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6

2015.02.16

겨울 맥주가 더 맛있다

‘여름엔 라거, 겨울엔 에일’ 공식 자리 잡아…향과 맛 음미하는 맥주문화로

  • 김지현 객원기자 koreanazalea@naver.com

    입력2015-02-13 1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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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맥주가 더 맛있다

    겨울에는 독특한 수제 맥주가 강세다.

    입안 가득 ‘탁’ 터지는 시원함. 온몸 열기를 식히는 상쾌함. 맥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맥주 광고 역시 여름철 월드컵이나 올림픽 경기를 응원하는 장면, 바닷가에서 휴양하는 장면이 주로 나온다. 맥주 소비는 기온 영향이 강해 업계에서는 ‘날씨가 영업상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연중 가장 더울 때인 7, 8월에 일 년 맥주 출고량의 20% 이상이 팔린다. 맥주가 ‘여름 주류’로 인식돼온 이유다.

    ‘시원함’보다 ‘풍미와 분위기’ 중시

    최근 겨울철 맥주업계에 이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산 맥주 매출의 비중은 떨어지는데, 수입 맥주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 롯데마트의 지난 4년간 동절기(12~2월) 맥주 매출 동향을 살펴보면, 국산 맥주는 2010년 12월에서 2011년 2월까지 매출에 비해 2013년 12월에서 2014년 2월까지 매출이 17.5% 떨어졌다. 반면 수입 맥주는 같은 기간 104.9% 늘었다. 롯데마트의 연중 수입 맥주 매출은 2011년에 비해 2014년 80% 늘어났는데 겨울철에는 그 증가세가 더 큰 셈이다.

    수제 맥주 시장도 계절을 타지 않는다. 소규모 수제맥주점포 연합회인 한국마이크로브루어리협회의 차보윤 회장은 “국산 맥주는 여름에 비해 겨울철 매출이 뚝 떨어지지만, 수제 맥주는 연중 매출이 고른 편”이라고 말했다. 왜 겨울에는 유독 수입 및 수제 맥주의 소비가 늘어날까.

    첫 번째 이유로 맥주를 즐기는 분위기의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브랜드마케팅 전문가인 이장우 박사는 “기존 국내 소비자는 맥주의 ‘청량감’을 즐겼다. 무더위를 식히면서 완전히 취하려고 맥주를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맥주도 와인처럼 ‘좋은 분위기에서 음미하며 천천히 즐기는 술’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풍미, 향을 감상하며 마시는 소비자가 늘어났다. 최근 수제 맥주 가게를 중심으로 에일(Ale) 맥주 소비가 증가한 것이 그 결과”라고 분석했다.



    수제 맥주 가게에서 주로 팔리는 에일은 짙은 색깔에 깊은 맛, 풍부한 과일향이 특징이다. 맥주통 위쪽에서 효모를 발효하는 상면발효 방식을 사용해 18~25도 고온에서 제조한다. 여름에는 5~7도, 겨울에는 7~10도가 가장 마시기 좋은 온도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브랜드로는 ‘기네스’ ‘호가든’ ‘레페’ 등이 있다. 에일과 대비되는 라거(Lager)는 색이 투명하고 향이 얕다. 맥주통 아래쪽에서 효모를 발효하는 하면발효 방식으로 9~15도 저온에서 만든다. 겨울에는 5~7도, 여름에는 3~5도 저온에서 마신다. 한국에는 미리 얼려놓은 유리잔에 담아 차갑게 마시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하이트’ ‘오비’ 맥주와 ‘아사히’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등이 라거에 속한다.

    겨울 맥주가 더 맛있다

    2월 10일 ‘세븐브로이 펍’ 서울 강남역점에서 젊은 고객들이 수제 맥주를 즐기고 있다.

    맥주 맛과 향을 찾는 소비자는 에일을 포함한 수제 맥주를 마신다. 수제 맥주 프랜차이즈 ‘크래프트웍스 탭하우스’는 한국의 산 이름을 딴 독특한 에일을 판매한다. 바나나향의 밀맥주 ‘백두산’, 끝 맛이 달콤한 ‘한라산’, 커피와 초콜릿향이 나는 흑맥주 ‘설악산’, 감귤향이 나는 ‘북한산’ 등이다.

