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6

2015.02.16

영혼으로 통한 러시아의 두 거장

레핀이 그린 톨스토이

  • 전원경 문화콘텐츠학 박사·‘런던 미술관 산책’ 저자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5-02-16 13:4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영혼으로 통한 러시아의 두 거장

    ‘밭을 가는 톨스토이’, 일리야 레핀, 1887년, 페이퍼보드에 유채, 27.8×40.3cm, 러시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사실주의 대가이자 서구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1844~1930)은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와 교분을 나눴다. 자연히 그의 붓 끝에서 여러 러시아 예술가의 초상화가 탄생했다. 레핀은 죽음을 며칠 앞둔 형형한 눈빛의 무소륵스키와 자신만만한 표정의 글린카를 그렸으며, 작가 막심 고리키와 니콜라이 고골,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안톤 루빈시테인의 초상화도 그렸다. 레핀의 범상치 않은 통찰력이 느껴지는 걸작들이다.

    만약 레핀에게 자신이 그린 예술가들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고르라고 한다면 과연 그는 누구의 초상화를 택할까. 모르긴 해도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초상화를 꼽을 것 같다. 레핀에게 톨스토이는 단순한 동료 예술가가 아니라 정신적 스승이었다. 그는 이 대작가와 30여 년에 걸쳐 교분을 나누며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그중에는 톨스토이가 초상화의 전형적인 포즈로 앉아 있는 작품도 있지만, 자신의 농장에 맨발로 서 있거나 농사일에 몰두하는 모습, 나무 그늘에 누워 책을 읽는 모습 등 한결 자연스러운 작품이 더 많다. 레핀은 지위와 재산, 작가로서의 부담을 다 떠나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톨스토이의 맑은 영혼을 그리려 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 속 톨스토이는 산신령처럼 길게 기른 흰 수염을 날리며 허름한 옷을 입고 맨발로 걸어가는 현자의 모습이다.

    레핀이 완성한 수많은 톨스토이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작품은 1887년 그린 ‘밭을 가는 톨스토이’라는 작은 그림이다. 초상화 속 작가는 마치 농부처럼 말 두 필이 끄는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질 당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작품을 발표해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나 넓은 영지를 물려받았기에 육체노동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농민의 삶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지주라는 안락한 지위를 포기하지 못하는 데 대해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농노제가 폐지되기 전 자신의 농노들을 해방시켰지만, 이런 파격적 행보는 귀족 사회의 비난만 불러일으켰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마저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귀족이자 대지주라는 세속적인 안락함이 도리어 그에게는 정신적 갈등과 고통의 원인이 된 것이다.

    레핀의 작품 속 톨스토이 모습, 즉 흰 모자를 쓴 채 두 손으로 쟁기를 단단히 잡고 밭을 가는 모습에서 노동으로 이 같은 자괴감과 고뇌를 잠시나마 잊으려 하는 그의 안간힘이 엿보인다. 톨스토이는 레핀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잠깐 포즈를 취한 것이 아니라 진짜 밭을 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레핀은 농사일에 몰두하는 시간만큼은 톨스토이가 자신을 괴롭히는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모양이다. 평소 날카롭다 못해 베일 듯 예리한 레핀의 시각이 이 초상화에서는 잠시 누그러져 있다. 그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에서 안식을 찾는 위대하고 예민한 영혼을 온화한 시선으로 캔버스에 옮겨놓았다.

    작가 로맹 롤랑은 톨스토이를 ‘예술과 인간 모두에서 완성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이 초상화 속 톨스토이의 모습, 그리고 레핀의 시선이야말로 완성에 도달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뛰어난 이 두 명의 예술가는 서로를 영혼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은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을 만큼 탁월하고 또 완벽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