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미스 김’이라는 호칭은 여사원을 마치 커피 타는 존재 정도로 치부했던 과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명사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 검색창에 ‘미스 김’이라는 단어를 치면 이른바 ‘미스 김 어록’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쏟아진다. ‘직장의 신’ 여주인공 미스 김(김혜수 분)이 드라마 속에서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제인 것. 누군지 존재 자체마저 희미해져버렸던 ‘미스 김’이라는 지칭은 이제 드라마 속에서 슈퍼 갑(甲) 계약직원으로 탄생한 미스 김에 의해 숨죽였던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미스 김 가라사대, 회식이란 “업무의 연장”이 아니다. 그건 그냥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처럼 소속이 없는 사람, 즉 비정규직은 회식에 참석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 미스 김 가라사대, 회사란 “생계를 나누는 곳이지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니며,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곳이지 예의를 지키는 곳이 아니다.” 미스 김 가라사대, 업무란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걸로 오버했다간 자기 목만 날아가는 것”이며, 사내 연애란 “밝히는 수컷들과 속물적인 암컷들이 하는 불공정 짝짓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스 김 가라사대, 정규직이란 “회사에 속박된 노예”일 뿐이다.
현실과 신분 뒤집는 통쾌한 어록
드라마 시작 부분에 어김없이 들어가는 내레이션처럼,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에 이제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된” 마당에 미스 김의 능동적 비정규직 선언(?)은 그 자체가 통쾌한 도발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지는 신자유주의의 현대판 신분사회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를 절망케 하는 원인이 아닌가. 똑같이 일해도 월급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 자본이 만들어낸 이 시스템에서 비정규직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정규직이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현대판 신분을 뒤집는 미스 김의 통쾌한 발언들이 어록으로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
능동적 비정규직 미스 김이란 캐릭터가 가능한 건 모든 것이 계약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Y-JANG에 계약직으로 입사할 때 제시한 이른바 ‘미스 김 사용설명서’는 그녀 스스로를 회사 도구로 인정하는 계약서인 셈이다. 그런데 미스 김은 바로 이 계약서를 무기 삼아 모든 시간외 활동을 수당으로 바꾼다. 또 그녀는 계약서에 근거한 대로 회사 일과 회사 밖 일을 철저히 분리한다. 그래서 그녀는 회사에서 절대 사사로이 웃지 않는다. 그녀가 웃는 것은 그것이 일일 때뿐이다(이를 테면 홈쇼핑 모델로 나갔을 때 같은). 시간이 되면 출근하고, 동료나 후배가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해도 “아니요!”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1초도 틀리지 않고 퇴근하는 마치 로봇 같은 그녀의 행동은 회사(심지어 동료들까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퇴근해 사적으로 돌아오면 그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녀는 ‘마추피추’라는 살사 바에서 대단히 열정적이고 사교적인 여성으로 돌아간다. 계약에 의한 공사 구분. 쿨(cool)한 미스 김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미스 김의 철저한 이중생활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그것은 회사가 미스 김에게 준 트라우마와 관계있다. 드라마는 미스 김이 과거 한 은행의 화재와 연루돼 있고 거기서 그녀의 직장 선배가 죽었으며 결국 정리해고당하는 상처를 겪었다고 설정한다.
하지만 굳이 이런 구체적 설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회사가 주는 아픔을 미뤄 알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은 우리 시대 회사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회사로부터 들었던 말이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회사를 하나의 가족관계로 받아들였던 이들에게 버려짐은 크디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미스 김의 상처는 아마도 외환위기 이후 무한경쟁 시대의 회사가 회사원들에게 준 아픔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직장의 신’에 나타나는 인물관계는 그 사적 이야기를 넘어 확장됨으로써 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로 공감된다. 회사에 상처를 받고 능동적 비정규직이 된 미스 김이 하나의 판타지적 희망이라면, 무정한(이희준 분) 같이 회사에서 능력 발휘는 못하지만 부하직원들을 챙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상사’는 우리의 현실적 희망일 것이다.
또 정주리(정유미 분)는 삼류대를, 그것도 학자금 대출로 빚만 잔뜩 떠안은 채 나와 3개월 계약직이라는 불안한 고용에 전전하며 정규직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전형적인 88만 원 세대의 표본이다. 그 정반대 축에 있는 금빛나(전혜빈 분)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직장조차 취미생활 하듯 다니는 전형적인 유한계급을 대변한다.
