리고 한국인 유전공학자 닥터 조로 출연한 여배우 수현의 비중이 얼마나 될지였다. 닥터 조가 등장해 어벤져스 멤버들과 영어 대사를 주고받을 때면 관객들이 집중하는 게 느껴졌고, YTN 앵커가 우리말로 뉴스를 보도하는 장면이나 서울 상암동 MBC 신사옥 위로 비행물체가 날아가는 장면에서는 ‘익숙한 우리 것’이 ‘낯선 외국 영화’에 나온 걸 재밌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게 전부였다. 자막으로 ‘서울’이라고 쓰지 않았다면 닥터 조의 연구소로 나오는 세빛섬은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든 가상 건물이라 해도 모를 정도였고, 지하철 전투 장면도 그게 꼭 한국의 2호선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오죽하면 최고 수혜자는 한글 간판이 크게 등장한 족발집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단순히 건물이 붕괴되고 치고받는 장면만 나와서 그런 게 아니다. 국외 관객(잠재적 관광객)들의 한국에 대한 궁금증 유발 실패가 문제였다. 프로도 경제효과를 노리고 제작비를 지원한 것인데, 우리끼리만 찾아보고 열광할 법한 우리나라의 모습이 담겼다. 오히려 작품 후반부 등장하는 가상의 동유럽 도시 소코비아는 울트론에 의해 난장판이 되지만 인상적인 랜드마크나 전경을 선보인 덕에 어딘지 궁금해졌다. 관객 사이에서도 ‘소코비아 어디’ ‘소코비아 촬영지’ 등이 핫한 키워드다.
문제는 ‘설레발’이었다. 지난해 서울에서 촬영할 당시 시민들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제작을 지원해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어벤져스2’ 제작진이 방한했을 때 국내 기관들은 전폭적으로 촬영을 지원했다. 마포대교를 통제했고 새벽부터 촬영지 인근을 통제했으며 촬영지를 경유하던 버스 노선을 조정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위원회는 국내 촬영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876억 원으로 추산했고, 한국관광공사는 직접 효과 4000억 원, 브랜드 제고를 포함한 장기적 효과를 2조 원으로 예상했다.
2014년 3월 서울 시내에서 진행된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촬영으로 마포대교 등이 통제됐다.
영화평론가인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어벤져스2’ 국내 촬영은 한국 고객의 성향을 잘 파악한 미국 마블사의 기획”이라며 영화 개봉에 따른 한국 홍보 효과는 “거의 없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강 교수는 “국내 관객은 배우들이 인터뷰에서 한국을 언급하거나, 내한해 인사하고 한복을 입는 이벤트 등을 좋아한다. 마블사 측에서도 한국 관객이 주요 고객이기 때문에 한국 촬영을 염두에 둔 것이고, 오히려 시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영화 홍보가 됐으니 얻어갈 게 많은 기획이었다. 처음부터 ‘어벤져스2’에 한국이 나온다 정도였으면 좋았겠지만, 할리우드 영화에 우리나라가 나온다는 것만으로 큰 경제적 효과를 보리라 생각한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가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촬영지 제공만으로는 관광 효과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스크립트나 콘티 점검 없이 막연하게 브랜드만 보고 제작비를 지원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해외 영화보다 국내 작품 지원을 통해 ‘한국만의 특수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외국 제작자들은 설령 국내에서 못 찍게 하더라도 CG까지 동원해 한국을 넣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국내 개봉 7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국인 유전공학자 닥터 조 역으로 나온 수현.
작품의 총 상영시간 141분 가운데 국내에서 촬영한 분량은 7분여의 전투 장면을 포함해 20분 안팎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노출 시간의 길고 짧음보다 임팩트가 없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정 평론가는 “여기가 서울이라는 걸 우리끼리만 알 수 있다. 첨단도시라 해도 세빛섬은 그저 특이한 건물, 연구소 이미지일 뿐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건 아니다. 기왕 찍을 거였다면 한옥 등 전통 문화를 배경으로 보여주는 게 나았을 듯하다. 영화 ‘가문의 영광4 : 가문의 수난’이 일본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찍었지만, 그 영화를 보고 일본에 가고 싶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로케이션 인센티브 제도를 유지하고, 자국에서 영화 촬영을 할 때 주변에 피해가 없도록 최소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버스 노선까지 바꿔가며 지나치게 통제해 문제였다. 이번 지원 결과가 실망스럽다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제도를 없애자고 할 수도 있는데, 국내외 가리지 않고 영상물 제작을 지원하는 건 중요하다. 다만 큰 영화에만 지원이 몰려 다른 작품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제대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영상물 로케이션에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는 “오히려 우리나라는 제도 도입이 다른 나라에 비해 늦은 편”이라고 말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빈번한 국가는 대부분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해외통신원 리포트에 따르면 캐나다에서는 캐나다 노동력을 고용하는 미국의 TV와 영화 제작사에 대해 리베이트 프로그램을 승인해 인건비의 22%를 돌려주고, 프랑스에서는 국제세액공제를 통해 외국 영화를 자국에서 촬영할 시 자국 내에서 사용한 해당 제작비의 20%를 400만 유로(약 47억 원) 한도 내에서 환급해준다. ‘설국열차’도 체코 로케이션 인센티브 지원을 받았고, ‘가문의 영광4 : 가문의 수난’은 80% 이상 일본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덕에 순제작비가 32억 원에 불과했다.
영화진흥위원회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자국에 와서 작품을 찍기만 하면 그 나라가 작품에서 어떻게 비치든 상관없이 제작비를 지원해주지만, 우리나라는 관광진흥개발기금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평가위원들이 영화를 보고 검토한 뒤 관광성 등 여러 요소를 따져 환급을 결정한다”고 밝혔다. ‘어벤져스2’ 제작진은 최근 영화진흥위원회 측에 제작비 환급을 위한 관련 서류와 영상물을 제출했다. 영화계에서는 ‘어벤져스2’가 최대 환급 예상액인 39억 원을 다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