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아 실버 박사는 은퇴 후 20여 년 동안 실리콘오일 투입량에 따라 도수를 조절할 수 있는 안경을 만들었다.
1985년 아프리카에는 안경 관련 기관이 거의 없었다. 시력을 확인하는 검안의는 인구 10만 명당 1명꼴이었다. 아프리카인이 검안의를 만날 수 있는 확률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이에 반해 영국은 안과전문의가 인구 2500명당 1명으로 아프리카보다 의료접근성이 40배나 높았다. 실버 박사는 국제기구들이 아프리카에서 일하는 방식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병원시설을 짓고, 안과전문의를 선발해 파견하고,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방식은 예산 측면에서 불가능하다”면서 “병원과 전문의 수를 늘리기보다 도수를 조절할 수 있는 안경을 만드는 것이 문제해결의 열쇠”라고 판단했다.
‘도수를 조절할 수 있는 안경’은 실버 박사 자신에게도 생소했다. 그조차도 아이디어만 있을 뿐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명과학자도, 안과전문의도 아닌 그가 인간의 눈 구조와 안경 구성물을 재해석하는 일은 모험이었다.
“우리가 아는 안경은 안경렌즈 따로, 안경테 따로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 가능
액체안경 덕에 개발도상국 아이들은 책을 읽을 수 있고, 어른들은 일손을 거들어 가계소득을 높일 수 있었다.
“안경렌즈를 딱딱한 물체로만 만들지 말고, 알 두께를 조절할 수 있는 액체로 만들어보자.”
실버 박사는 도화지에 자신이 생각해낸 안경 모습을 그려갔다. 그러곤 액체를 집어넣을 수 있는 안경렌즈는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그 액체를 집어넣는 주사기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궁리했다.
그는 수년 동안 다양한 모델을 만든 뒤 최종 모델로 실리콘오일을 이용한 안경렌즈와 안경테를 내놓았다. 안경테 옆에 주사기를 달고, 주사기 안에 실리콘오일을 넣어 안경렌즈 안으로 액체를 주입하는 독특한 안경이었다. 실리콘오일을 넣는 이유는 밀도가 일정해 시력을 맞추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증발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용자들은 이 안경을 쓴 모습이 세련되지 않았음에도 호평을 쏟아냈다. 먼저 검안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시력이 얼마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시력에 맞춰 안경도수를 결정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가리고 안경 조절바퀴를 뒤로 돌리세요. 눈앞 시야가 선명해질 때까지 실리콘오일의 투입량을 조절하면 됩니다”라는 실버 박사의 설명대로 하면 누구나 본인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쓸 수 있었다.
액체안경은 남녀노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난시가 있는 10대 어린이, 근시가 있는 20대 청년, 노안이 시작된 40대 주부, 원시가 있는 80대 노인까지 만족스러워했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했다. 19달러(약 2만 원). 5000원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안경 값 2만 원은 큰돈이지만 안경을 이용한 뒤 그들의 삶은 눈에 띄게 개선됐다. 아이들은 책을 읽었고, 청년은 일자리를 얻어 가계소득을 높였다. 주부는 채소를 팔러갈 수 있었고, 할아버지는 일손을 거들었다.
혁신을 거듭하는 디자인
실버 박사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개발도상국의 시력을 위한 센터(Centre for Vision in the Developing World)’를 만들어 제품을 개선해나갔다. 특히 가난해서 앞을 선명하게 볼 기회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차일드 비전’이란 액체안경을 개발했다. 겉모습에 민감한 아이들을 고려해 부착과 분리가 되는 액체 삽입 주사기를 만들었다. 아이들이 주사기로 실리콘오일 양을 조절해 도수를 맞춘 뒤 주사기를 떼어내는 안경이었다. 아이들은 한결 가벼워진 안경에 만족해했다. 그리고 혁신을 거듭해 아이들이 성장하며 얼굴도 커진다는 점을 고려해 안경알 사이에 있는 이음새 간격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안경은 제3세계 아이들뿐 아니라 영국 아이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80대 초반인 안경 박사 조슈아 실버. 20년 넘게 안경을 개발한 그는 남은 생애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연구하는 시간으로 채울 계획을 세웠다.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된 이후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는 지금도 더 좋은 액체안경을 개발하느라 여념이 없다.
“세상에는 10억 가까운 인구가 안경 없이 살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게 꾸려가려면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안경 가격이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수백만 명이 안경을 구매할 수 있다.”
안경 가격이 쌀수록 많은 사람이 인생의 빛을 볼 수 있으리라 믿는 실버 박사. 그의 바람대로 이미 전 세계 10만 명 이상이 밝은 눈을 갖게 됐다. 실버 박사는 그들의 밝은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늘도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 기술은 누군가의 가려진 고통과 아픔까지 해결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