빵빵 터지는 코미디지만 불행한 캐릭터
그렇다면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이들은 회사가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유한계급 금빛나와 88만 원 세대 정주리의 차이는 그 요원함을 보여준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과 짝퉁 가방의 차이,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와 콩나물시루 버스가 말해주는 빈부 차이는 두 사람의 친구, 아니 동료관계가 얼마나 얄팍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준다. 이들의 관계란 결국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날 밤 벤치에서 장규직(오지호 분)이 왜 자신도 모르게 미스 김에게 키스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후로 장규직은 겉으론 미스 김과 대립하면서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 도대체 왜 이런 화학작용이 생기는 걸까. 그것은 장규직이라는 정규직을 대변하는 인물이 능동적인 비정규직을 주창하는 미스 김이라는 인물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갖기 때문은 아닐까. 비정규직을 철저히 밟으며 정규직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마초 장규직 또한 어쩌면 시스템이 만든 희생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져 치열한 신분 경쟁을 하게 됐을까.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떨어질 것에 공포를 느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 시스템은 그들이 원했던 게 아니라 회사가, 사회가 만들어놓은 덫은 아닌가. 즉 ‘직장의 신’이 보여주는 미스 김이라는 비정규직과 장규직이라는 정규직 캐릭터의 대립은 사적 감정에 의해 생겨나는 게 아니라 회사나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나타나 모든 일을 해결하는 슈퍼 워킹우먼 미스 김이 제아무리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걸 말해준다. 또 아부를 떨어가며 어떻게든 그 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장규직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다만 생존하려고 인간적인 면 하나를 포기한 셈이니까. 88만 원 세대 정주리의 불행이야 두말할 필요 없지만, 금빛나라고 해도 그녀가 쥔 물질이 그녀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또 무정한은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은 그런 인물을 성공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어째서 볼수록 빵빵 터지는 코미디임에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불행한 인물뿐일까. 비극이 희극을 만든다고 했다. 결국 미스 김 신드롬은 슬픈 현실이 만들어낸 반작용의 소산이다. 언제쯤 이 땅의 굳어버린 미스 김들의 입가에 진정한 미소가 피어날 수 있을까. ‘직장의 신’ 미스 김의 지나치게 굳은 얼굴을 볼 때마다 웃기면서도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 검색창에 ‘미스 김’이라는 단어를 치면 이른바 ‘미스 김 어록’이라는 연관 검색어가 쏟아진다. ‘직장의 신’ 여주인공 미스 김(김혜수 분)이 드라마 속에서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제인 것. 누군지 존재 자체마저 희미해져버렸던 ‘미스 김’이라는 지칭은 이제 드라마 속에서 슈퍼 갑(甲) 계약직원으로 탄생한 미스 김에 의해 숨죽였던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미스 김 가라사대, 회식이란 “업무의 연장”이 아니다. 그건 그냥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일 뿐이다. 그러니 자신처럼 소속이 없는 사람, 즉 비정규직은 회식에 참석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 미스 김 가라사대, 회사란 “생계를 나누는 곳이지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니며,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곳이지 예의를 지키는 곳이 아니다.” 미스 김 가라사대, 업무란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걸로 오버했다간 자기 목만 날아가는 것”이며, 사내 연애란 “밝히는 수컷들과 속물적인 암컷들이 하는 불공정 짝짓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스 김 가라사대, 정규직이란 “회사에 속박된 노예”일 뿐이다.
