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재 뒤로 보이는 이규보 묘.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 모퉁이 돌아와 마땅히 깨달았으리/ 병을 기울이니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山僧貪月色 幷汲一甁中 到寺方應覺 甁傾月亦空).
이규보를 일컬어 ‘해동의 백낙천(白樂天)’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그가 지은 ‘백운소설’에 ‘당나라 백낙천과는 음주와 광음영병(狂吟詠病)이 천생 같아 낙천을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시주(詩酒)를 즐겼고, 거기에다 거문고까지 애지중지하여 스스로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그는 ‘동국이상국집’에 다시(茶詩) 40여 편을 포함하여 2000수가 넘는 시를 남겼으니 가히 ‘해동의 백낙천’이라 할 만한 것이다.
동국이상국집에 茶詩 40여 편 귀중한 자료
40여 편의 다시는 당시 차 살림의 모든 것을 소재로 써 차를 연구하는 다인들에게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다시에는 잔설 속에서 따는 조아차(早芽茶·올싹차)가 나오는가 하면, 찻잎을 불에 쬐어 말려서 덩어리가 되게 하는 떡차 만들기 방법도 나온다. 그런가 하면 ‘맑은 향기 미리 새어날까 두려워하여/ 옥색 비단으로 굳게 감싼 상자를 자줏빛 머루덩굴로 매었네’라며 차의 포장에 대해 언급하거나, 차 상자에 보관해도 장마철에는 차가 변질된다고 하는 내용을 통해서는 차 살림에 쓰이는 다구(茶具)들도 엿보게 한다. 어떤 다시에서는 잔설 속에서 딴 유차(孺茶·젖먹이차)라고 속여 파는 장사꾼이 있었다는 내용이 보이고, 차세(茶稅)를 두어 차 산지 백성들을 괴롭히는 데 비분강개하여 지방 군수에게 일갈하는 글도 있다.
‘흉년 들어 거의 다 죽게 된 백성,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았는데 몸속의 살이 얼마나 된다고 남김없이 죄다 긁어내려 하는가. 네 보는가. 하수를 마시는 두더지도 그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다. 묻노니, 너는 얼마나 입이 많아서 백성의 살을 겁탈해 먹는 건가.’
여주에서 태어난 이규보는 어린 시절부터 시를 잘 지어 문사들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으나 과거를 위한 글공부는 등한시했다. 그런 탓에 그는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한 끝에 장원으로 급제한다. 그러나 관직은 얻지 못했다. 25세에 개경 천마산으로 들어가 장자의 경지를 흠모하여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짓고 다인으로서 차 살림을 하다가 1년 만에 개경으로 나와 독서로 소일했다. 그때 그는 서사시 ‘동명왕편’을 지었다. 서문에서 그는 “‘구삼국기’를 얻어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기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鬼)이고 환(幻)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이나 다시 음미하고 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이 성(聖)이며 귀가 신(神)이었다”고 말하면서 ‘우리나라가 본디 성인의 터임을 알게 하려 할 따름이다’라고 당시 중화 중심의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문사들과 견해를 달리했다.
나그네는 그의 다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수를 읊조려본다.
납승이 손수 차 달여/ 내게 향기와 빛깔을 자랑하네/ 나는 말하노니 늙고 목마른 놈이/ 어느 겨를에 차 품질을 가리랴/ 일곱 사발에 또 일곱 사발/ 바위 앞 물을 말리고 싶네(衲僧手煎茶 誇我香色備 我言老渴漢 茶品何暇議 七梡復七梡 要 巖前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마지막 구절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리라. 바위 앞 찻물을 다 말리고 싶을 정도로 차를 사랑했던 다인 이규보인 것이다.
☞ 가는 길
강화도로 들어서 전등사로 가다 찬물 약수고개를 지나면 목비고갯길 오른편에 ‘백운이규보선생묘’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300m쯤 가면 묘소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