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개봉한 ‘007 스펙터’는 이러한 007 시리즈의 일부분인 대니얼 크레이그 시대의 종합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007은 대중에게 오락영화로 알려져 왔다. 눈빛만으로 여성을 유혹하는 본드의 이미지는 실력 있는 스파이라기보다 매력적이면서도 활동적인 영국 남자 쪽에 가까웠다. 크레이그는 바로 이 007 이미지를 극복하고자 했다. 느끼한 웃음과 약간의 제스처로 위기를 모면하는 영화적 본드가 아닌,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내는 진짜 남자 이미지, 바로 그것이 크레이그가 007로 선택된 이유이기 때문이다.
크레이그가 맡은 007 시리즈는 그래서 그동안 선보였던 본드의 전형과는 거리가 멀다. 세련되고 곱상하면서 날씬한 외모가 과거 007 시리즈의 전형이었다면 크레이그는 두껍고 단단하며 무겁다. 이는 비단 배우 이미지만은 아니어서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맡은 이후 007 시리즈는 오락영화에서 벗어나 깊은 인상을 남기는 미장센무비로 변화를 추구하는 듯했다. 이 시도는 2012년 개봉작 ‘007 스카이폴’에서 최고 결과를 냈다. 시리즈 사상 가장 탁월한 흥행 성적과 함께 평단으로부터 가장 긍정적인 평가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007 스펙터’는 이 ‘007 스카이폴’의 문제의식과 개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아델 노래로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의 고급화를 선언했다면, 이번엔 샘 스미스 노래로 이를 변주한 정도가 달라진 점일 것이다. 시종일관 차분하게 고뇌하는 듯한 본드 이미지도, 더는 쓸모없어진 듯 보이는 고전적 스파이의 쓸모를 증명하는 과정도 모두 전편과 유사하다. 전편의 본드가 ‘아날로그 전쟁’을 선포하며 와이파이(Wi-Fi)도, 인터넷도 없는 스코틀랜드 고성에 들어갔다면, 이번엔 세상을 정보화 감옥에 가두려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단단한 몸으로 대적한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미지는 오락성보다 의미 구현과 종합 정리에 치중돼 있다. 그러다 보니 오락영화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특별히 새로운 첩보기기도, 화려한 액션도 없는 밋밋한 자기성찰적 영화로 비춰질 것이 분명하다. 샘 멘디스 감독과 크레이그 식의 본드에 애착을 가진 관객에겐 의미 있는 송별사겠지만, 새로운 오락영화로 007 시리즈를 기다려온 이들에겐 지나친 자기도취로 보일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이미 전편, 즉 ‘007 스카이폴’에서 완벽한 고별사를 마친 007 시리즈의 사족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