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오동진
불가에서 말하는 인생 세 법칙은 골프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첫 번째 법칙은 독행(獨行)이다. 누가 아무리 뭐라 해도 인생은 나 혼자 살아간다는 뜻이다. 두 번째 법칙은 동행(同行)이다. 혼자서 살아가도 누군가와는 같이 간다는 뜻이다. 끝으로 고행(苦行). 힘들게 간다는 뜻이다. 골프는 누가 뭐래도 골퍼 자신만의 주체 타법으로 친다. 이것이 독행이다. 동반자가 없으면 치기 어렵다. 이것이 동행이다. 아무리 잘 치고 싶어도 어렵다. 이것이 고행이다.
하지만 스스로 즐기고 동행을 기꺼워한다면 고행이 아닌 낙행(樂行)이 될 것이다. 동반자가 별짓을 해도 덤덤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초월자다.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지 않으니 도인이다. 이 경지에 이르도록 멘털 골프를 해보라. 수행과 도 닦음이 바로 골프다.
언젠가 친한 친구끼리 골프를 쳤는데, 모두 80대 안쪽을 기록했다. 감탄한 캐디가 “이 조에서는 졸면 죽겠네요” 하면서 ‘졸죽’이라는 모임 이름을 지어줬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제가 할 일이 없어 좋긴 하지만, 저도 동반자로 대우해주세요.” 무슨 말인가 싶어 의문의 눈으로 바라보니, 아무 말 없이 골프에만 집중하는 우리에게 캐디와 정겹게 말 한마디 나누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자기들끼리만 놀지, 채도 각자 가져가지, 퍼팅라인도 물어보는 일 없지, 방향과 거리에 대한 조언도 필요 없으니 되게 심심하고 재미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집중도는 좀 떨어지지만 ‘내가 상대해주마’ 하고 동반자로 대우했다. 어떻게 대우했느냐 하면, 한 홀 끝날 때마다 캐디 철학을 말해줬다. 원래 캐디라는 말의 어원은 영어로 커뎃(cadet)이다. 불어로는 카데다. 커뎃은 ‘생도’를 뜻한다. 학생이란 의미도 있지만, 통상 사관학교 학생을 생도라고 부른다. 이들이 배우는 덕목은 국가에 대한 충성과 자기희생이다. 언제든 나라가 원하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애국심을 함양하고, 동료와의 화합 및 충성을 배운다. 나라와 인류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기개를 갖추는 것이다.
골퍼를 즐겁게 해주는 말말말
이는 비단 우리나라 사관학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선진국 모든 사관학교에서 공통으로 요구하는 수준이다.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졸업자가 군에 종사하는 경우는 극히 적고, 대부분 사회 주요 기관에서 일하거나 공공 덕목에 맞는 일을 한다. 이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생도의 철학인 것이다.
영국 왕 제임스 2세가 골프를 하는데, 도우미가 필요했다. 일반적인 도우미로는 왕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추기 어렵다 싶어 육군사관학교 생도를 도우미로 붙인 것이 캐디 어원이 됐다. 절도 있고 조용하게 도움을 주는 사관생도가 듬직했던 것이다.
다른 유래도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영국 메리 여왕이 귀족 어린이들을 시동처럼 부렸는데, 그들 호칭이 프랑스어로 카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또한 생도의 또 다른 호칭으로, 귀족만 생도가 될 수 있던 유럽 문화가 엿보인다. 즉, 캐디의 근본은 잔심부름하는 시동이 아니라, 국가가 품질을 보증하는 귀족 자제를 뜻하는 것이다. 어찌 동반자로서 대우를 안 해줄 수 있으랴.
이러한 철학을 구라쳐 말해주니, 그가 요즘 유행하는 캐디 말을 들려줬다. 캐디가 동반자로서 라운딩하는 골퍼를 즐겁게 해주는 말을 종합한 것이다. 라운딩 시작 전 티샷 박스에서 하는 말이다.
드라이버 치기 전 캐디의 말
“사장님, 벗겨드릴까요?”
“자, 올라가시기 전에 몸 한 번 풀고 올라가시겠습니다.”
“한 분씩만 올라가세요.”
“아직 하시면 안 됩니다. 하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세요.”
세컨드 샷에서 하는 즐거운 말
“헤헤, 끝이 휘어 밖으로 나갔네요.”
“손으로 만지면 안 됩니다.”
“몇 번 드릴까요?”(글쎄, 한 번만이라도 주면 좋겠는데.)
그린에서 하는 재미있는 말
“너무 짧아서 안 들어갔습니다.”
“앞에 분 빼고 나서 넣으셔야죠.”
“마지막 분이 좀 꽂아주세요.”
이는 골프를 심각하게 생각지 말고 즐기라는 뜻의 유머다. 하여간 카데, 즉 캐디는 도우미다. 도우미 임무는 다섯 가지 정도 된다. 골퍼가 무거운 채를 다 들고 다닐 수 없으니 첫 번째 임무는 채 운반이다. 두 번째 임무는 거리 측정이고, 세 번째 임무는 공을 닦아주는 서비스다. 네 번째 임무는 골프장 전체 틀을 설명하고 설계자 의도를 알려주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임무는 골퍼 기분을 풀어주고 멘털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 밖에 필요악적 요소로 내 탓이 아닌 ‘당신 탓이오’를 외치는 골퍼의 스트레스 배출구로서의 임무다. 고고한 척하는 골퍼에게 그린 경사도와 공 방향을 알려주기도 한다. 홀컵에 공이 들어가면 자기 덕분이지만, 안 들어가면 캐디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는 잘 치는데 네가 잘못 놓아서 그렇다는 것인데, 물론 골퍼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캐디 잘못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예 모든 걸 캐디 탓으로 돌려 자기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나는 캐디를 어떻게 대하나
캐디 어원을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그들이 가진 임무와 사명을 한 번쯤 생각해보라는 뜻에서다. 캐디는 당신의 시동인가, 당신이 돈을 주고 고용한 하인인가. 국가가 키우는 간성으로서의 임무를 가진 사람이 잠깐 짬을 내 국왕 심기를 보살펴주는 것에서 시작한 귀족 도우미가 바로 캐디이다.
그들은 하인이 아니었으며, 노동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골퍼가 제대로 골프를 하도록 여러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골프채와 공 등 장비가 기능대로 발휘하게끔 쓰다듬고 닦아주는 어머니다. 캐디피도 고마운 마음에 성의껏 주는 것이지 고용주로서 하인에게 주는 팁이 아니다.
하여간 자기 실수나 잘못을 캐디 탓으로 돌리는 인간은 격이 낮아도 보통 낮은 게 아니다. 자기 품격을 되돌아보는 척도로서 “나는 캐디를 어떻게 대하는가” 자문해본다면 자신의 격이 어떤지 답이 나온다.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타인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알 때 지혜가 생긴다.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몸이고, 그 몸을 움직이는 주인은 마음이다. 몸을 통해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의해 마음 틀이 굳어진다. 굳어진 마음 틀은 몸을 굳게 해 노화와 죽음으로 안내하는 지름길이 된다. 단순히 캐디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 아니다. 인생 전부를 단 하나의 행위로 돌아볼 수 있으니, 존중하고 또 존중하라는 뜻이다. 겸손과 적응, 배려와 감사를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동반자, 바로 캐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