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이 그래픽으로 만들어본 17만t급 쇄빙 LNG선. 이 배는 뱃머리를 들었다가 내려치는 방식으로 2.1m 두께의 얼음바다를 깨고 2노트로 항진한다.
비밀공작은 아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러시아가 펼치고 있는 세기(世紀)적인 사업명이다. 러시아의 국영 천연가스 추출 회사 ‘가스프롬’은 전 세계에서 추출되는 천연가스의 17%를 생산하는 세계 최대 가스 생산 업체다. 이 가스프롬이 2008년 12월 3일 이 사업을 시작했다.
야말은 지역 이름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우랄 산맥이 고개를 숙여가다 북극해로 700여km를 내지르는데, 그곳이 바로 야말 반도다. 행정구역으로는 ‘야말로네네츠 자치구’에 속한다. 야말은 현지어인 네네츠어로 ‘세상의 끝’이다. 우리말로 의역한다면 ‘극한 추위를 향한 땅끝’ 정도가 될 것이다. 겨울철 그곳은 영하 40도까지 기온이 내려간다. 한국인이 이 추위에 갑자기 노출되면 바로 호흡 곤란에 빠질 정도다.
야말 반도의 중심지가 나담인데, 이곳은 한겨울에도 7만5000여 명이 몰려든다. 바로 에너지 때문이다. 가스프롬은 나담에서 11개의 가스전(田)과 15개의 가스·석유·콘덴세이트전을 운영하고 있다. 콘덴세이트는 천연가스공(孔)에서 나오는 초경질 원유로, 콘덴세이트전에서는 천연가스가 나온다고 보면 된다. 가스프롬은 야말 반도에 2억3070만t의 콘덴세이트와 2억9180만t의 원유가 매장돼 있다고 본다.
금세기 들어 지구온난화로 북극해 항로가 주목받고 있다. 한국에서 벨기에로 가는 데 이 항로를 이용하면 인도양→수에즈운하→지중해를 지나는 현 항로보다 거리는 5000여km, 시간은 열흘 정도가 준다(북극해가 얼지 않았을 경우. 얼면 길어진다). 북극해 항로는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쪽을 지나는 것과 러시아 쪽을 지나는 것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관심을 끄는 것은 러시아 쪽 항로다.
북극해 항로 개척에 필용한 쇄빙 LNG선
항해를 오래 하다 보면 배에서 응급환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다른 배나 빙산과 충돌하는 사고도 당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육지에 있는 기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북극해에 면한 캐나다와 알래스카에는 그런 기능을 해줄 곳이 없다. 미국과 캐나다는 대서양과 태평양에 접해 있어 북극해 활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전략핵잠수함 등을 보내 옛 소련을 봉쇄할 수 있었기에 알래스카 북쪽에 해군기지 등을 만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극해를 지나던 배가 SOS를 쳐도 지원해줄 수 없게 됐다.
옛 소련은 대양으로 나갈 부동항(不凍港)이 적고 전략핵잠수함 세력도 크게 부족했기에 다른 선택을 했다. 북극해를 가로지르는 것이 미국을 공격하는 가장 빠른 길로 보고, 북극해 연안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와 전략폭격기용 비행장 등을 건설했다. 그곳엔 사람이 거주해야 하니 통신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을 건설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 야말 반도에서 천연가스를 생산하고 북극해 항로 개척을 논의하게 되자, 이것이 큰 자산이 됐다.
러시아는 야말 반도에서 나오는 천연가스 등의 수출을 통해 북극해 항로를 개발하기로 했다. 문제는 한겨울에 2m 두께로 얼어붙는 북극해 연안이었다. 이 얼음은 컨테이너 트럭이 올라가도 깨지지 않는다. 이 견고한 ‘얼음바다’는 엔진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반 쇄빙선으론 깨지 못한다. 쇄빙선을 매우 크게 만들고, 그 쇄빙선의 뱃머리를 얼음 위로 들어 올렸다가, 배 무게를 보태 ‘내려쳐야’ 비로소 쪼개진다.
러시아는 초대형 LNG(액화천연가스)선에 주목했다. 얼음을 깰 수 있도록 뱃머리엔 초강력 강판을 두르고, 특수 엔진을 장착해 뱃머리를 들었다가 반복해서 얼음을 내려치기로 한 것이다. 그때 배 안에 있는 LNG 용기가 충격을 받아 깨지면 대폭발이 일어나니 LNG 용기는 더 단단하게 만든다.
대략 이러한 논의와 연구 끝에 러시아는 17만t의 LNG를 탑재하는, 길이 310여m의 초대형 쇄빙 LNG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쇄빙 LNG선은 사람이 걷는 것과 비슷한 2노트(시속 약 3.7km) 속도로 2.1m 두께의 얼음바다를 깨며 나아갈 수 있다. 매우 느린 속도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북극해를 통과해 LNG를 수출하겠다는 것이 바로 야말 프로젝트다.
17만t짜리 일반 LNG선의 건조 가격은 2억 달러(약 2159억 원)지만 쇄빙 LNG선은 3억1000만 달러(약 3347억 원)일 것으로 추산됐다. 러시아는 이 배를 15척 확보하겠다고 공고했다. 쇄빙 LNG선 건조는 유례없는 일이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 능력을 갖춘 한국만 도전해볼 수 있다.
이 경쟁에서 대우조선해양이 최종 승자가 됐다(2013년 7월 3일). 조선업계 국내 매출 순위 3위이자 세계 3위인 대우조선해양이 승리한 데는 LNG선 건조에 특화됐다는 것과 함께, 이 회사 윤종구 고문(전 러시아 주재 국방무관)의 구실이 컸다는 후문이다. 윤 고문의 차남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차녀와 열애설이 있었던 청년으로, 현재 그는 외국인을 고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가스프롬에서 일하고 있다.
경영권 불안과 러시아 경제위기라는 난제
2013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한러 정상회담. 이 회담에서도 한국의 야말 프로젝트 참여는 중요한 논제가 됐다(위). 야말 반도 위치(붉은색).
대우조선해양은 외환위기로 대우그룹이 해체된 다음인 2000년 대우중공업에서 분리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공적자금을 받은 이 회사는 2001년 워크아웃에서 벗어났으나 최대 주주는 공적자금을 투입한 KDB산업은행(산업은행)이 됐다.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을 정상화한 다음 매각하려 했으나 지금까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은행은 최근 러시아의 쇄빙 LNG선 사업을 따낸 고재호 사장 등을 퇴임시키고 과거 대우조선을 이끌었던 정성립 씨를 새 사장에 선임했다. 이에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가는 회사를 왜 매각하려 하는가”라며 반발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경영권 불안이라는 내우(內憂)와 러시아의 경제위기라는 외환(外患)을 동시에 맞은 것이다.
경제위기에 대해 러시아는 ‘야말 프로젝트는 러시아 명운이 걸린 사업이라 어떤 일이 닥쳐도 해내겠으니, 한국은 예정대로 쇄빙 LNG선을 건조하라’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경영권 불안 문제를 일소하고 야말 프로젝트 사업을 수확해낼 수 있을 것인가. 기업의 미래는 경영 능력뿐 아니라 국제 정치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