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6

2012.09.24

또 하나의 신화를 쓴 태극전사

홈팀 영국·숙적 일본 격파 아시아 축구 수준 과시

  • 글 | 유재영 채널A 사회부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12-09-24 13: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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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올림픽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종목을 꼽자면 단연 축구가 아닐까. 물론 금메달 종목도 많았지만 사상 처음 동메달을 획득한 올림픽 축구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도 일본을 이기고 얻은 동메달이지 않은가. 잔상효과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이번 올림픽 축구팀이 워낙 탄탄한 전력을 지녔기에 내심 기대도 컸다. 구자철, 기성용, 지동원 등 23세 이하 올림픽 대표면서 성인 국가대표로 뛰는 선수가 잔뜩 포진했고, 최고 스트라이커 박주영까지 와일드카드로 합류했다. 국가대표 골키퍼 정성룡도 합류해 사실상 대표 1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스쿼드(squad)’.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라는 점에서 한 경기 한 경기, 1승1패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컸다.

    한국 올림픽 축구팀은 강호 멕시코와 예선 첫 경기를 비기면서 일단 순조롭게 출발했다. 경기 전날 우연히 메인프레스센터에서 만난 멕시코 기자는 1998 프랑스월드컵 예선 첫 경기였던 한국 대 멕시코전(1대 3 한국 패)을 떠올리며 “한국이 멕시코에 질 경우 16강 진출이 어려울 것 같다”고 전망했다. 멕시코가 이긴다는 얘기를 에둘러서 한 것이다.

    기자도 질 수 없어 “우리 선수는 2004 아테네올림픽 축구 예선에서 한국이 멕시코를 1대 0으로 이긴 일만 생각하며 경기할 것”이라고 한마디해줬다. 그러자 멕시코 기자는 장난삼아 “구자철이 골포스트를 맞힐 것 같다”고 했고, 기자는 “그럴 일 없다”고 맞섰다.

    그런데 정말 멕시코와의 경기 후반전에서 구자철이 찬 회심의 슛이 골포스트를 맞고 나온 것이 아닌가. 멕시코 기자의 직업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선 성적 1승2무로 16강에 올랐다. 16강 상대는 개최국이자 축구 종가 영국.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가봉과 비기며 조 2위를 차지한 것이 아쉬웠다. 선수들 컨디션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프리미어리거가 대거 합류한 영국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짜릿한 그날의 감격 여전

    게다가 영국은 안방이었다. 축구뿐 아니라 단체 구기 종목에선 불문율이 있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는 종종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가 ‘미친 짓’을 한다는 것이다. 프로야구를 보더라도 한국시리즈 같은 경기에서 후보선수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잖다.

    우승 0순위 영국과의 경기. 그런 선수가 필요했고, 홍명보 감독도 내심 ‘미칠 수 있는’ 선수를 고르고 있었다. 선택은 지동원. 프리미어리그 선덜랜드에서 활약하는 그는 영국전에 적격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예선 세 경기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그를 선발로 내세우기란 쉽지 않았다.

    장고 끝에 홍 감독은 ‘지동원 시프트’를 선택했다. 박주영이 아닌 지동원을 ‘키맨’으로 보고 박주영에게 활동 반경을 넓히면서 지동원에게 기회가 가도록 적극적으로 지원 사격하라고 주문했다.

    기대대로 박주영이 중앙과 측면을 오가며 영국 수비 공간을 벌려놓은 사이 지동원에게 기회가 왔다. 왼발 발등에 정확하게 얹힌 강력한 슈팅에 영국 골키퍼 잭 버틀랜드는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지동원 본인도 놀란 슈팅.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는 대표팀의 한 선수가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동원이가 왼발로 정확하게 볼을 때려 골대 안으로 공을 꽂아 넣은 것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본인도 놀랐겠지만, 그런 득점을 하리라고 예상한 감독님 안목이 더 놀랍다.”

    지동원의 선제골로 우리는 경기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고, 영국은 홈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다. 승부차기를 염두에 두고 홍 감독이 선발했던 골키퍼 이범영 투입도 적중했다.

    홍명보 감독의 ‘형님 리더십’

    한국 축구 역사상 올림픽 최초 4강 진출. 기자들 입에선 ‘야신’ 김성근 감독에 빗대 홍 감독을 두고 ‘축신’이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홍 감독이 당연히 손사래를 칠까 봐 공식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선수단 장악력에 또 한 번 놀랐던 게 사실이다. 아시아 축구가 이렇다니….

    두 나라가 자존심을 걸었던 올림픽 축구 3·4위전. 축구가 국기나 다름없는 영국인에게는 아시아 축구를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된 경기였다.

    웨일스 카디프시티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만난 테런 스미스 씨는 “같은 아시아 국가가 전혀 다른 캐릭터를 갖고 대등하게 맞서는 게 무척 신기했다. 일본은 거의 스페인 바르셀로나팀의 패싱 조직력을 보였고, 한국은 마치 투우사처럼 90분을 거칠게 상대를 압박했는데 파워 안에 세밀함이 있었다”고 치켜세웠다.

    존 밀러 씨는 “사실 3·4위전을 보면서 영국 축구가 반성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스타들이 뭉쳤으나 조직력이 붕괴된 영국 올림픽 축구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한국 축구를 잘 안다는 웨일스의 한 팬은 “홍 감독이 한국 축구의 전설이 될 것 같다”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사실 기자 사이에서 홍 감독은 ‘홍 운발’로 통한다. 물론 홍 감독의 경기력, 우리 축구계에 세운 공로를 빼고 하는 얘기다. 워낙 뛰어난 실력가이기 때문에 운이 따라온다는 얘기가 맞는 말일 것 같다.

    홍 감독은 21세에 1990 이탈리아월드컵에 첫 출전한 뒤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다. 2002 한일월드컵 스페인전에선 4강을 확정짓는 페널티킥을 성공해 전 국민을 울렸다.

    지도자로 2010년 20세 이하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을 이뤄냈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4강에서 의외의 일격을 당해 3·4위전으로 밀려나면서 위기가 찾아왔지만,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를 연출하며 ‘역시 홍명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런던 현지에서 만난 축구계 원로인사는 “홍 감독처럼 운이 따르고 복이 굴러 들어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물에 빠져도 누군가 축구공을 던져줘 품에 안고 나온다. 이런 사람이 한국 축구계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큰 행운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의 ‘골든 제너레이션’(똘똘한 축구 선수가 대거 뭉친 세대) 시대를 이끄는 장수는 런던에서의 8월을 세련되게 즐겼다. 또 하나의 환상곡을 만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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