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양대 정당인 것처럼, 캐나다에서는 보수당과 자유당이 각각 보수와 진보의 이념을 대변하며 번갈아 집권했다. 근세사에서 자유당이 훨씬 많이 집권하며 다문화주의, 두 가지 공용어(영어와 프랑스어), 사회주의 색채가 짙은 국민의료보장, 유엔을 통한 평화유지 등 오늘날 세계인이 ‘캐나다적인 것’으로 느끼는 여러 정책을 구현해왔다. 20세기 100년 가운데 69년을 자유당이 연방정부를 구성했다.
자유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참패해 집권에 실패했고, 제3당으로 내몰렸다. 그 직후 당수가 사임함으로써 현재 과도적 대표가 당을 이끄는 상황이다. 자유당은 내년 봄 전당대회를 통해 새 당수를 뽑고 권토중래를 꿈꾼다. 새 당수는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면 자동적으로 총리가 된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40대 초반의 젊은이가 당수 후보로 떠오른 가운데 그의 의붓어머니에 해당하는 여성이 또 다른 경선 후보로 6월 말 도전장을 냈다.
‘혼인과 성’에 쿨한 캐나다인
캐나다의 한국 교민들이 느끼는 문화적 차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혼인과 성(性)에 대한 캐나다 주류사회의 가치관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혼인과 성은 인간 근본에 관한 문제여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사안이지만, 캐나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놀랄 만큼 캐주얼하게 생각한다. 이들이 혼인과 성을 무작정 가벼이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중압감을 덜 느낀다는 뜻이다. 자유당 당수 후보로 두 사람이 경쟁하게 된 사연을 통해 캐나다 사람들이 가진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아직 공식 의사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현재 가장 유력한 당수 후보는 2000년 타계한 전 총리 피에르 트뤼도의 장남이자 2선 의원인 저스틴 트뤼도(40)다. 그와 대결하겠다고 선언한 문제의 여성은 말년의 아버지 트뤼도와 동거하며 딸 한 명을 낳은 데버러 코인(57)이다.
피에르 트뤼도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색깔이 분명하고 성깔이 드센 총리였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자유당을 이끌며 여러 차례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1968년에서 1984년까지, 중간에 몇 달의 공백을 빼고 15년간 총리로 재임했다.
몬트리올의 부유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난 트뤼도는 하버드대 대학원,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 등에서 수학한 ‘학벌짱’이었다. 정계 진출 후 트뤼도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보이’ 기질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늦도록 장가를 가지 않다가 총리가 된 뒤 쉰두 살에 처음 결혼했다. 그 아내가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30년 연하의 마거릿이다.
그 몇 년 전 당시 연방 법무장관이던 트뤼도가 태평양 타히티로 휴가를 갔다가 부모와 함께 휴가를 온 대학 1학년생 마거릿을 만나 밀애에 들어갔다. 역시 잘사는 집안 출신인 마거릿은 그 시절 북미 대학생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히피문화에 심취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아들 셋을 뒀는데 그 첫째가 이번 경선후보인 저스틴이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얼마 안 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정치에만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마거릿의 불평이 신문 가십으로 몇 번 등장하더니, 그가 야한 복장으로 미국 뉴욕의 나이트클럽에 혼자 들락거리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공개되곤 했다. 결혼하고 6년 뒤 이들은 별거에 들어갔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이혼했다. 세 자녀는 아버지가 맡아 키웠다. 마거릿은 오타와의 부동산개발업자와 재혼했으나 다시 이혼했다.
트뤼도와 별거하는 동안 마거릿은 영국 록그룹 롤링 스톤스의 멤버인 믹 재거, 로니 우드 등과 염문을 뿌렸다. 이와는 별도로 그는 직접 쓴 책에서 미국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2009년 작고)와도 ‘관계’가 있었음을 밝혔다. 마거릿은 트뤼도와 헤어진 뒤 자서전 출간 외에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사진작가 등으로도 활동했다. 지금은 가난한 나라의 위생 개선에 힘쓰는 한 자선단체 명예회장으로 있다. 그는 또 TV, 잡지 등과 가진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과거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은 물론,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실토했다.
피에르 트뤼도는 예순다섯 살에 이혼해 곧 총리에서 물러났고 정계에서도 은퇴했다. 그러나 총리 시절부터 최대 골칫거리였던 퀘벡분리운동에 대해서는 단호한 견해를 견지하며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저지에 앞장섰다. 자신이 퀘벡 프랑스계 출신임에도 그는 퀘벡을 다독이려고 퀘벡이 연방의 여느 주와 다른 특별한 위상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려던 후임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의 시도에 강경히 반대했다.