    2월 1일 일요일 저녁 서울 이태원점을 찾은 김연희(27) 씨는 “에일이 좋아 여름보다 겨울에 자주 들른다”고 말했다. “예전에 ‘치맥’(치킨+맥주) 열풍이 불 때는 맥주보다 치킨 맛에 더 집중했다. 맥주를 갈증을 해소하는 물처럼 마신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에일을 맛보면서 맥주에도 깊고 풍성한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름엔 시원함을 즐기려고 라거를 마시지만, 겨울에는 깊고 묵직한 에일을 찾게 된다”고 말했다. 함께 들른 윤승환(31) 씨도 “여름엔 여러 사람과 ‘파이팅’을 외치는 분위기로 취할 때까지 마셔서 맥주 맛을 잘 못 느낀다. 하지만 겨울엔 차분한 분위기의 소규모 모임이 잦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맛이 진하고 고소한 수제 맥주를 마시게 된다”고 말했다.

    실내 파티 증가로 수제 맥주 인기

    음용 온도가 다소 높은 것도 에일이 겨울철 사랑받는 이유다. 수제 맥주 가게 ‘세븐브로이 펍’의 윤인수 이사는 “라거는 차갑게 마시기 때문에 겨울에는 한국인의 체질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에일은 7도가량의 상태일 때 진한 풍미를 즐기면서 마실 수 있다. ‘냉장고에서 꺼낸 직후 샤워하고 나와 마시면 딱 좋다’고 손님들에게 권한다”고 말했다.

    수입 및 수제 맥주 소비 증가의 두 번째 이유로 겨울에 실내 파티가 늘어난 것을 들 수 있다. 자기만의 개성 있는 방식으로 맥주를 즐기려는 욕구가 강해진 것이다. 2월 7일 토요일 이마트 성수점에 들른 주부 박모(40) 씨의 장바구니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맥주가 가득했다. 일반 편의점에서 볼 수 없는 네덜란드 맥주 ‘그롤쉬’, 독일 ‘아르코바이젠’, 미국 ‘시에라네바다 페일 에일’ 등이었다. 이마트는 지난해 10월 15개 점포에서 수제 맥주 코너 ‘크래프트 비어 존’을 신설하고 세계 맥주 200여 종을 판매하고 있다. 박씨는 “겨울에는 친한 지인들을 모아 주말마다 집에서 파티를 연다. 독특한 이벤트를 하고 싶었는데 해외 수제 맥주가 좋은 아이디어가 됐다. 맛도 독특하고 할인행사 때는 오히려 국산 맥주보다 싸다. 파티에 온 지인들 반응이 좋아 여기서 자주 구매한다”고 말했다.

    겨울 맥주가 더 맛있다

    신세계의 수제 맥주 전문점 ‘데블스도어’의 대형 맥주 제조기. 금색 통에서 원료를 끓이고 은색 통에서 맥주를 냉장 보관한다.

    가정에서의 맥주 소비로 새로운 문화도 파생됐다. 맥주 전용 잔의 등장이다. 맥주 마니아 윤정미(29) 씨는 맥주 브랜드별로 잔을 사 모은다. 맥주 맛과 향을 깊게 음미하고 특별한 기분을 누릴 수 있어서다. “‘듀벨’ 맥주병을 살 때 전용 잔을 패키지로 판매하기에 우연히 구매했다. 별생각 없이 따라 마셨는데 입안에 들어오는 첫 느낌부터 달랐다. 입에 닿는 끝부분이 밖으로 살짝 퍼져 있는데 그것이 향을 모아주고 거품을 오래 유지하는 등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됐다. 또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는 잔에 따라 마시니 맥주를 전문적으로 즐기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두 잔 모으다 보니 장식장을 따로 구비해 20잔 정도 진열해놓고 수집도 하고 있다. 맥주 동호인 사이에서 ‘잔덕후’(잔 수집 마니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부 소비자는 거품이 풍성한 일명 ‘크림 맥주’를 직접 제조하기도 한다. 회사원 정준석(32) 씨는 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일본제 아와(AWA)마스터 거품제조기를 이용한다. 컵 바닥에 순간적으로 탄산가스를 분사해 생크림같이 부드러운 거품을 만드는 기계다. 김빠진 맥주에 사용하면 한결 부드럽고 신선해진다. 정씨는 “실내에서 맥주 파티를 할 때 가져가면 인기 최고다. 여름에는 거품이 끈적한 느낌이라 겨울에 더 많이 활용한다”고 말했다.

