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6

2018.05.02

커버스토리

“농촌에 6차 산업 ‘비니거 시티’ 만들자”

인터뷰 | ‘발효식초 선구자’ 한상준 한국전통식초협회 회장·초산정 대표

  • 입력2018-04-30 17: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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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식초는 자연이 만들고 사람은 심부름꾼이에요. 균이 식초를 만들 수 있게 보조 역할만 하니 결국 식초는 자연이 주는 선물인 거죠.” 

    한상준(49) 한국전통식초협회 회장의 ‘식초론(論)’은 간결했다. 공기 중의 효모와 초산균, 재료가 만나 적절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발효돼 인간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 그래서 자연 그대로 섭취하는 게 최고라고 한다. ‘발효식초를 잘 만드는 비법’을 묻자 이런 ‘겸손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한 회장은 ‘식초인’ 사이에서는 국내 전통발효식초를 대중화한 선구자로 꼽힌다. 1907년 조선총독부의 ‘주세령’ 공포로 전통주와 함께 사라진 전통 발효식초 제조법을 되살리고자 고문헌 연구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하나하나 기술을 복원했다. 그의 이름 앞에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매일 발효식초 마시니…”

    그는 농림축산식품부(농림부)와 전통식품 곡물식초 표준규격을 처음 만들었고, 국내 최초 전통식초 신지식인에 선정됐으며, 국내 최초 전통식품 곡물식초 품질인증을 획득한 발효식초 명인이기도 하다. 2006년부터 경북 예천에 터를 잡고 발효식초 생산업체 ‘초산정’을 운영 중인 그는 ‘한상준 식초학교’와 특강을 통해 십수 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한 제조법을 설파하고 있다. 6월 22~23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리는 ‘2018 대한민국 식초문화대전’ 준비로 더욱 바쁜 그와 4월 25일 서울 충정로 ‘주간동아’ 인터뷰룸에서 마주 앉았다. 

    요즘 많이 바쁜 거 같다. 



    “매주 토요일 서울 서초동 한국전통발효아카데미에서 식초 관련 강의를 하고 평일에는 대학, 백화점, 사회단체 등에서 요청해온 강의를 한다. 내일은 한국식품연구원과 함께 ‘기타 식초’와 관련된 전통식품 표준규격에 대한 회의도 해야 하고…. 그래도 매일 식초를 마시니 피로한지 모르겠다. 매일 밥에 식초 한두 숟가락을 넣어 비벼 먹으니 밥맛도 좋다.(웃음)” 

    쌀, 현미 같은 곡물식초는 이미 표준규격과 품질인증을 만들었는데 ‘기타 식초’는 뭔가. 

    “2008년 1월 전통발효식초인 곡물식초 표준규격을 만들었고, 첫 전통식품 품질인증도 받았다. 인증을 받으면 발효식초병 라벨에 ‘전통식초’라는 표시가 찍힌다. 현재 곡물과 과일을 이용해 만드는 식초는 이런 규격이 있는데 예를 들어 쑥식초, 당귀식초 같은 약초식초나 곡물과 과일을 섞어 만든 식초 등 ‘기타 식초’는 관련 표준규격이 없다. 전통발효식초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발효식초 수요도 높아지는 만큼 그 규격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는 거다. 미숫가루나 고추장, 장아찌, 족발 등 전통식품에는 정부가 인증하는 표준규격이 있다.” 

    전통식품 품질인증제는 우리 고유의 맛·향·색을 내는 우수 전통식품 품질을 정부가 보증하는 제도다. 국산 농산물을 주재료로 해 예로부터 전승돼온 제조법에 따라 제조·가공·조리된 식품을 대상으로 한다. 고품질의 제품 생산을 유도하면서 고유 식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1992년 도입했는데, 지난해 말 기준 고추장·김치·누룽지 등 54개 품목 596건이 품질인증을 받았다. 이러한 인증을 받으려면 한국식품연구원의 서류 검토와 함께 생산 공장·제품 조사를 거치는데, 이때 정부가 설정한 일정 기준인 ‘표준규격’이 평가 기준이 된다. 전통식품 표준규격은 곡물식초와 한과류, 메주, 국수류 등 모두 86개 품목이 등록돼 있다. 

    한 회장은 국내 곡물식초 표준규격을 만드는 데도 참여했는데…. 

    “발효식초를 연구하며 자료를 찾다 보니 우리나라 곡물식초 표준규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수천 년 전부터 선조들의 식문화에서 큰 역할을 해온 식초에 표준규격이 없다는 건 전통발효식초가 그만큼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농림부에 ‘전통식초 규격을 만들어달라’고 건의했더니 ‘식초가 예부터 우리 전통식품이었는지 자료를 제출하라’ 하기에 ‘향약집성방’ ‘음식디미방’ 등 선조들의 기록을 가져다 줬다. 얼마 뒤 한국식품연구원에서 연락이 와 ‘함께 규격을 만들자’고 하더라. 그래서 각종 전문가 회의를 거쳐 곡물식초 표준규격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약초식초 표준규격을 다시 만드는 거다.” 