“둘이 나서도 어색하지 않아”
이 과정에서 동지로 만나 동거까지 하게 된 여성이 바로 아들 트뤼도의 경쟁자로 나선 데버러 코인이다. 역시 명문 집안의 딸인 코인은 옥스퍼드대 대학원 출신의 헌법학자로 토론토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다. 그는 트뤼도가 죽은 후 ‘그로브 앤드 메일’ 신문의 중견 기자와 재혼했다가 이혼한 뒤 현재는 홀로 살고 있다. 코인은 “당수 경선에 나설 뜻을 정식으로 밝힌다”면서 “저스틴 트뤼도와 이 문제로 상의한 적은 없지만 둘이 함께 나선다 하더라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스틴 트뤼도는 몬트리올과 밴쿠버에서 대학과 대학원 등을 다녔고, 고교 교사 등으로 재직하다가 정계에 뛰어들어 2008년과 2011년 잇따라 연방하원의원에 당선했다. 첫 당선 때부터 언론은 언젠가 자유당 당수와 총리가 될 재목이라며 그를 주목했다. 그는 지난 자유당 당수 경선 때도 주변으로부터 출마를 제의받았으나, 아직 어리다며 사양했다. 그는 내년 봄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유당의 영광을 재현할 최선의 대안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자 현재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2005년 모델 겸 TV 사회자였던 여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뒀다.
트뤼도 집안과 그 집안에 얽힌 사람들은 이 나라 최고 엘리트 계층이지만, 한국 교민들은 캐나다 보통 사람들과 접할 때도 혼인과 성에 대한 가치관이 현격히 다르다고 느낀다. 캐나다인(그리고 미국인)이 이성을 지칭해 ‘보이프렌드’ 혹은 ‘걸프렌드’라는 용어를 쓰면 이는 단지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사이, 또는 동거남·동거녀라는 뜻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캐나다인들은 자신이 이성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밝힌다.
필자는 과거 샌드위치 가게를 꾸리던 시절 고객과의 대화에서 이를 일상적으로 느꼈다. 예를 들어 손님에게 의례적 인사로 “주말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정도의 말을 건네면 상대는 “우리 어머니의 보이프렌드가 입원해 문병을 다녀왔다”는 식의 대답을 주저 없이 했다. 이런 캐나다인들의 가치관을 인간 해방의 한 단계 진전이라고 해석해야 할지, 막된 행동이라고 봐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자유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참패해 집권에 실패했고, 제3당으로 내몰렸다. 그 직후 당수가 사임함으로써 현재 과도적 대표가 당을 이끄는 상황이다. 자유당은 내년 봄 전당대회를 통해 새 당수를 뽑고 권토중래를 꿈꾼다. 새 당수는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면 자동적으로 총리가 된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40대 초반의 젊은이가 당수 후보로 떠오른 가운데 그의 의붓어머니에 해당하는 여성이 또 다른 경선 후보로 6월 말 도전장을 냈다.
‘혼인과 성’에 쿨한 캐나다인
캐나다의 한국 교민들이 느끼는 문화적 차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혼인과 성(性)에 대한 캐나다 주류사회의 가치관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혼인과 성은 인간 근본에 관한 문제여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사안이지만, 캐나다 사람들은 이 문제를 놀랄 만큼 캐주얼하게 생각한다. 이들이 혼인과 성을 무작정 가벼이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중압감을 덜 느낀다는 뜻이다. 자유당 당수 후보로 두 사람이 경쟁하게 된 사연을 통해 캐나다 사람들이 가진 인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아직 공식 의사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현재 가장 유력한 당수 후보는 2000년 타계한 전 총리 피에르 트뤼도의 장남이자 2선 의원인 저스틴 트뤼도(40)다. 그와 대결하겠다고 선언한 문제의 여성은 말년의 아버지 트뤼도와 동거하며 딸 한 명을 낳은 데버러 코인(57)이다.
피에르 트뤼도는 캐나다 역사상 가장 색깔이 분명하고 성깔이 드센 총리였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자유당을 이끌며 여러 차례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써 1968년에서 1984년까지, 중간에 몇 달의 공백을 빼고 15년간 총리로 재임했다.
몬트리올의 부유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난 트뤼도는 하버드대 대학원,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 등에서 수학한 ‘학벌짱’이었다. 정계 진출 후 트뤼도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하지만 그의 ‘플레이보이’ 기질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늦도록 장가를 가지 않다가 총리가 된 뒤 쉰두 살에 처음 결혼했다. 그 아내가 당시 대학 졸업반이던 30년 연하의 마거릿이다.
