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제공·휴이넘 출판사 ‘박씨부인전’
그러나 박씨 부인은 스스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인물은 아니다. 그녀가 정말 자신의 흉측한 외모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예뻐지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추할 때나 아름다울 때나 늘 행동이 똑같다. 그녀의 외모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쪽은 남편 이시백과 시댁 사람들이지, 그녀는 아니다. 그녀는 조용히 자기 재능을 갈고닦아 집안을 일으키고 나라 환난을 막는 데 평생을 바친다. ‘박씨 부인이 이렇게 애를 쓰는 동안 세상 남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박씨 부인은 비루먹은 것처럼 보이는 초라한 말을 ‘천리마’로 키운다. 그녀가 쓴 문장은 이태백과 겨뤄도 뒤지지 않으며, 바느질 솜씨도 뛰어나 하룻밤에 시아버지 조복(관원이 조정에 나가 하례할 때 입던 예복)을 능수능란하게 지어낼 정도다. 그녀 성품과 재능을 인정하는 사람은 시아버지뿐이다. 시어머니는 그녀를 박대하고, 하인들과 노복들조차 그녀를 대놓고 무시한다.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부탁해 집안에 자신이 머물 거처를 따로 마련한 뒤 ‘피화당(避禍堂)’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런데 이 이름 자체가 슬픔을 자아낸다. 말 그대로 ‘화’를 피하는 공간. 온 집안 식구의 냉대와 질시를 피해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의 진가는 남자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큰 환난, 즉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발휘된다. 그녀는 온갖 나무를 무성하게 심어 피화당 주위를 감쌌는데, “이후 불행한 때를 만나면 저 나무로 화를 면하기 위해서”다. 그녀는 전쟁이 코앞에 닥쳤을 때도 위기를 모른 척하던 남자들과 달리, 평화 시 만반의 준비를 갖춰 위기 시대에 대비한 것이다.
오직 시아버지만 내 편
시집온 후 3년 내내 남편 냉대로 마음고생을 한 박씨 부인은 어느 날 친정에 다녀오고, 도술에 능한 친정아버지로부터 “이제 네 액운이 다 끝났다”는 말을 듣는다. 못생긴 것을 넘어 거의 그로테스크한 괴물 형상을 해 남편마저 멀어지게 했던 그녀 외모는 그날 밤 허물을 벗고 눈부신 여신급 미모로 변신한다. 이때부터 박씨 부인의 소임은 가정을 지키고 윤택하게 하는 것을 넘어 나라를 구하는 일로 확장된다. 천기를 읽은 박씨 부인은 청나라 군사의 침입을 미리 이시백에게 알려주고, 이시백은 박씨 부인의 말을 조정에 전한다.
그러나 간신 김자점의 선동과 술책으로 조선은 청나라 침입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김자점의 논리는 “박씨는 요망한 계집”이므로 “국가 대사를 아이 희롱같이” 여인의 말만 듣고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왕은 박씨 부인의 현묘한 재능을 익히 알아 그녀의 말을 경청하려 했지만 이미 여론을 장악한 김자점을 당해낼 수 없다.
여성이 직접 조정대신 회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말 한마디에 조정 전체가 뒤흔들리는 장면은 흥미롭다. 작자 미상의 ‘박씨전’은 남성들이 실패해버린 전쟁, 그 역사의 오점을 여성 힘으로 ‘다시 쓰기’ 하려는 민중 욕망을 대변하는 듯하다. 역사적 실패를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없다. 하지만 문학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더는 그렇게 당하고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미래를 위해 과거 역사를 ‘고쳐 쓰기’ 할 수 있는 ‘환상성’이라는 특권을 사용한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최악의 현실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을 기리려고.
피화당의 의미 변화
더는 남편 등 뒤에서 조언하는 일에 만족할 수 없던 박씨 부인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대적한다. 박씨 부인이 용골대, 용울대 등 청나라 장수를 무찌르는 장면은 홍길동이나 전우치가 적들을 물리치는 방식과 흡사하다. 바로 ‘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환상적 전투다. 여기서 도술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실현하려는 대안적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여성이 실제로 정치나 전쟁에 참여하기 힘든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모험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여기서 피화당의 공간적 가치가 빛을 발한다. 피화당은 이제 박씨 부인의 어엿한 베이스캠프가 된다. ‘한낱 여자’에게 당한 것을 참지 못한 용골대는 무서운 기세로 피화당을 선제공격한다. 박씨 부인은 옥화선을 쥐고 불을 붙인 뒤 적들을 공격해 청나라 군사는 타죽고 밟혀죽고 도망치느라 아비규환을 이룬다. 이때 거대한 숲처럼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피화당은 이 가공할 화공작전의 무기가 된다. 박씨 부인은 마침내 남성들이 실패한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는 구원의 여신이 된 것이다.
피화당은 박씨 부인의 개인적 은신처로 시작해 전쟁 베이스캠프로 거듭나고, 전쟁에서 가장 먼저 버려지는 여성들의 피난처가 된다. 전쟁이 발발하자 박씨 부인이 가장 신경 쓴 것은 여성들의 안전이다.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동안, 여성들은 목숨뿐 아니라 정조를 위협받았다. 그들이 정조를 지키려 목숨을 버리고 ‘열녀’가 되면, 살아남은 아이들은 전쟁고아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여성에게 가장 심한 욕설로 통하는 ‘화냥년’은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한 말로, 비극적인 역사를 상징한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간신히 살아 돌아온 여성을 남성은 다시 아내로 받아주지 않았다. 임금조차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안 된다”며 사대부를 권면했지만, 남성은 너도 나도 앞다퉈 새로운 여인과 재혼했다. 박씨 부인은 단지 청나라 장군을 제압하는 강력한 여전사가 아니라, 그녀처럼 아프고 슬프고 외로웠던 수많은 여성의 삶을 치유하는 상상의 구원자가 아니었을까.
“오랑캐 장수들이 장안의 재물과 부인들을 잡아갈 새 잡혀가는 부인네들이 박씨를 향해 울며 슬프다, 우리는 이제 가면 생사를 모를지니, 언제 고국산천을 다시 볼까 하며 대성통곡했다.”
그 어디서도 피난처를 찾지 못한 민중의 ‘최종 병기’는 활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줄 환상 속 ‘피화당’이 아니었을까. 피화당은 단지 남성 횡포에서 도망치기 위한 피난처를 넘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절실한 여성성의 힘, 즉 배려와 보살핌의 상징으로 거듭난다.
자료 제공·휴이넘 출판사 ‘박씨부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