    전통발효식초 제조 기술을 복원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 같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봤다.(웃음) 처음 식초를 연구할 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전통발효식초 제조법을 가르쳐주는 곳이 없었다. 제조 기술을 배우려고 무작정 대기업 공장에 찾아가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던 시절이었다. 일본과 중국에는 400년, 600년 이어오는 식초양조장이 있는데 우리는 제대로 된 식초양조장 하나 없었다. 그래서 독학을 했고, 공부하다 막히면 일본에 가 기술을 배웠다. 지금은 ‘식초 제자들’에게 5분이면 가르치는 산도 측정 기술을 배우려고 해외에 다녀왔을 정도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혼자 하나하나 제조 기술과 데이터를 쌓는 게 참 어려웠다. 전통식초에 관한 표준규격이 없었던 시절이니 그럴 수밖에….”

    인류와 함께한 천연조미료

    식초 발효 상태를 확인하는 한상준 한국전통식초협회 회장. [박해윤 기자]

    식초 발효 상태를 확인하는 한상준 한국전통식초협회 회장. [박해윤 기자]

    30대 중반 발효식초 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뭔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가난이라는 고통을 참 많이 겪었다.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힘들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직업군인도 해보고 정보기술(IT) 업계 프로그래머로도 일했다. 작은 성공도 맛봤지만 ‘촌사람’이라 그런지 도시생활이 맞지 않더라. 힘들었지만 자연 속에서 살던 어린 시절이 계속 생각나 귀농(歸農)을 준비했고, ‘귀농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우연히 발효식초의 효능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걸 하면 밥벌이는 하겠다’ 싶어 4년 간 연구를 한 뒤 2006년 고향으로 돌아와 ‘초산정’을 열었다.(웃음)” 

    그의 말처럼, 식초는 고대 바빌로니아 고문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오랜 기간 인류와 함께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클레오파트라 등 많은 귀족이 건강과 미용을 위해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식초에 든 풍부한 유기산과 아미노산이 혈압을 낮추고 면역력을 높이는 등 그 효능이 후대 과학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고려시대 한의서 ‘향약구급방’과 조선시대 실용지식서 ‘규합총서’에는 식초를 약으로 쓰는 방법과 쌀식초 제조법이 기술돼 있고, ‘동의보감’에는 ‘식초가 풍을 다스리고 고기와 생선, 채소 등의 독을 제거한다’고 기록돼 있다. 최고(最古) 천연조미료인 발효식초는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세령’ 공포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사라지면서 함께 자취를 감췄다. 한 회장의 이어지는 설명은 이렇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직접 빚던 술을 더는 만들 수 없게 되니 전통식초도 함께 사라졌다. 더구나 광복 후에는 쌀이 부족해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한 ‘양곡관리법’(1965)이 시행되면서 그나마 내려오던 ‘식초 명맥’도 완전히 끊겼다. 현재 60대 이상 어르신이라면 옛날 먹다 남은 막걸리를 ‘초단지’에 부어 발효식초를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할 거다. 쌀로 빚은 술과 식초는 공동운명체다.” 

    가양주를 이용해 식초를 만들기 때문인가. 

    “그렇다. 곡물식초는 고두밥에 누룩과 물을 혼합하고 발효시켜 알코올 4~8%인 술을 만들어 옹기에 넣고, 산소가 잘 들어가도록 옹기 입구를 삼베보자기로 덮는다. 이 옹기를 섭씨 30~35도에서 약 한 달간 보관하면 초산균이 생기면서 식초가 된다. 물론 이때 음용해도 괜찮지만, 좀 더 부드러운 맛을 내려면 15도 정도 서늘한 곳에서 1년 이상 숙성시켜야 한다. 과일식초는 과일 자체에 당분이 있어 전분을 포도당으로 바꾸는 누룩을 넣을 필요는 없다. 당도 14브릭스(Brix·당 농도를 정하는 대략적인 단위로, 용액 100g에 당 1g이 있으면 1브릭스라고 한다)인 과일, 즉 사과와 배, 자두, 귤, 유자, 포도 등은 식초로 만들기에 좋다. 그러니 우리 땅에서 나오는 좋은 곡물과 과일을 식초로 만드는 건 자연이고, 사람은 온도 조절 같은 보조 역할을 한다고 말한 거다.”

    그가 ‘식초 비법’ 설파하는 이유

    초산정은 ‘오곡식초’로 잘 알려졌는데 최근에는 오미자, 감귤, 유자를 활용한 과일식초를 선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식초 하면 일반적으로 현미식초를 떠올린다. 선조들은 예부터 쌀이나 현미뿐 아니라 보리, 기장, 수수로 술과 초를 빚었고 이러한 오곡은 잡곡문화가 발달한 우리만의 색깔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재료라고 생각했다. 나물무침에도 제격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샐러드드레싱 소스로 발사믹 식초(포도식초)가 많이 알려졌다. 우리나라도 좋은 과일이 많은데 이왕이면 국내 과일 농가를 돕고 몸에도 좋은 과일식초를 연구했다.” 

    반응은 어떤가. 

