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갑에서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를 누른 이노근(58) 새누리당 당선자는 4·11 총선 최고의 화제 인물이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파급력이 컸던 것으로 보이는 ‘김용민 막말 파문’을 이끌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당선자는 “공직자 요건은 도덕성, 윤리성, 청렴성”이라면서 “김 후보는 이제 말을 순화해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 초반 고전했지만 뜻하지 않은 데서 반전카드를 찾아냈다. 4월 1일 방송인 김구라 씨가 김 후보 지지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는데, 거기서 단서를 잡은 것이다. 이 후보 캠프는 즉각 인터넷을 검색해 김 후보가 과거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내뱉었던 문제의 발언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이 당선자는 “유권자는 후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김 후보의 막말 파문은 수도권 접전 지역과 충청·강원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총선 이후에 나왔다. 결국 새누리당이 단독 과반의석(152)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데 이 당선자가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셈이다. 그는 “김 후보의 막말로 나 역시 어느 정도 반사이익을 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앞길 개방 건의
이 당선자는 1976년 행정고시 19회에 합격해 77년부터 공직에 입문했다. 평소 공직자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그는 “34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징계를 받은 적이 없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1954년 충북 청주의 빈농 집안에서 5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청주공고를 나와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다소 특이한 경력이다. 그는 “취업할 수 있다고 해서 공고에 갔는데 아버님이 동네 이장을 맡으면서 신문을 보게 됐고 세상에 눈을 떴다”며 “공고 3학년 때 전기과 실험실에서 (대학 입시) 공부를 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행정고시에 합격했고 주로 서울시에서 잔뼈가 굵었다. 이 당선자는 1993년 청와대 파견 근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해 청와대 앞길을 개방토록 한 것도 주요 성과로 꼽는다. 서울시 문화계장으로 재직할 때 88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건립과 관련해 업무협의를 하려고 청와대를 자주 방문했는데, 당시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심지어 구둣발로 차기까지 한 일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것. 그 일을 계기로 청와대 앞길의 삼엄한 경비가 사람을 위축시킨다고 생각해 그런 건의를 했던 것이다.
이 당선자는 2006년 노원구청장에 당선해 “강남·북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지역 간 재정 불균형 해소를 위한 공동재산세 도입을 주도해 성사시켰다. 2010년 재선에 실패한 뒤에는 노원미래발전연구소를 만들어 와신상담했다.
그에게는 독특한 이력이 하나 더 있다. 1995년 ‘한국수필가협회’ ‘한맥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것. 2005년에는 역사수필 ‘경복궁 기행열전’(종로신문출판부)을 냈고, 2009년에는 에세이집 ‘운주사로 날아간 새’(서연)를 출간했다. 올가을에는 ‘창조가 권력이다. 창조경영, 창조정책’(가칭)이라는 책을 낼 예정이다.
이 당선자는 향후 국회 의정활동 방향도 명확히 정했다. 구청장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 강남·북 간 차별을 철폐하고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이제 국회에서 정치 투쟁과 주먹다짐을 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은 곧바로 검증 대상이 돼야 한다”면서 “지도자는 충분한 경험과 전문성, 창의력과 추진력, 인적·물적 네트워크 등 3대 요건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선거 초반 고전했지만 뜻하지 않은 데서 반전카드를 찾아냈다. 4월 1일 방송인 김구라 씨가 김 후보 지지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는데, 거기서 단서를 잡은 것이다. 이 후보 캠프는 즉각 인터넷을 검색해 김 후보가 과거 인터넷방송에 출연해 내뱉었던 문제의 발언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이 당선자는 “유권자는 후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김 후보의 막말 파문은 수도권 접전 지역과 충청·강원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총선 이후에 나왔다. 결국 새누리당이 단독 과반의석(152)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데 이 당선자가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셈이다. 그는 “김 후보의 막말로 나 역시 어느 정도 반사이익을 봤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앞길 개방 건의
이 당선자는 1976년 행정고시 19회에 합격해 77년부터 공직에 입문했다. 평소 공직자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그는 “34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징계를 받은 적이 없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1954년 충북 청주의 빈농 집안에서 5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청주공고를 나와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다소 특이한 경력이다. 그는 “취업할 수 있다고 해서 공고에 갔는데 아버님이 동네 이장을 맡으면서 신문을 보게 됐고 세상에 눈을 떴다”며 “공고 3학년 때 전기과 실험실에서 (대학 입시) 공부를 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행정고시에 합격했고 주로 서울시에서 잔뼈가 굵었다. 이 당선자는 1993년 청와대 파견 근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해 청와대 앞길을 개방토록 한 것도 주요 성과로 꼽는다. 서울시 문화계장으로 재직할 때 88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건립과 관련해 업무협의를 하려고 청와대를 자주 방문했는데, 당시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심지어 구둣발로 차기까지 한 일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것. 그 일을 계기로 청와대 앞길의 삼엄한 경비가 사람을 위축시킨다고 생각해 그런 건의를 했던 것이다.
이 당선자는 2006년 노원구청장에 당선해 “강남·북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지역 간 재정 불균형 해소를 위한 공동재산세 도입을 주도해 성사시켰다. 2010년 재선에 실패한 뒤에는 노원미래발전연구소를 만들어 와신상담했다.
그에게는 독특한 이력이 하나 더 있다. 1995년 ‘한국수필가협회’ ‘한맥문학’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것. 2005년에는 역사수필 ‘경복궁 기행열전’(종로신문출판부)을 냈고, 2009년에는 에세이집 ‘운주사로 날아간 새’(서연)를 출간했다. 올가을에는 ‘창조가 권력이다. 창조경영, 창조정책’(가칭)이라는 책을 낼 예정이다.
이 당선자는 향후 국회 의정활동 방향도 명확히 정했다. 구청장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 강남·북 간 차별을 철폐하고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이제 국회에서 정치 투쟁과 주먹다짐을 하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은 곧바로 검증 대상이 돼야 한다”면서 “지도자는 충분한 경험과 전문성, 창의력과 추진력, 인적·물적 네트워크 등 3대 요건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