    식사하며 음미하는 음료로 자리매김

    국내 대기업들도 다양한 맥주에 대한 소비자의 갈망을 제품에 반영하고 있다. 맥주업계 ‘양대 산맥’이라 부르는 오비, 하이트도 지난해 각각 ‘에일스톤’과 ‘퀸즈에일’ 등 에일 맥주를 출시했다. 롯데칠성은 지난해 100% 발효보리로 곡물 맛이 진한 ‘클라우드’를 출시하며 주류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비와 하이트의 양강 구도를 깨며 신생사로는 강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홈플러스에 따르면 2015년 1월 국산 맥주의 브랜드별 점유율은 오비 58.2%, 하이트 33.2%, 롯데칠성 8.5%다.

    신세계의 행보는 더욱 적극적이다.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맥주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데블스도어’를 열었다. 수제 맥주 가게가 대부분 지방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냉장차로 배달해 받는 반면, 데블스도어는 양조 및 보관시설을 함께 갖췄다. 1층에 들어서는 순간 독일에서 수입한 거대한 맥주 제조설비가 눈에 들어온다. 시각적인 화려함과 신선한 맥주로 젊은 소비자를 사로잡겠다는 의도다. ‘페일 에일’‘인디아 페일 에일’ ‘스타우트’ 등 3종류의 에일을 이곳에서 직접 생산하며, 라거는 팔지 않는다. 맥주 가게와 레스토랑을 합친 개념으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듯 맥주를 즐기는 콘셉트다.

    겨울 맥주가 더 맛있다
    2월 8일 일요일 저녁에 들렀을 때 손님의 70%는 20, 30대 여성이었다. 어린 자녀를 동반한 가족 손님들도 보였다. 고객 김미나(32) 씨는 “일반 술집보다 이곳이 편안하다. 알코올 도수가 높아도 향이 깊어서 취하는 줄 모르고 라거처럼 많이 마시지 않는다. 술 마시러 온다기보다 식사하면서 에일을 즐기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맥주에 대한 소비자의 갈망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유럽 맥주 견문록’을 쓴 이기중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는 “최근 에일 맥주 열풍은 소비자들이 국산 맥주의 밍밍한 맛에 싫증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에일 맥주라고 다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에일 맥주를 파는 맥주 가게가 분위기도 세련되고 맥주도 맛있는 편이다. 따라서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 해외 유학생을 중심으로 요즘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미 성행하는 ‘맥주 만들기 동호회’ 같은 모임이 더욱 활성화되고, 맥주의 향과 맛을 음미하는 기준도 세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계절에 따라 특정 맥주가 강세를 보이는 경향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장우 박사는 “겨울에 수입 및 수제 맥주가 잘 팔리는 최근 동향은 소비자의 맥주 음용 문화가 발전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는 ‘이번 계절에 놓쳐서는 안 될 맥주’ 목록을 따로 만들기도 한다. 겨울의 경우 독일 ‘파울라너 살바토르’, 벨기에 ‘델리리움 크리스마스’, 미국 ‘로그 옐로 스노 IPA’ 등이 잘 팔리는데, 우리나라에도 해외 유학을 다녀온 젊은 층을 중심으로 조금씩 알려지는 추세다. 머지않아 국내에도 특정 계절이나 상황에 잘 어울리는 맥주가 다양하게 증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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