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9

2016.10.19

경제

‘해체’ 요구받는 전경련 흥망사

박정희 정권 출범과 함께 탄생, 박근혜 정부 들어 기지개 최근 공격적 행보에 급제동

  •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 ceo@chaebul.com

    입력2016-10-14 16: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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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벌 대기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민간 경제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해체 압력’을 받고 있다. 최근 불거진 이른바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된 의혹 때문이다. 의혹의 핵심은 현 정권의 권력 실세가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해 전경련이 대기업들로부터 준조세에 가까운 출연금 800억 원을 모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경련의 모금 행위를 두고 ‘신(新)정경유착’이라는 비난이 거세게 일면서 해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전경련 해체론’은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재벌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악화될 때마다 전경련은 비판 대상을 넘어 해체 대상으로 거론돼왔다. 이 때문인지 최근 다시 ‘해체론’이 불거진 것을 두고 ‘설마 해체까지야’ 하는 시각과 ‘이번에는’이라는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과 함께 시작된 전경련

    전경련은 1961년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출범했다. 전경련의 설립 배경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당시 부정축재 문제로 단죄를 받을 처지에 놓인 재벌들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급조한 단체”라는 시각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경제 발전을 위해 대기업들이 공동의 구심점을 필요로 해 만든 단체”라는 해석도 있다.

    출발이야 어찌됐건, 전경련이 반세기 이상 존립하면서 한국 경제의 중심에 서 있던 것만은 사실이다. 전경련은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와 함께 경제 5단체로 불렸으며, 그중에서도 재계 핵심 단체로 여겨졌다. 특히 토착자본이 궁핍하던 한국 경제의 현실을 타개하고자 재벌을 전면에 내세워 수출주도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던 박정희 정부 처지에선 재벌을 한 묶음으로 엮어 통제하기 위해 전경련 같은 재벌 구심체가 필요했다. 재벌 처지에서도 인허가권을 쥔 정치권력을 포섭하는 데 각기 움직이기보다 전경련이라는 조직을 통해 소통하는 게 더 편리했다. 말하자면 정치권력과 재벌권력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진 셈이다. 양쪽의 이런 이해관계는 박정희 정권을 거쳐 전두환 정권에 이르는 1990년 이전까지 지속됐고, 정치권력과 재벌권력은 ‘밀월시대’를 즐겼다. 실제 전경련이 재벌을 대변하며 화려한 시기를 보낸 68년부터 89년까지 전경련 회장 자리는 재벌권력의 상징과도 같았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으로 이어지는 전경련 회장직은 정치권력자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권력과 전경련(재벌)의 밀월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재벌의 힘이 정치권력과 대등한 수준으로 커지는 것을 견제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 초기 단행한 금융실명제 도입, 공정거래법 강화 등은 재벌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한 측면도 있다.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정치는 삼류”라며 한국 정치를 비꼰 것은 재벌이 더는 정치권력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시대가 아님을 공식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정부가 재벌을 대상으로 강경한 견제정책을 이어가자 기업들은 투자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집권 중반부에 사실상 재벌의 역공에 백기를 들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전경련 회장단(재벌총수)을 청와대로 초청해 칼국수 만찬으로 재벌 달래기에 나섰다. 그 후 김영삼 정부는 시장의 반대에도 당시 첨예한 문제였던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허용했다. 이 사건은 정치권력과 재벌권력의 균형이 뒤바뀌는 대표적 사례였다. 전경련은 다시 재벌 구심체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고, 자타 공인하는 ‘재계의 본산(本山)’으로 불렸다.

    그러나 1997년 몰아친 외환위기 사태로 전경련은 다시 궁지에 몰렸다. 이에 앞서 김영삼 정부에서 보기 좋게 정치권력을 압도한 재벌은 사업 다각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금융기관으로부터 무한 차입을 하며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 90년부터 빗장이 풀린 주식시장으로 외국인 투자가 밀려들고, 부동산 등 재벌의 자산투자가 급증하자 경제는 표면상 끝없는 활황세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허세 속에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재벌의 부채비율이라는 시한폭탄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침내 97년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재벌의 연쇄부도 사태가 막이 오르면서 외환위기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경제단체로서 한계

    새로 출범함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주범으로 재벌과 전경련을 지목했다. 특히 전경련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김대중 정부는 ‘전경련 해체’를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전경련을 중심으로 한 재벌들은 ‘빅딜카드’와 ‘외환위기 탈출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김대중 정부를 달랬다. 전경련과 재벌은 ‘과도한 중복투자를 자체 조정하겠다’며 ‘외환위기 탈출을 위해 재벌이 앞장서 돌파구를 찾는 게 최선’이라는 청사진을 내밀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 2년이 넘도록 외환위기 탈출의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기에 전경련과 재벌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전경련은 존폐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스스로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일부 재벌총수는 전경련과 불편한 관계가 됐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전경련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전경련 회장 선임을 두고 지금까지 ‘인물난’을 겪는 이유도 여기 있다. 전경련으로선 국내 대표 재벌총수가 회장을 맡아 힘을 과시하기를 바랐지만 마음이 떠난 총수들의 발길을 돌리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원로급 중견 재벌총수가 거의 반강제로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고, 전경련 회장을 지낸 총수가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는 일도 생겼다. 전경련의 이러한 행보는 전경련과 재벌을 동일시해온 국민에게 재벌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전경련의 존재감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던 전경련이 박근혜 정부 들어 다시 기지개를 켰다. 경제민주화 바람을 타고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재벌 순환출자’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전경련의 손을 들어준 것이 계기였다는 분석이 있다. 이를 기점으로 전경련은 외환위기 이후 숨통을 조여오던 정치권력의 재벌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과거 영광(?)을 되찾으리란 그 나름의 기대를 품었다. 실제로 전경련은 2013년 이후 재벌에 대한 외부의 비판적 시각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반재벌 논리’에 대응하기 위한 ‘친재벌 인적네트워크’를 구성하는 등 이전과는 크게 다른 공격적 행보를 보였다. 최근 불거진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사건이나 ‘사단법인 미르’ 사건 등은 그런 맥락에서 터져 나온 결과라는 해석이 많다. 어쩌면 이 두 사건은 전경련이 경제단체로서 제 기능을 하는 데 한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은 전경련 몫이다. 서울 여의도 노른자위 땅에 우뚝 솟은 전경련 소유 빌딩의 임대 수입을 밑천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즐기겠다고 해도 아무도 말릴 수 없다. 하지만 재벌 대변자임을 자처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국민의 지적을 외면하긴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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