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올해 외교부의 선택은 대통령의 오른편에 윤 장관, 왼편에 유흥수 주일본대사 자리를 배치하는 절충안이었다. 김장수 주중대사와 안호영 주미대사는 각각 윤 장관과 유 대사의 옆에 앉아 대통령으로부터 한 자리씩 떨어지는 ‘등거리’를 유지했다. 명분은 주요국 대사 가운데 최연장자인 유 대사를 배려했다는 논리. 한 당국자는 “하루가 다르게 날카로워지는 미 · 중의 신경전 사이에서 별걸 다 고민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탄했다.
#2 3월 20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방한과 함께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외교관들에게도 비상이 걸렸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 사드) 체계 문제와 관련해 왕 부장의 말 한 마디가 다양한 파장을 낳던 시점. 특히 기자들보다 왕 부장의 동선에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주한 일본대사관 관계자들이었다. 재한 중국 교민이나 한국 측 전문가들과의 만남은 물론, 개인적인 일정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며 ‘따라붙더라’는 중국 측의 불만이 새어나올 정도였다. 일본과 중국의 대립각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기, 이렇게 수집된 동향이 보안회선을 타고 곧바로 도쿄로 타전됐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3 4월 17일 밀로시 제만 체코 대통령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기념 행사 참석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이 기간 러시아에 가긴 하겠지만 붉은광장에서 열리는 열병식에는 참석하지 않겠다는 것. 제만 대통령은 유럽연합(EU) 가입국 중 유일한 참석 예정자였다.
제만 대통령은 그간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이 행사에 참석하더라도 악수조차 나누지 않고 외면하겠다”고 강조해온 바 있다. 크림반도 합병으로 날카로워진 서유럽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우려와 함께 ‘김 제1비서의 외교무대 공식 데뷔’에 들러리를 서지 않겠다는 게 체코 측 계산이었다. 5월 행사가 ‘30대 세습 독재자’의 권력 승계 추인 무대가 될 것이라는 국제사회 비판 분위기가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까지 영향을 끼친 셈이다.
‘류재길 경질’의 학습효과
2015년의 봄, 동북아는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사드 문제로 곤혹을 치른 한국의 처지는 이제 ‘모든 것을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 날 선 현실을 고스란히 체감케 했다. 모두가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다음 행보를 계산하는 상황. 공교롭게 겹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은 강대국들이 준비하는 행사에 누가 참여하고 누가 불참하는지가 고스란히 민감한 외교적 선택이 되는 기묘한 퍼즐을 만들어놓았다.
먼저 코앞으로 다가온 러시아의 전승기념행사. 김정은 제1비서의 참석 가능성은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4월 14일 노도철 내각 부총리, 이틀 뒤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으로 이어진 북한 고위 관계자들의 모스크바행(行)도 이러한 관측에 무게를 싣는다. 경제 · 군사협력을 위한 통상적인 방문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지만, 중론은 김 제1비서의 방러를 준비하는 정지작업이라는 쪽. 4월 22일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은 자국 언론에 “북한 당국자들과의 접촉에서 김 제1비서의 방문을 확인받았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양자 접촉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4월 11일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행사 불참을 공식화했다. 그 대신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인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을 특사로 파견한다는 것. 한 정부 당국자는 “북 · 중 · 러 3국 정상이 모인다면 미국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의 장이 되기 십상인데, 그 와중에 한국 대통령이 한자리를 차지한다면 백악관으로서는 경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부터 박 대통령의 참석이나 ‘모스크바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쉽지 않은 그림이었다는 취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특사로 누굴 보낼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난해 말 벌어진 이른바 ‘류길재 파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카드는 외교부 장관이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외교안보수석 순이고, 김 제1비서의 참석을 상정하면 통일부 장관도 후보에 들 수 있지만, 아무도 자원해서 ‘총대를 메려’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것. 지난해 12월 류길재 전 통일부 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자신을 대북특사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사실상 거절당했고, 이후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면서 신임을 잃었다는 관측이 경질 배경으로 제기된 바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습효과’가 국회의원이 정상급 외교 행사에 특사로 파견되는 이례적인 결말로 마무리된 셈. 현역 정치인인 윤 의원이 국내외적으로 주목받을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주간동아’와 통화에서 윤 의원은 “(내가) 박 대통령이 대북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세부사항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것”이라며 “이를 꺼리는 당국자가 있다면 소신이 없거나 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못 읽고 있다는 뜻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부분은 특사 결정 과정을 외교부가 주도적으로 처리했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참석 여부를 비롯한 주요 쟁점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전략적 논의보다 실무 차원에서 진행된 조정 작업에 가까웠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특사 파견 통보를 외교부 측으로부터 받았다는 윤 의원의 설명 역시 이와 맥이 닿는다. 외교안보라인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각자의 앞가림에 급급했던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아직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이어지는 뜨거운 화두는 중국이 9월 3일 베이징에서 개최하는 ‘항일전승(抗日戰勝) 70년’ 기념식. 중국 정부는 남북한을 포함한 관련국 정상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해둔 상태다. 외교관례를 감안하면 6월 말까지는 참석 여부를 통보해줘야 하는 시간표다. 사드 문제에서 정부가 활용했던 ‘전략적 모호성’ 카드는 들어설 틈이 없다는 뜻이다.
