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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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오매불망 아바나, 김정은은 왜?

6월 윤병세 장관 방문 계기로 쿠바의 변심 우려…北, 개혁·개방 노하우 배워야

  • 신석호 동아일보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입력2016-08-19 16: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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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의 황장엽 전 북한 조선노동당 비서는 1994년 쿠바 수도 아바나를 방문했을 때 쿠바 공산당의 고위 인사를 따라 시장에 갔던 장면을 종종 회상하곤 했다. 2010년 10월 작고하기 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내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렇게 시장을 막 허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인민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대답했다”고 말했다.

    황 전 비서는 상대방이 쿠바 최고 권력자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당시 황 전 비서의 수행과 통역을 맡았던 호세 아리오사 아바나대 박사(2014년 미국 망명, 현재 미국 플로리다 거주)는 “황 전 비서가 피델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며 “아마 다른 쿠바 간부를  착각했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황 전 비서는 사회주의 혈맹인 쿠바와의 관계 발전을 위해 태평양 건너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간 북한 인사 가운데 최고위급이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의 사람이던 황 전 비서는 아바나에서 김 주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이후 김 주석의 아들 김정일과 손자 김정은도 최측근을 주기적으로 아바나에 보내 공을 들이긴 마찬가지였다.



    올해도 김영철 이어 최룡해 방문

    손자인 김정은 시대에도 고위급 파견이 적잖다. 지난해 3월 이수용 당시 외무상, 6월 강석주 당시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잇달아 쿠바를 방문했다. 올해 5월에는 김영철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대남담당)이 쿠바를 방문했다. 제7차 당대표자회가 끝나자마자 김정은이 자신의 군사 가정교사를 쿠바에 급파한 것은 상당한 외교적 성의로 평가됐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북한 대표팀을 이끌고 간 최룡해 당 부위원장이 8월 11일 첫 금메달 수상 장면을 보지도 못한 채 아바나로 달려간 것 역시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해석된다. 그는 리우로 들어가기 전에도 아바나에 들렀다.

    최 부위원장은 8월 11일 아바나에서 살바도르 발데스 메사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만나 양국 간 우호관계와 협력을 주제로 환담한 뒤 피델 전 의장의 90세 생일 축하선물을 전달했다. 메사 부의장은 6월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특사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과 만났던 인물이다. 생전 김일성 주석은 1966년 10월 당대표자회에서 “쿠바 혁명의 승리는 미국의 코앞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의 첫 승리이며, 쿠바 혁명을 보위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라고 했다. ‘영원한 주석’의 말씀을 ‘영원한 총비서(김정일)’가 이어받고 ‘영원한 위원장’이 될 김정은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김 주석의 말에서 드러나듯 두 나라의 친선을 유지해온 국제정치적 기반은 반미(反美) 공조였다.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북한학 박사)에 따르면 1980년대 평양에서 근무하던 한 쿠바 외교관은 양국 시차가 14시간인 점을 들어 “북한이 자고 있을 땐 쿠바가 미국을 감시하고, 쿠바가 자고 있을 땐 북한이 미국을 감시한다. 원수를 언제나 감시할 수 있다”며 양국의 동질감을 강조하곤 했다. 이 박사는 “북한이 쿠바대사로 파견했던 장정환과 박중국은 군사정전위원회 북한 측 수석대표 출신”이라며 “코앞에서 미국과 대적해야 하는 쿠바 측에 대미 협상 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설명했다.

    사회주의 혈맹인 중국(1979)과 베트남(1995)에 이어 쿠바(2016)마저 미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쿠바가 한국과 손잡지 않게 하는 것은 김정은 시대의 특별한 과제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수교한 중국과 베트남이 1992년 한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한 것은 북한 외교의 뼈아픈 실패였다. 최측근인 김영철과 최룡해의 아바나 방문이 6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아바나 방문을 전후해 집중된 것은 아바나의 ‘변심’에 대한 김정은의 우려를 방증하는 셈이다.

    지구 반대편의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 북한과 쿠바의 경제관계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쿠바 통계청이 내놓은 2014년 대외 교역량 통계에 따르면 북한은 54번째 교역 상대국에 불과하다. 1위 베네수엘라 725만8308태환페소(CUC·외국인에게 환전해주는 화폐로 대략 1달러), 2위 중국(163만5920CUC), 3위 스페인(116만5673CUC)에 이어 21위인 한국(10만3154CUC)에도 크게 못 미치는 1만3131CUC다.



    북한과 쿠바의 밀월이 기대되는 이유

    그렇다고 쿠바에 대한 북한의 이해관계가 꼭 정치적인 것만은 아니다. 군사적으로 북한은 확실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201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청천강호 사건이 대표적이다. 2013년 7월 15일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려던 북한 화물선 청천강호에는 쿠바에서 북한으로 가는 미그-21 전투기 2대와 전투기 엔진 15개, 미사일 부품, 군용 트럭 등이 실려 있었다. 당시 미국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쿠바가 보관 중인 구형 러시아제 무기를 수입해 부품을 활용하려 한 것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미국이 쿠바와 국교정상화 협상 과정에서 북한과의 은밀한 군사 거래를 끊으라고 요구한 것으로 안다”고 말해 쿠바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이익도 실현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북한과 쿠바의 밀월이 한국과 국제사회의 이익에 꼭 어긋나는 것만은 아니다. 북한이 쿠바의 앞선 개혁·개방 경험, 핵무기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려 한다면 말이다. 쿠바 고위 인사가 1994년 아바나를 방문한 황 전 비서에게 시장을 자랑할 정도로 쿠바는 사회주의 개혁·개방의 역사에서 북한을 10년 이상 앞서고 있다.

    원조국 소련의 체제 전환으로 경제위기가 올 것을 직감한 피델 전 의장은 1991년 외국인 관광산업 육성 방침을 선언했다. 그래도 ‘특별한 시기’라는 이름의 경제위기를 막지 못하자 93년에는 분권화, 94년에는 시장화를 핵심으로 한 개혁·개방 정책을 단행했다.

    똑같은 이유로 경제위기에 빠졌지만 개혁·개방을 외면한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이라는 초유의 경제난을 겪었고, 2002년에야 ‘7·1 경제관리 개선조치’라는 이름의 제한적인 분권화 개혁, 2003년 종합시장 도입이라는 시장화 개혁에 나섰다. 북한은 2008년 남한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경협에 차질이 생기자 군부가 자체 역량으로 외국인 관광사업을 독점하고 수익금으로 국방비를 조달하는 ‘쿠바식 국방경제 모델’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김정은이 노동당을 앞세워 군부 힘 빼기에 나선 상황에서 군부가 관광사업을 독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는 의사와 운동선수 등을 해외로 내보내 외화를 획득하는 쿠바의 인력수출사업 노하우를 전수받으려 할 개연성이 높다. 쿠바가 해외 망명자의 국내 가족 대상 송금을 합법화해 연간 수십억 달러의 외화를 조달하듯이 북한도 브로커를 통한 탈북자의 비공식 송금을 제도화하는 날도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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