    “지지난해에 한식재단 주최로 서울 청담동의 유명 셰프와 식초장인이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셰프는 우리 전통발효식초를 이용해 애피타이저(전채)를 선보였고, 이후 미쉐린가이드 ‘스타 맛집’으로 선정됐다. 그 셰프가 호주에 가서 해외 셰프들에게 우리 과일식초를 소개했는데 ‘발사믹 식초와는 또 다른 맛’이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그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다. 생각해보라. 한국은 장류, 젓갈류, 김치 등 발효식품 종주국이지만 ‘발효의 정점’인 발효식초는 오랜 기간 명맥이 끊겼으니 사실상 이제부터가 시작 아닌가. 일본 현미식초(흑초), 중국 쌀식초(미초), 이탈리아 발사믹 식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식초를 만들어야 한다. 많은 식초 장인(匠人)이 생겨나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렵게 체득한 제조 기술을 무료로 전파하는 이유인가. 

    “그렇다. 그리 대단한 기술은 아니지만 ‘고생하며 익힌 기술을 왜 가르쳐주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기술을 알려주면 한편으론 경쟁자가 늘겠지만 우리나라 전통발효식초 시장은 더욱 커질 거다. 붕어를 낚으려면 떡밥을 풀어야 하듯, 발효식초를 아는 분이 많아야 그 효능을 알릴 수 있고, 발효식초를 만들어 먹는 가정도 많아질 거 아닌가. 만들어 먹든, 사 먹든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김치시장이 커지듯…. 식초학교 외에도 대학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강의를 많이 하는데 연평균 수강생이 3000~4000명 된다. 그중 1%라도 ‘식초인’이 돼 좋은 제품을 선보이면 서로 경쟁하면서 제대로 된 식초를 많이 개발할 수 있다. 해외시장도 함께 개척하고….” 

    그는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 강의하고 (경기 안양시) 인덕원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저녁때 한 초밥 전문식당에 들렀다. 그런데 주인이 ‘한상준 회장 아니냐’며 반가워하기에 알고 보니 2년 전 식초학교 수강생이더라. 그때 배운 대로 자연발효식초를 만들어 주요 음식에 사용하고 있다며 뿌듯해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꼈다. 물론 ‘단가’가 맞지 않아 모든 음식에 발효식초를 쓸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지만 몸에 좋은 자연발효식초를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다.”

    발사믹 식초 본고장엔 관광객 年 1000만 명

    경북 예천 ‘초산정’은 매년 5000명 이상의 관광객과 식초 관계자들이 찾는다. [사진 제공·한국전통식초협회]

    경북 예천 ‘초산정’은 매년 5000명 이상의 관광객과 식초 관계자들이 찾는다. [사진 제공·한국전통식초협회]

    ‘식초 제자’ 말대로 식당에서는 값이 싼 희석초산(빙초산)을 많이 쓴다. 

    “예전엔 합성식초로 불린 희석초산은 빙초산을 물로 희석한 식초인데, 석유에서 화학적으로 뽑아내 신맛만 날 뿐이다. 식용색소 같은 합성첨가물로 분류돼 소량 섭취했을 때 문제가 없다는 의미이지 몸에 좋은 식초가 아니다.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이 잘 먹는 중식당 음식과 배달음식에 따라오는 오이피클, 무절임 등에 많이 쓰여 안타깝다. 발효식초의 대량생산으로 가격을 낮추면서 발효식초의 장점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쌀 소비를 촉진하고 농촌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발효식초만 한 게 없다.” 

    고령화 문제가 심각한 농촌지역을 ‘비니거(vinegar) 시티’로 만들면 농가 소득을 올리고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초산정은 농림부 주최 ‘6차 산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입상했다. 

    “옳은 지적이다. 식품가공 산업과 관광 산업을 연계해 지역 수입원을 창출해야 한다. 1차 산업인 농업, 2차 산업인 제조업(식품가공), 3차 산업인 서비스업을 연계한다고 해서 요즘 6차 산업을 강조하는데, 사실 6차 산업 측면에서도 식초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농민이 키운 작물을 우리가 사서 가공해 식초로 만들고 유통하면 관광객도 찾아오고…. 초산정만 해도 지난해 관광객 5000여 명이 찾아왔다. 발사믹 식초의 고향인 이탈리아 모데나에는 연평균 관광객이 1000만 명이 넘고, 흑초 산지인 일본 가고시마현을 찾는 관광객의 70%는 ‘식초 관광’을 한다. 지역축제를 보러 왔다 수많은 식초 옹기 앞에서 사진촬영을 하며 식초를 즐기는 거다. 식초 수입보다 관광 수입이 더 많을 정도다. 전국 곳곳에 식초 마을, 즉 ‘비니거 시티’를 만들 필요가 있다.” 

    6월 22~23일 ‘2018 대한민국 식초문화대전’이 열린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 행사를 통해 내 가족이 먹는 건강 식초가 어떤 것인지 알아볼 수 있고, 학술콘퍼런스를 통해 우리나라의 신맛 문화를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초산정도 대회에 참가해 전통발효식초의 우수성을 알리고 관람객이 시음하는 자리를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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