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생명체를 살려내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또 있을까. 그리스에는 멸종 위기의 포도를 되살려 그리스 3대 화이트 와인 품종 가운데 하나로 만든 인물이 있다. 바로 그리스 와인의 거장 에방겔로스 게로바실리우(Evangelos Gerovassiliou)다. 사람들은 그를 ‘말라구시아(Malagousia)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가 부활시킨 말라구시아 와인이 그리스는 물론,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다. 4월 초 도멘 게로바실리우를 방문해 그를 직접 만나봤다. “42년 전 단 1ha(1만m2)로 시작한 말라구시아가 이제 그리스 전역에 퍼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전율을 느낍니다.”
1975년 말라구시아를 처음 접했을 때를 회상하며 게로바실리우가 말했다. 당시는 그가 포르토 카라스(Porto Carras)라는 와이너리에서 일할 때였는데, 한 식물학자가 농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말라구시아를 가져왔다. 그는 말라구시아를 심고 3년간 정성껏 키웠다. 어떤 와인이 탄생할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과일향이 풍부한 매력적인 화이트 와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는 1981년 자신의 이름을 딴 와이너리 도멘 게로바실리우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말라구시아를 재배했다. 말라구시아는 기르기 쉬운 품종이 아니었다. 환경에 민감했고 습도가 조금만 높아도 곰팡이성 질병이 발생했다. 이대로는 말라구시아가 다시 외면받을 것이 뻔했다. 그는 말라구시아의 특성 연구와 품종 개량에 힘썼고, 92년 마침내 개량한 말라구시아를 배포했다. 이것이 말라구시아가 그리스 3대 품종으로 자리 잡은 계기다.
말라구시아의 향을 맡으면 농익은 복숭아, 살구, 파인애플 등 잔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달콤한 과일향에 누구나 감탄사를 내뱉는다. 한 모금 머금으면 입안 구석구석을 휘감는 부드러운 질감에 또 한 번 감동한다. 말라구시아의 상큼함은 향신료와 올리브오일이 듬뿍 들어간 지중해식 요리와 잘 맞지만, 달콤한 과일향은 매콤한 우리 음식과도 훌륭한 궁합을 이룬다.
게로바실리우는 말라구시아로 단일 품종 와인도 만들고, 산토리니 섬의 토착 품종 아시르티코(Assyrtiko)와 섞어 블렌드 와인도 만든다.
말라구시아의 진한 과일향과 아시르티코의 탄탄한 구조감이 어우러진 이 조합 역시 게로바실리우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이 블렌딩은 지금 그리스의 많은 와이너리가 따라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요즘 와이너리들이 잘 팔리는 와인에만 관심을 보여 아쉽습니다. 저라도 좋은 와인을 만들어야죠.”
그리스에는 아직 개발되지 못한 토착 품종이 많다. 사라져가는 품종을 되살리려면 적어도 15년 이상 노력을 기울여야 하니 일반 와이너리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로바실리우는 그리스 북부와 남부에서 3개의 와이너리를 운영하며 토착 품종을 되살리고 있다.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샤르도네처럼 어느 나라나 만드는 국제 품종 와인에 식상함을 느끼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그리스 와인은 독특한 개성으로 즐거움을 선사할 것입니다.”
게로바실리우는 2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와인을 수출하고 있다. 그는 4월 말 열리는 서울국제와인&주류박람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으로 한국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그때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