2014년 9월 3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베이징 인민항일전쟁기념관에서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헌화를 하고 있다. 이날 시 주석은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의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69주년’ 기념 좌담회에서 일본을 겨냥해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이 대일(對日) 견제 행보의 일환으로 정상외교를 활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한중 정상회담 직후 중국중앙(CC)TV는 ‘시진핑 주석이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와 한반도 식민지 해방 70년을 맞는 내년을 양국이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말했다’고 보도해 한국 정부를 당혹게 한 일이 있다. 이미 발표된 공동선언문에 일본 관련 대목이 배제됐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류였기 때문이다. 보도 직후 기사 내용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버티던 청와대는 결국 이튿날 사실이라고 시인하며 말을 바꾸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김정은 제1비서는 베이징에 가게 될까. 그간 급물살을 탔던 북 · 러 관계가 관측대로 ‘중국의 질투를 유발하려는 작전’이었다면, 5월 모스크바에서 푸틴과 만나 국제무대에 데뷔한 뒤 9월 베이징에서 시진핑과의 정상회담으로 앙금을 푸는 시나리오는 분명 최상의 그림이다. 행사에 참석한 주변국 정상들과 두루 악수를 나누고 지도자로서 위상을 인정받는다면, 특히 그중 하나가 남한 대통령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야말로 1960년대부터 갈고닦은 북한 특유의 ‘줄타기 외교’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의 말이다.
“김정은의 참석 이유는 고스란히 박근혜 대통령의 베이징행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미일 3국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압박하는 미국 측 기류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미·일 밀월국면이 눈에 띄게 빨라지면서 한국의 설 자리가 점차 좁아지는 추세 아닌가. 거꾸로 역사교과서 등 이어지는 일본의 도발적 행보를 감안하면, 중국의 승전행사가 반일(反日)행사가 될까 염려해 참석을 꺼리기도 쉽지 않다. 도리어 국내 유권자들의 비판을 살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베이징에 가지 않는다면? 3월 중순 방한한 전직 미 국무부 고위 관계자는 시진핑 시대 들어 중국이 집단지도 체제에서 1인 주도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 주석 개인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형성되는 등 사실상 마오쩌둥 시대로의 회귀에 가깝다는 것. 자국 내 지지를 위해 애국주의를 적극 활용해온 시 주석이 동북아 국제정치를 그 지렛대로 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중국은 보복한다”
특히 국내 전문가들은 최근 중국이 자신의 핵심 이익과 관련해서는 보복을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을 우려한다. 2012년 영토 갈등을 빚었던 필리핀에 대해 여행상품 판매 전면 중단과 농산품 검역강화 조치를 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한국의 선택에 따라, 서울과 제주를 찾는 중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는 상황 정도는 충분히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계산해야 할 변수는 차고 넘치지만,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이를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민해야 하는 박근혜 정부 외교안보라인의 실력이다. 5월 모스크바 행사와 관련해 보여준 ‘몸조심 행보’로는 절묘한 답안을 작성하기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 성완종 파문으로 상징되는 국내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집중력을 놓친 듯한 청와대와, 그런 청와대에 더는 기대도 두려움도 없어 보이는 정책 당국자들의 맥 빠진 모습이 그 정점이다. 박근혜 정부는 과연 종전 70주년이 켜켜이 쌓아놓은 국제 정치 방정식을 돌파해낼 여력이 있을까. ‘총성 없는 전쟁’의 시계는 지금도 째깍거리며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