그 몇 년 전 당시 연방 법무장관이던 트뤼도가 태평양 타히티로 휴가를 갔다가 부모와 함께 휴가를 온 대학 1학년생 마거릿을 만나 밀애에 들어갔다. 역시 잘사는 집안 출신인 마거릿은 그 시절 북미 대학생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히피문화에 심취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슬하에 아들 셋을 뒀는데 그 첫째가 이번 경선후보인 저스틴이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얼마 안 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정치에만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는 마거릿의 불평이 신문 가십으로 몇 번 등장하더니, 그가 야한 복장으로 미국 뉴욕의 나이트클럽에 혼자 들락거리는 모습이 사진에 찍혀 공개되곤 했다. 결혼하고 6년 뒤 이들은 별거에 들어갔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이혼했다. 세 자녀는 아버지가 맡아 키웠다. 마거릿은 오타와의 부동산개발업자와 재혼했으나 다시 이혼했다.
트뤼도와 별거하는 동안 마거릿은 영국 록그룹 롤링 스톤스의 멤버인 믹 재거, 로니 우드 등과 염문을 뿌렸다. 이와는 별도로 그는 직접 쓴 책에서 미국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2009년 작고)와도 ‘관계’가 있었음을 밝혔다. 마거릿은 트뤼도와 헤어진 뒤 자서전 출간 외에 두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사진작가 등으로도 활동했다. 지금은 가난한 나라의 위생 개선에 힘쓰는 한 자선단체 명예회장으로 있다. 그는 또 TV, 잡지 등과 가진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과거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은 물론,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실토했다.
피에르 트뤼도는 예순다섯 살에 이혼해 곧 총리에서 물러났고 정계에서도 은퇴했다. 그러나 총리 시절부터 최대 골칫거리였던 퀘벡분리운동에 대해서는 단호한 견해를 견지하며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저지에 앞장섰다. 자신이 퀘벡 프랑스계 출신임에도 그는 퀘벡을 다독이려고 퀘벡이 연방의 여느 주와 다른 특별한 위상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려던 후임 총리 브라이언 멀로니의 시도에 강경히 반대했다.
“둘이 나서도 어색하지 않아”
이 과정에서 동지로 만나 동거까지 하게 된 여성이 바로 아들 트뤼도의 경쟁자로 나선 데버러 코인이다. 역시 명문 집안의 딸인 코인은 옥스퍼드대 대학원 출신의 헌법학자로 토론토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연방하원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적이 있다. 그는 트뤼도가 죽은 후 ‘그로브 앤드 메일’ 신문의 중견 기자와 재혼했다가 이혼한 뒤 현재는 홀로 살고 있다. 코인은 “당수 경선에 나설 뜻을 정식으로 밝힌다”면서 “저스틴 트뤼도와 이 문제로 상의한 적은 없지만 둘이 함께 나선다 하더라도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저스틴 트뤼도는 몬트리올과 밴쿠버에서 대학과 대학원 등을 다녔고, 고교 교사 등으로 재직하다가 정계에 뛰어들어 2008년과 2011년 잇따라 연방하원의원에 당선했다. 첫 당선 때부터 언론은 언젠가 자유당 당수와 총리가 될 재목이라며 그를 주목했다. 그는 지난 자유당 당수 경선 때도 주변으로부터 출마를 제의받았으나, 아직 어리다며 사양했다. 그는 내년 봄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유당의 영광을 재현할 최선의 대안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자 현재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2005년 모델 겸 TV 사회자였던 여성과 결혼해 두 자녀를 뒀다.
트뤼도 집안과 그 집안에 얽힌 사람들은 이 나라 최고 엘리트 계층이지만, 한국 교민들은 캐나다 보통 사람들과 접할 때도 혼인과 성에 대한 가치관이 현격히 다르다고 느낀다. 캐나다인(그리고 미국인)이 이성을 지칭해 ‘보이프렌드’ 혹은 ‘걸프렌드’라는 용어를 쓰면 이는 단지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사이, 또는 동거남·동거녀라는 뜻을 갖는 것이 보통이다. 캐나다인들은 자신이 이성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밝힌다.
필자는 과거 샌드위치 가게를 꾸리던 시절 고객과의 대화에서 이를 일상적으로 느꼈다. 예를 들어 손님에게 의례적 인사로 “주말은 어떻게 보냈습니까?” 정도의 말을 건네면 상대는 “우리 어머니의 보이프렌드가 입원해 문병을 다녀왔다”는 식의 대답을 주저 없이 했다. 이런 캐나다인들의 가치관을 인간 해방의 한 단계 진전이라고 해석해야 할지, 막된 행동이라고 봐야 할지 여전히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