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김성근 신임 감독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마무리훈련에서 수비 연습을 시키고 있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는 환경이 다르다. 구단은 매년 매우 한정된 전력 보강만 가능하다. 메이저리그 구단은 루키, 로 싱글, 하이 싱글, 더블, 트리플A로 이어지는 등 마이너리그 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선수를 끊임없이 공급하지만 국내 팀은 유망주 풀도 매우 적다.
갖고 있는 전력의 변화가 어려운 구도에서 팀 전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감독의 구실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팀 구성과 유망주 발굴에도 영향을 미친다.
식당과 비교하면, 메이저리그는 셰프 실력보다 얼마나 다양한 고급 재료를 공급하느냐가 중요한 뷔페라면, 한국 프로야구는 맛과 특징으로 승부해야 하는 단품 맛집과 같다.
한국 프로야구도 최근 프런트, 즉 단장과 경영진 쪽으로 무게감이 기울어가는 팀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주류는 감독이다. 두산은 지난해 프런트가 지향하는 방향을 맞추고자 일본 프로야구 출신 송일수 감독을 영입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선수단을 유기적으로 화합시키지 못했고 최근 야구 흐름도 쫓아가지 못했다.
제10구단 kt가 1군에 데뷔하는 2015 시즌에는 각각 색깔이 다른, 그러나 특별한 인연으로 얽힌 감독들의 뜨거운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동기이자 일생일대 라이벌
KIA 김기태 감독, kt 조범현 감독, NC 김경문 감독, LG 양상문 감독(위부터).
고교 시절 같은 팀에서 뛸 뻔하기도 했던 두 감독은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두산의 옛 팀 이름 OB에서 함께 데뷔했다. 현역 시절 수비와 투수 리드가 매우 뛰어났던 두 감독은 치열한 주전 경쟁을 펼쳐야 했다.
2003년 조범현 감독이 SK에서 먼저 감독이 돼 지도자로는 한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 해 조 감독은 SK를 창단 후 첫 한국시리즈 진출로 이끌었고 막강 팀 현대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아름다운 2등’이라는 찬사가 따랐다. 이후 각 팀은 40대 초반 신인 감독이 몰고 온 신선한 새바람에 주목했다.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큰 구실을 했던 고(故) 이종남 기자는 저서 ‘종횡무진 인천야구’에서 “조범현 감독의 성공 이후 각 구단은 어디에 저런 참신한 인재가 숨어 있었느냐고 감탄하며 새 얼굴 찾기에 분주했다”’고 당시 상황을 그렸다. 이듬해 두산은 같은 40대에, 같은 포수 출신 김경문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김경문 감독은 2012년 신생팀 NC를 맡았고 조범현 감독은 2009년 KIA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룬 뒤 2014년 새로운 신생팀 kt 사령탑에 올랐다.
서로에 대해 “나는 이루지 못한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이다”(김경문), “올림픽(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감독이다. 그리고 신생팀을 2년 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다. 배울 점이 정말 많다”(조범현)며 치켜세우는 두 포수 출신 감독은 2015년 다시 그라운드에서 마주한다.
애정의 사제지간 지략 대결
2011년 SK에서 경질된 이후 고양 원더스를 이끌던 김성근 감독은 한화 유니폼을 입고 프로리그에 복귀했다. 프런트 야구가 조금씩 바람을 일으키는 시점에 귀환한 강력한 사령탑이다.
김성근 감독은 조범현 감독에게는 고교 은사(충암고), 김경문 감독에게는 프로(OB)에서 스승이라는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 1984년 OB 감독으로 사령탑에 데뷔한 김 감독은 70대 나이지만 여전히 강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압도한다. 야구계에서 그를 평가하는 시각은 양쪽으로 극명히 갈린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깊이 있는 그의 지식과 열정, 탐구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고교 시절에는 제자였고 감독과 선수, 감독과 코치로 인연을 맺은 조범현 감독은 데이터를 활용한 성공 확률이 높은 작전을 편다. 전력분석팀의 현미경 관찰과 철저한 시뮬레이션으로 한 시즌을 준비하는 김성근 감독의 야구와 공통분모가 많다. 그러나 김경문 감독은 국내 리그에서 ‘빅볼’을 가장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희생번트보다 화끈한 공격 야구를 펼친다. 2000년대 후반 번번이 SK 김성근 감독에게 막혀 한국시리즈 정상에 서지 못한 아픈 기억도 있다.
KIA 사령탑을 맡은 김기태(45) 감독은 김성근 감독과 조범현 감독 밑에서 선수 시절 모두 주장을 맡았던 인연이 있다. 쌍방울 시절 김기태 감독은 1군 선수단 절반 이상이 자신보다 선배였지만 20대에 주장을 맡아 팀을 강하게 이끌었다.
김성근 감독이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웠던 그 시절 주장으로 솔직한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2년 김성근 감독이 LG에서 경질되자 100여 명의 선수, 코치를 모아 성대한 회갑연을 열어 쓸쓸해하던 스승에게 큰 감동을 선물하기도 했다. 조범현 감독과는 SK 시절 주장으로 함께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LG 양상문 감독도 김성근 감독이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애제자다. 대학 시절(고려대) 강속구를 던지는 좌완 투수였던 양 감독은 아마추어 시절 잦은 등판으로 프로 데뷔 후에는 빠른 공을 점차 잃었지만, 정교한 제구와 타자의 허를 찌르는 ‘두뇌 피칭’으로 명성을 날렸다.
김성근 감독과는 1977년 청소년대표팀 감독과 고교 선수로 처음 만났다. 이후 1989~90년 태평양에서 감독과 선수로 재회했다. 김성근 감독은 양상문 감독의 두뇌 피칭을 높이 평가했다. 두 감독은 2002년 LG에서 감독과 코치로 인연을 이어갔다. 김 감독은 SK 사령탑 시절 양 감독이 집필한 신문 칼럼을 선수단 로커에 붙여놓고 모두 정독하라고 지시하는 등 깊은 애정을 보여왔다.
양상문 감독은 김경문 감독과 학창 시절 투수와 포수 배터리로 호흡을 맞춘 사이이기도 하다. 5명의 감독은 김성근 감독을 정점으로 같은 팀에서 동료 혹은 감독과 선수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안다. 야구는 상대방을 속여야 승리하는 경기다. 이들의 치열한 경쟁은 11월 마무리캠프에서 강도 높은 훈련으로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