현실과 신분 뒤집는 통쾌한 어록
드라마 시작 부분에 어김없이 들어가는 내레이션처럼, “IMF 이후 16년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에 이제 한국인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 된” 마당에 미스 김의 능동적 비정규직 선언(?)은 그 자체가 통쾌한 도발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지는 신자유주의의 현대판 신분사회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를 절망케 하는 원인이 아닌가. 똑같이 일해도 월급은 정규직의 절반밖에 안 되고,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 자본이 만들어낸 이 시스템에서 비정규직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정규직이 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암담한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현대판 신분을 뒤집는 미스 김의 통쾌한 발언들이 어록으로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
능동적 비정규직 미스 김이란 캐릭터가 가능한 건 모든 것이 계약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Y-JANG에 계약직으로 입사할 때 제시한 이른바 ‘미스 김 사용설명서’는 그녀 스스로를 회사 도구로 인정하는 계약서인 셈이다. 그런데 미스 김은 바로 이 계약서를 무기 삼아 모든 시간외 활동을 수당으로 바꾼다. 또 그녀는 계약서에 근거한 대로 회사 일과 회사 밖 일을 철저히 분리한다. 그래서 그녀는 회사에서 절대 사사로이 웃지 않는다. 그녀가 웃는 것은 그것이 일일 때뿐이다(이를 테면 홈쇼핑 모델로 나갔을 때 같은). 시간이 되면 출근하고, 동료나 후배가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해도 “아니요!”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1초도 틀리지 않고 퇴근하는 마치 로봇 같은 그녀의 행동은 회사(심지어 동료들까지)와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가 퇴근해 사적으로 돌아오면 그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녀는 ‘마추피추’라는 살사 바에서 대단히 열정적이고 사교적인 여성으로 돌아간다. 계약에 의한 공사 구분. 쿨(cool)한 미스 김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미스 김의 철저한 이중생활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그것은 회사가 미스 김에게 준 트라우마와 관계있다. 드라마는 미스 김이 과거 한 은행의 화재와 연루돼 있고 거기서 그녀의 직장 선배가 죽었으며 결국 정리해고당하는 상처를 겪었다고 설정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 포스터.
그래서 ‘직장의 신’에 나타나는 인물관계는 그 사적 이야기를 넘어 확장됨으로써 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로 공감된다. 회사에 상처를 받고 능동적 비정규직이 된 미스 김이 하나의 판타지적 희망이라면, 무정한(이희준 분) 같이 회사에서 능력 발휘는 못하지만 부하직원들을 챙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상사’는 우리의 현실적 희망일 것이다.
또 정주리(정유미 분)는 삼류대를, 그것도 학자금 대출로 빚만 잔뜩 떠안은 채 나와 3개월 계약직이라는 불안한 고용에 전전하며 정규직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전형적인 88만 원 세대의 표본이다. 그 정반대 축에 있는 금빛나(전혜빈 분)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직장조차 취미생활 하듯 다니는 전형적인 유한계급을 대변한다.
빵빵 터지는 코미디지만 불행한 캐릭터
그렇다면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이들은 회사가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유한계급 금빛나와 88만 원 세대 정주리의 차이는 그 요원함을 보여준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과 짝퉁 가방의 차이,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와 콩나물시루 버스가 말해주는 빈부 차이는 두 사람의 친구, 아니 동료관계가 얼마나 얄팍할 수밖에 없는지를 말해준다. 이들의 관계란 결국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날 밤 벤치에서 장규직(오지호 분)이 왜 자신도 모르게 미스 김에게 키스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 후로 장규직은 겉으론 미스 김과 대립하면서도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 도대체 왜 이런 화학작용이 생기는 걸까. 그것은 장규직이라는 정규직을 대변하는 인물이 능동적인 비정규직을 주창하는 미스 김이라는 인물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갖기 때문은 아닐까. 비정규직을 철저히 밟으며 정규직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마초 장규직 또한 어쩌면 시스템이 만든 희생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져 치열한 신분 경쟁을 하게 됐을까.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떨어질 것에 공포를 느끼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 시스템은 그들이 원했던 게 아니라 회사가, 사회가 만들어놓은 덫은 아닌가. 즉 ‘직장의 신’이 보여주는 미스 김이라는 비정규직과 장규직이라는 정규직 캐릭터의 대립은 사적 감정에 의해 생겨나는 게 아니라 회사나 사회라는 시스템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갑자기 나타나 모든 일을 해결하는 슈퍼 워킹우먼 미스 김이 제아무리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라고 해도 그녀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그걸 말해준다. 또 아부를 떨어가며 어떻게든 그 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는 장규직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다만 생존하려고 인간적인 면 하나를 포기한 셈이니까. 88만 원 세대 정주리의 불행이야 두말할 필요 없지만, 금빛나라고 해도 그녀가 쥔 물질이 그녀를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또 무정한은 이상적이긴 하지만 현실은 그런 인물을 성공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어째서 볼수록 빵빵 터지는 코미디임에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불행한 인물뿐일까. 비극이 희극을 만든다고 했다. 결국 미스 김 신드롬은 슬픈 현실이 만들어낸 반작용의 소산이다. 언제쯤 이 땅의 굳어버린 미스 김들의 입가에 진정한 미소가 피어날 수 있을까. ‘직장의 신’ 미스 김의 지나치게 굳은 얼굴을 볼 때마다 웃기면서도 슬플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