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3

2000.07.20

맛에 한잔 ‘쭉’…향에 또 한잔 ‘쭉’

혀에 감기는 매실의 ‘조화’…3개월 우려내고 6개월 숙성, 과실酒의 황태자

  • 입력2005-07-26 13: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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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에 한잔 ‘쭉’…향에 또 한잔 ‘쭉’
    지난 봄에 섬진강 하류를 여행했다. 매화와 산수유를 보기 위해서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매화향에 취해 강변을 오르내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매실주 공장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매실을 수확하는 농민들이 공동 출자하여 만든 공장이었다. 26t짜리 거대한 탱크에는 소문나지 않은 5년 이상 숙성된 매실주가 숨겨져 있었다. 아련한 매화 향과 시디 신 매실 맛과는 전혀 다른 향기를 술은 머금고 있었다. 혀끝에 감기는 알싸한 자극과 함께 담백한 맛이 돌았다. 술 몇 병을 사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대접했더니, 어디 술이냐고 술맛을 잊지 못해 했다.

    그래서 매실주를 담그는 여름에 다시 섬진강을 찾았다.

    매실주 공장은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의 강가에 있다.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하동 평사리의 강 건너편에서 5km쯤 강을 따라 내려가고, 하동 송림이 있는 섬진교에서 전라도쪽 강변으로 5km쯤 올라간 곳이다.

    찾아간 날이 6월 중순께였는데 매실 수매가 한창이었다. 농민들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올해 매실 값이 좋다고 했다. 드라마 ‘허준’에서 매실이 역병을 다스리는 약재로 등장하고 나서부터란다. 지난해만 해도 상등품이 1kg에 4000원 하던 것이, 올해는 5000원 했다. 올해만 같으면 매화를 심어 가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10년 전만 해도 매화나무는 베어 내버리고 싶은 애물단지였다. 그때는 매실의 판로가 협소했고, 대기업의 매실 수매에 목을 매야 했다.

    근자에 매실의 수요가 늘었다는 것은 매실의 용도가 다양해졌다는 증표다. 매실음료 매실엑기스 매실장아찌 매실김치 따위가 가공식품으로 나오는데, 그래도 매실의 가장 큰 소비처는 매실주 공장이다. 소주를 만드는 큰 술 공장에서는 대부분 매실주를 만든다.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도 매취순, 매심, 설중매, 매실마을 따위의 술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매실주 가운데, 매실 생산지에서 직접 만드는 매실주는 이곳 광양매실영농조합(061-772-4131)의 ‘매진’(梅眞)밖에 없다. 그런데 매진이 태어나기까지는 매실 생산자들의 눈물겨운 고투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1989년부터 3년 동안 매실 수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1992년에는 매실을 수매하던 주류 회사가 직접 운영하던 농장에서 매실 풍년이 들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주류 회사에서는 매실을 구매하지 않을 듯하더니, 첫날 수매에서 1kg당 640원을 제시했다. 그런데 나흘째 되던 날에 저장 창고가 다 찼다며 1kg당 300원에 팔려면 팔고 아니면 관두라고 했다.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 가격이라 도저히 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몇 년 거래해 오던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내린 조처에 농민들은 배신감과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궁여지책으로 몇 명이 모여 매실의 수요처를 마련해보기로 했다. 매실 가공 공장 설립이 논의되었다. 113명의 조합원이 모였고, 정부 지원금 6억원, 출자금과 은행 융자금 6억원을 마련하여 모두 12억원을 투자해 매실주와 엑기스, 캡슐, 음료를 만드는 조합을 출범시켰다. 1994년 6월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4년의 준비를 거쳐 1998년 11월에 매실주 ‘매진’이 시장에 나왔다.

    맛에 한잔 ‘쭉’…향에 또 한잔 ‘쭉’
    매실주는 대한주정공장에서 공급받은 95도의 주정을 원료로 사용한다. 주정은 돼지감자를 원료로 해서 만들어진다. 주정 200ℓ에 물 200ℓ를 섞어 45도로 알코올 도수를 낮춘 술에다가 매실 175kg을 넣는다. 26t이나 되는 거대한 탱크에 술과 매실을 저장하는데, 90일이 지나면 술을 매실에서 분리하여 다른 탱크에 저장한다. 그때 알코올 도수는 30도 가량으로 낮아진 상태다. 술을 빼낸 매실에 다시, 매실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붓는다. 매실에 남은 알코올 성분을 우려내기 위해서다. 이 물을 15일 후에 뽑아내, 첫번째 우려낸 매실주에 옮겨 담으면 알코올 도수가 24도로 낮아진다. 이 술을 6개월 이상 숙성시키면 맛이 부드럽고 안정이 되어 언제든지 시판할 수 있는 상품이 된다. 마지막 병에 담을 때는 영하 10도에서 저온 여과시키고, 다시 물로 희석하여 도수를 14도로 낮춘다.

    매실은 수확 시기가 한정되어 있다. 6월초 망종을 전후로 시작하여 하지까지 이어진다. 그 보름 남짓한 시기에 거둬들인 매실이라야 쓸모가 있다. 이 때 매실은 솜털이 빠지고 윤택이 나는 초록빛을 띤다. 매실이 누렇게 익어 가면 상품 가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매실 속의 구연산 수치가 떨어지고 수분 함량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매실은 몸에 좋아 한방뿐 아니라 민간요법으로도 널리 사용된다. 독성이 없고 강한 신맛이 도는 매실은 장을 다스리고 갈증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유기산 때문인데, 특히 피로 회복에 좋은 천연 구연산이 많이 들어 있다.

    섬진강의 매진은 매실 생산지에서 수확된 싱싱한 매실을 곧바로 재료로 쓴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술맛이 깨끗하고 담백하다. 술이 약한 사람도 가볍게 마실 수 있을 만큼 부드럽다. 술은 옅은 갈색빛이 도는데, 술이 센 사람들은 ‘이거 음료수 아냐?’ 할 정도로 부담이 없다. 현재 판매되는 거의 모든 매실주는 14도다. 매진도 14도다. 왜 한결같이 14도일까. 좀더 독하게 만들 수 없는지 매실영농조합의 신연주대표에게 묻자 “과실주는 20도가 넘으면 숙취가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 입맛에 익숙한 매실주가 14도여서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고 했다.

    매실주 공장을 둘러보고 나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다압면 고사리의 매실 농장으로 향했다. 백운산 자락이라 강가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마을은 산에 둘러싸여 경사가 급했다. 밤꽃 향이 온 마을에 가득했다. 매실을 따온 동네 사람들이 수매나온 농협 차량을 기다리며 20kg 단위로 매실을 담고 저울 눈금을 헤아리느라 분주했다.

    이 섬진강가에서는 매화꽃 피는 3월에 나그네들의 잔치가 열리고, 매실 따는 6월에는 농민들의 잔치가 벌어지는 셈이었다. 물론 올해같이 매실 값이 좋을 때의 얘기지만. 요즘 매실 값이 좋다고 여기 저기 매화 묘목을 많이 심었다는데, 훗날 근심의 불씨가 되지 않도록 매실주 공장이 번창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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